# 82
김필도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어둠의 상단이란 명칭은 기억에 없었다.
“대륙3상의 한 곳이에요.”
“끄응!”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호숫가로 갔다. 아무래도 술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모르세요?”
김필도가 맥주를 가지고 오자 리시아가 물었다.
“안다면 얼굴을 찌푸릴 리가 없잖아요.”
“대륙3상은 어둠의 상단, 죽음의 상단, 암흑 상단, 세 단체를 말해요.”
“일반 상인은 아닐 테고.”
“사람 목숨을 사고팔아요.”
“청부업체?”
“그런 셈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들어본 적이 없나 봐요?”
“내가 뭘 얻어먹겠다고 거짓말을 합니까?”
“소위 목에 힘깨나 주고 산다는 자들은 대륙3상 중 한 곳의 표적이 됐다는 말만 들어도 기절하거든요.”
“엄청난 자들인가 보죠?”
“대륙3상은 문 대륙을 떠나왔던 자들의 후손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헬칸과 헬을 피해 도망쳤던 자들의 후손이라고요?”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철족의 족장 헬칸의 인연이 이곳까지 이어져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헬칸을 아세요?”
김필도보다 더 놀란 사람은 리시아였다. 인간 중에 헬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대륙3상이 뭔지도 몰랐던 대공이 알고 있었다.
“헬칸은 철족의 마지막 족장이잖소.”
“그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리시아는 중얼거렸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문 대륙의 멸망에 철족이 관련돼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천족이나 마족들도 태반이 몰라요. 그런데 리시아는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아요, 말씀드릴게요. 대신 맥주 한잔 주세요.”
“난 미성년자에겐 절대 술 못 줍니다.”
김필도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아무튼! 미성년자와 원수진 일 있어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마전쟁의 끝 무렵, 각 종족은 헬칸과 헬을 상대할 결사대만 남긴 채 엑소더스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천족이 문 대륙을 떠났다. 그들에 이어 마족이 떠났고, 마지막으로 인간, 엘프, 드워프가 떠났다.
“그 당시 인간은 크게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빛을 숭상하는 자들과 어둠을 숭상하는 자들이었어요.”
빛을 숭상했던 자에는 라하, 샤콴, 노콴, 세딕, 라콰, 쿠라 족이 있었는데, 라하는 태양, 샤콴은 하늘, 노콴은 땅, 세딕은 불, 라콰는 바람, 쿠라는 물을 신으로 섬겼다.
어둠을 숭상했던 부족에는 달을 숭상했던 무라 족, 죽음을 숭상했던 데무 족, 사후 세계를 숭상했던 헨 족, 천둥을 숭상했던 센카 족이 있었다.
“그들은 물과 불처럼 융합을 하지 못하고 서로 으르렁댔대요. 수많은 세월을 그렇게 살았던 종족은 신마 전쟁을 계기로 하나로 뭉쳤다나 봐요. 그리고 신대륙으로 오면서 더욱 견고해졌고요.”
어쩌면 새로운 대륙에서의 버거운 삶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빛과 어둠은 서로 도우며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랬던 그들이 다시 싸움을 시작한 건 5천 년 전이었다. 인구가 늘고 지배 계층의 힘이 강해지면서 정복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전쟁을 역사가들은 제1차 대륙전쟁, 또는 빛과 어둠의 1차 전쟁이라고 불렀어요. 전쟁의 주체가 빛의 종족과 어둠의 종족이기 때문이에요.”
이미 문 대륙에서 1만 년 전쟁을 겪었던 인간에게 전쟁은 아주 익숙한 행위 중의 하나였다. 1백 년은 우습게 지나갔다.
이윽고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다. 승자는 빛의 종족이었고, 그들의 수장이었던 라하 족의 족장이 왕이 되었다.
“대륙 최초의 국가인 라하 왕국의 탄생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다른 부족들의 견제를 견디지 못하고, 6백 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번 뿌리를 내린 왕국의 정치 체계는 해체되지 않았다. 다만 왕국의 이름과 다스리는 주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 후로도 대륙은 십여 개의 왕국을 거쳤다.
“그리고 3천 년 전, 제2차 대륙 전쟁이 벌어졌어요.”
지금껏 왕에게 복종했던 많은 부족장들이 스스로 왕임을 자처하면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빛의 종족과 어둠이 종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려 1천여 년 동안 벌어진 제2차 대륙 전쟁에서는 수많은 왕국이 탄생하고 스러졌다.
“그리고 2천 년 전 발탄 제국이라는 거대 제국의 탄생과 함께 막을 내려요.”
발탄 제국을 세운 자는 태양을 숭상했던 라하 족의 수장 에이몬 라하였다. 초대 황제가 된 에이몬 라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종족의 타파였다. 그는 과감히 라하라는 성을 버리고 전쟁의 신 발탄을 성으로 택했다. 그리고 개명한 자들을 위주로 등용을 시켰다.
부족 체계는 급격하게 몰락하였고, 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완전하게 버린 것은 아니었다.
개명을 하여 황제에게 복종했지만 본인들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했다.
“발탄 제국은 총 5기로 나뉘어요. 1기는 발탄 가문 통치 시기로 제국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어요. 기간은 7백 년쯤 돼요. 2기는 대략 2백 년으로 제국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어요. 빛의 가문의 한 곳인 가라파이 가문이 다스렸어요. 3기는 약 3백 년이고 제국의 발전기라고 할 수 있는데, 황제는 프리우스 가문에서 나왔어요. 프리우스 가문은 천둥을 신으로 삼았던 센카 족의 후손이었어요.”
“프리우스 가문이 센카 족의 후손이었군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그가 지금까지 살았던 성의 이름이 ‘천둥의 성’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천둥을 신으로 삼았던 센 족이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요?”
“당연하죠.”
“과거의 영광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요.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경우가 더 많죠. 그래도 좋아요?”
“그래도 과거에 노예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내 피 안에 고결한 뭔가가 흐르는 듯한 기분도 들고.”
김필도는 헤벌쭉 웃었다.
“풋! 공자는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아무튼 계속해 보세요.”
“4기는 8백 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제국의 성숙기로 분류해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제도가 만들어진 시기라고 보면 돼요. 황제는 아이작 가문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하늘을 신으로 숭배했던 샤콴 족의 후예였어요.”
“그러면 가이우스 가문은 어떤 종족의 후손이죠?”
가이우스는 현 황제의 성이었다.
“가이우스 가문은 모든 게 비밀에 휩싸여 있어요.”
“아직은 모른다는 말?”
“네.”
“그렇다고 해도 문 대륙에서 넘어온 10개 가문 중 한 곳일 가능성이 높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제국 역사 2천 년 중 내 외가와 친가에서 1천 년을 해먹은 셈이네요?”
“해먹었다는 건 너무 속된 표현 아닌가요?”
“2천 년 중에 1천 년 이상을 황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엄청나게 해먹은 거지. 속된 표현은 무슨.”
“호호호! 그렇긴 해요.”
“그럼 숲에 숨어 있던 대륙3상은 어떤 자들이죠?”
김필도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내가 말한 부족들 중에 황제를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한 부족이 있는데, 기억나요?”
“빛을 숭상했던 종족에서는 세딕, 쿠라, 노콴, 라콰 족, 네 곳이고 어둠을 숭상하는 종족에서는 달을 숭상한 무라 족, 죽음을 숭상한 데무 족, 사후 세계를 숭상한 헨 족, 3개 종족이네요.”
“그 중 빛의 종족 네 곳은 4대 공작가라고 불리는 헬모트, 이콰라, 노르탄, 헤라칸이 됐어요.”
“그럼 대륙3상은 어둠을 숭상했던 종족의 후손이군요.”
“어둠의 상단은 무라 족의 후손이고 죽음의 상단은 데무 족, 암흑 상단은 헨 족의 후손이에요.”
“그중 리시아 양이 속한 곳은 어디죠?”
“암흑 상단이에요.”
“헨 족의 족장?”
“옛날이면 그렇게 불렸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히나시스 가문의 가주면서 암흑 상단의 상단주예요.”
“그럼 저 녀석들의 표적은 리시아 양이었군요.”
김필도는 올랜도 미들헤임의 머리를 가리켰다.
“네.”
“끙!”
숲에 들어와 있던 자들이 너무 강하다고 여겼는데 어둠의 상단 상단주인 리시아 때문이었다. 공연한 일에 끼어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튼 오늘 밤은 늦었으니까 쉬도록 하세요.”
김필도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쫓아내려고요?”
“날 죽이려는 자들을 감당하는 것도 벅차요. 다른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여력이 없어요. 날이 새면 떠나도록 하세요.”
김필도는 호수로 향했다.
호숫가에 멈춰 선 그는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싸움으로 인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들을 전부 없앴나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부 몇 명이 있었는지 아세요?”
김필도는 되물었다.
“올랜도 미들헤임 빼고 백 명으로 알고 있어요.”
“여섯 명을 놓쳤네요.”
“서, 설마 다르 95명을 없앴단 말이에요?”
리시아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숲속에 있던 자들은 단순한 어새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둠의 전사라고 불리는 다르들이었다.
전투기갑을 소유한 많은 기사들이 있지만 그들과 다르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투기갑을 걸친 기사 3명이 있어야 한 명의 다르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숲에 있던 자들은 3백 명의 기갑기사와 맞먹는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전멸 직전까지 몰아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그건 그녀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르?”
김필도는 돌아앉았다.
‘다르’가 어둠의 고대어라는 건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리시아가 말한 다르는 어둠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어둠의 전사를 뜻해요.”
리시아는 김필도가 두고 간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제4장 가문을 위한 선택들
“말해 보세요.”
목욕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김필도는 리시아의 손에 들린 맥주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다르를 모르면 엘라하도 모르겠네요?”
리시아의 시선은 그의 손에 들린 맥주잔에서 떠나지 못했다. 차라리 맛을 보지 못했으면 모를까 정말 아쉽기 그지없었다.
김필도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루시안의 기억 회로를 살펴도 엘라하란 말은 들어 있지 않았다.
“네.”
“뜻은 아세요?”
“엘라하는 빛이고 다르는 어둠이라고 알고 있어요.”
요른으로부터 배운 것 중에 하나다.
“그건 원래 말뜻이고요.”
“또 어떤 의미가 있죠?”
“다른 종족에는 전투기갑이 한 가지밖에 없는데 인간은 두 가지를 지니고 있는 이유를 아세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페라시온은 이곳에 와서 만들어진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그건 잘못 알려진 거예요.”
“잘못 알려졌다는 건?”
“신마전쟁 때 빛의 종족이 착용했던 전투기갑이 페라시온이었고, 어둠의 종족이 착용했던 전투기갑이 프라이온이었어요.”
“페라시온을 걸쳤던 자들을 엘라하, 프라이온을 걸쳤던 자들을 다르라고 불렀다는 거군요.”
“엘라하는 빛의 전사, 다르는 어둠의 전사라고 불렀는데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고, 전투기갑이 가진 힘을 완벽하게 사용할 줄 아는 전사들만 그렇게 불렀어요.”
“내 손에 죽은 자들이 다르라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건가요?”
“활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휴도니아 대륙의 역사가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돼 왔어요. 그들은 제1차 대륙 전쟁과 제2차 대륙 전쟁은 물론이고, 발탄 제국의 역사에도 깊숙이 관여해 왔어요.”
“설마 발탄 제국의 황제마저도 그들이 정했다는 건 아니겠죠?”
“……!”
리시아는 말없이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번에도 역시 리시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거… 아주 재미있네요. 그런데 그들이 리시아를 노리는 이유가 뭐죠?”
“원래 샤콴 족의 족장을 배출했던 아이작 가문은 엘라하의 수장 가문이었고, 센카 족의 족장을 배출했던 프리우스 가문은 다르의 수장 가문이었어요.”
“수장 가문이라… 어째 그들 위에 또 다른 자들이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는데, 그래요?”
“각 종족의 대표로 이루어진 10인 위원회가 있어요.”
“각 종족의 대표는 족장 아닌가요?”
“지금은 황제가 모든 부분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만 고대에는 달랐어요.”
“제사장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단 말이군요.”
김필도가 또 다른 권력자가 제사장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을 다닐 때 수강한 고대사에서 배운 내용 때문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정도가 아니라 때론 신탁이라는 미명으로 족장을 바꾸기도 했죠.”
“지금의 10인 위원회는 고대 제사장들의 후손이란 말이군요.”
“그들이 제사장들의 적통 후예인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0인 위원회의 초대 회주가 드반드쉬 대마법사라는 사실이에요.”
“차원의 벽을 세운 그 드반드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