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드반드쉬에 대해 처음으로 말해 준 사람은 올가 드보르칸이었다. 그런데 리시아로부터 또다시 드반드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신마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10인 위원회의 힘은 점점 강해졌대요. 극한 상황이 지속되면 신앙에 기대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처럼 신마전쟁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부족장보다는 제사장을 더 따랐거든요.”
“일리가 있네요.”
“아무튼 문 대륙을 떠나기 직전 10인 위원회의 힘은 각 부족장들을 넘어섰다고 해요. 그런데 신대륙으로 건너오면서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변했대요. 그때 10인 위원회를 다시 정비한 분이 드반드쉬였대요.”
“그럼 10인 위원회 위원들은 전부 마법사겠군요.”
“가장 약한 분이 7클래스인 걸로 알고 있어요.”
“모든 의사 결정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거네요?”
“그럼 셈이에요.”
“발탄 제국의 황제도 그들이 정했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의견만 제시해요.”
“10인 위원회 의견이니까 통치에 참고하라는 정도?”
“그렇죠.”
“그럼 황제를 바꿀 땐?”
“그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분들이 눈여겨봐 두었던 자에게 보위를 넘겨주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피력해요.”
“황제가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듣게 해요.”
“듣게 한다…….”
김필도는 리시아의 말을 되뇌었다.
“드반드쉬는 10인 위원회를 정비하면서 ‘신의 정원’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작명 실력은 별로네요. 나 같으면 대불파라고 지었을 텐데.”
“이름은 별로일지 모르지만 ‘신의 정원’에는 많은 정원사들이 있어요.”
“정원사라면 빛의 전사 엘라하와 어둠의 전사 다르를 뜻하는 거겠죠?”
“드러난 전력만 그래요.”
“10인 위원회 위원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어요?”
“많은 정원사들이 있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겠죠.”
“조금 전에 말을 듣지 않으면 듣게 한다고 했는데 전쟁도 포함되는 거예요?”
“전쟁은 굳이 의견을 피력할 필요도 없어요. 전쟁의 도화선이 될 만한 자를 선택해 없애 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거든요.”
“그럼 발탄 제국 외곽에 있는 왕국들을 병합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그들의 뜻이겠군요?”
“대륙에서 일어나는 굵직굵직한 사건은 전부 10인 위원회의 의지라고 보면 돼요.”
“그렇다면 발탄 제국의 황권이 프리우스 가문에서 아이작 가문으로 넘어갈 때도 그들의 입김이 작용한 거예요?”
“아마도.”
“프리우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는 암살당할 걸로 아는데. 그리고 내 외조부께서도 사인을 알 수 없는 돌연사였고.”
“그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내 어머니는 익사했고 아버지는 마차 전복 사고로 사망했는데 그건 어때요?”
김필도의 몸 주위에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하지만 그 기운은 차갑기만 했지 아직 살기로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내 영역 밖이에요.”
“하지만 10인 위원회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해 줄 말이 없어요.”
리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리시아 양은 왜 표적이 된 거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가운 기운이 사그라졌다.
“이제 내게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리시아는 엷게 미소 지었다.
“난 미성년자에게는 관심 없어요, 리시아 양. 내가 묻는 건 놓친 여섯 명 때문이에요.”
“맞다. 여섯 명을 놓쳤다고 했지?”
리시아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즐거운 표정이네요.”
“그자는 아주 지독하거든요.”
“그자라면?”
“하다크 미들헤임 말이에요.”
“저놈 아버지?”
김필도는 올랜도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래요. 그리고 올랜도 미들헤임의 할아버지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중 한 명이에요.”
“벌집을 건드린 셈이네요.”
말과는 달리 김필도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 사람?’
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10인 위원회는 발탄 제국의 역사를, 아니 대륙의 역사를 써 온 자들이다. 그런 자들과 적이 됐다는데 웃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적을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
그는 진짜 사내였다.
“함께 가도 되죠?”
김필도를 바라보던 리시아가 물었다.
“부하는 없어요?”
“다센 왕국으로 파견 나갔어요.”
“파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갔다는 뜻이에요.”
“그럼 부하들이 없는 사이에 공격을 받은 건가요?”
“아직은 공격받은 적이 없어요.”
“저놈이 처음?”
김필도는 올랜도의 머리를 가리켰다.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리시아 양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짐작 가는 일은 있어요.”
“말하기 곤란한 사정인가 보죠?”
“네.”
“좋아요. 일단 동행하기로 하죠.”
“이걸 인정하는 건가요?”
리시아는 센카를 가리켰다. 그건 곧 약혼자임을 인정하느냐는 뜻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난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아요.”
“그런데 왜 나와 함께 가려는 거죠?”
“문득 그들이 궁금해서요.”
“그들이라면… 10인 위원회요?”
“10인 위원회가 아니라 ‘신의 정원’이란 조직이 궁금해요.”
김필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강해요, 공자.”
“하지만 이놈처럼 목이 잘리면 인간일 뿐이죠.”
김필도는 올랜도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뭐 하려고요?”
“자식의 머리가 잘려 나간 걸 보면 부모는 빡 돌아 버리거든요.”
김필도는 올랜도의 머리를 들고 숲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아가씨의 전 약혼자는 간이 부은 것 같습니다.”
베른은 빗속으로 걸어가는 김필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론 그 사람 같으면 절대 루시안 공자처럼 하지 않을 거예요.”
“그분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는 분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왜 약혼은 직접 했는지 모르겠어요.”
리시아는 빈정대듯 입을 삐죽였다.
“아가씨!”
베른은 나무라는 듯한 투로 리시아의 이름을 불렀다.
“난 좀 쉴게요.”
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필도가 쳐 놓은 천막으로 들어갔다.
‘좋지 않군.’
베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두 사람이 약혼한 건 리시아가 열 살 때다.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을 올리기로 했다.
그 후로 리시아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리시아는 센카의 주인이 됐다. 센카를 받고 반년 후 그녀는 처음으로 센카를 착용했다.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이 베른이었다.
센카를 착용하고 난 리시아는 전 황제와 계부 사이에 했다는 맹세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게 웃으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선대의 약속에 대해서는 잊었다.
이윽고 3년 전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식이 있는 달에 히나시스 가문의 가주였던 리시아의 어머니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평소 지병이 있었는데, 결혼식 준비와 다른 일들로 신경을 쓰다가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결혼식은 무기한 연기됐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3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났다.
물론 아론이 백번 잘못했다.
문제는 암흑 상단 소속 다르 대부분이 이미 아론을 인정하고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지금 상태에서 약혼이 깨지면 암흑 상단은 둘로 쪼개지고, 리시아에겐 껍데기만 남게 된다.
베른은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아직은 리시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을 이용하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대공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가주. 그건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베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일어난 세 사람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물론 일행의 운송 수단은 이야크였다. 그리고 시체들이 있는 곳을 지나칠 때 리시아와 베른도 흔적을 남겼다.
김필도가 흔적을 남겨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95구의 시체가 나뒹구는 숲으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난 것은 김필도 일행이 떠난 5일 후였다.
그들은 총 20여 명이었다. 숲을 수색하며 시체를 수습한 자들은 마법 스크롤을 이용하여 모습을 감췄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실내를 감쌌다.
어둠 사이로 차가운 뭔가가 유령처럼 부유해 다녔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였다.
한 명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고, 다른 한 명은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으로 보였다.
젊은 쪽은 레더 아머를, 늙은 쪽은 검은 로브를 걸쳤다. 머리카락은 둘 다 연한 금발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검은색 석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겉보기엔 온통 검은색 일색이지만 자세히 보면 많은 조각들로 채워진 고급스러운 관이다.
관 안에는 흰색의 수의를 걸친 사내가 누워 있었다.
목과 얼굴에 꿰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체는 다름 아닌 고스트 킹에게 죽임을 당한 올랜도 미들헤임이었다.
레드 아머를 걸친 자는 올랜도의 아버지 하다크 미들헤임이고, 로브를 걸친 자는 조부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이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라고 했더냐?”
헤이먼의 목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아들인 하다크를 바라보는 헤이먼의 눈동자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또 누가 관련돼 있느냐?”
헤이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족으로 보이는 자가 한 명 더 있었고, 데스 와이어 흔적도 남아 있었습니다.”
“리시아 그 계집도 관련이 있단 말이냐?”
“네.”
하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급 다르 95명이면 어느 정도 전력인지 아느냐?”
단 네 명이라고 해서 묻는 말이었다.
“저도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아버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와 최상급 마족, 리시아 히나시스, 베른 벨로치, 네 명에게 올랜도가 죽고 중급 다르 94명이 당했다는 말이구나.”
“네.”
“그걸 믿느냐?”
“다른 가문이 관련돼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발탄 제국 황실은 어떠냐?”
“그들 역시 관련됐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놈들은 어디 있느냐?”
“아직은 어둠의 숲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어둠의 숲을 벗어난 다음엔?”
“펠콘을 지나야 하고 프라넬 대평원도 건너야 합니다.”
“니드(Need)와 빅 소드(Big Sword)에 청부를 넣어라.”
니드는 대륙 최강의 어새신 길드고, 빅 소드는 대륙 최강의 용병 길드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물론 너도 최상급 다르 2백 명을 데리고 가거라. 하지만 먼저 그들을 돕는 자가 누군지 확인해야 한다.”
“그들 네 명이 전부가 아니라고 보십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다크.”
헤이만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비록 중급 다르라고 하지만 그들은 어둠의 상단 정예다. 만일 다르 95명이 네 명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경쟁 가문들은 어둠의 상단 전력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아울러 10인 위원에서 자신의 위상에도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소문이 나지 않도록 서둘러 봉합해야만 한다.
“우리 무라 족은 8백 년 전 센카 족의 프리우스 가문을 물리치고 어둠의 종족 최강이 됐다. 그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 줄 수 없다. 그리고 45년 전에는 우리 어둠의 종족 최고의 숙적이었던 샤콴 족마저 무너뜨렸다. 더 이상 우릴 막을 자들은 없다, 하다크. 우린 늘 최강이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니드와 빅 소드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올랜도의 장례는 놈의 머리를 가져와서 치르도록 하자꾸나.”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