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84화 (84/225)

# 84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그때 두 사람 곁으로 총집사 몰토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헤이만이 물었다.

“아론 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왔단 말이냐?”

“조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알았다.”

헤이만과 하다크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본관으로 들어섰다.

“귀빈실에 계십니다.”

총집사 몰토가 오른편 방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고급 자재와 가구로 꾸며진 방 안에는 190센티미터가량의 금발 사내가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몸을 돌렸다.

사내는 서른 살 전후였다. 사내의 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은색의 눈동자였다. 눈동자가 은색이다 보니 흰자위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아, 눈 전체가 눈동자로 채워진 것처럼 보였는데, 차분함보다는 섬뜩하고 잔혹한 느낌을 주었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헤이만과 하다크는 고개를 숙였다. 금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이 사내가 바로 10인 위원회 회주인 아론 드반드쉬 카이제 이클라우스였다.

“올랜도 소식을 듣고 왔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앉읍시다.”

아론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권하는 그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주인이고 헤이만과 하다크가 손님처럼 보였다.

헤이만과 하다크는 아론 건너편으로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아론이 물었다.

“녀석에게 임무를 맡겼습니다.”

헤이만이 얼른 둘러댔다.

리시아를 없애기 위해 부하를 보냈다가 당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게도 말할 수 없는 임무인가 보군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회주.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다크는 죄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알았소. 더 이상 묻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회주.”

하다크는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진행 중인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소?”

아론은 헤이만을 보았다.

“그자가 강경하게 저항하고 있어 아직 진척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굴복할 것으로 봅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찾아낸 거요?”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입니다.”

“본보기?”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란 자를 아십니까?”

헤이만은 역시 노련했다.

사실 그가 리시아를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손녀딸 때문이었다. 손녀딸이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의 아버지가 아론이었다.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손녀딸을 아론의 정실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론과 손녀딸의 관계를 슬쩍 리시아에게 흘렸다. 하지만 리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아론과 손녀딸이 함께 있는 현장을 덮친 후 호위인 베른만 데리고 가문을 떠났다.

그녀를 없앨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없앨 명분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라는 명분이 생겨난 것이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없애면서 함께 처리해 버리면 따로 명분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가 김필도를 들먹인 이유였다.

“알고 있소.”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그를 이용한다는 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차원 수리공을 이끌고 문 대륙에 다녀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자를 없애서 일단 경고를 할 참입니다.”

“그자가 ‘평생 검을 들어서도 안 되며, 제국의 일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과 교류를 해도 안 된다.’는 우리 권고를 무시하고 활동을 시작했단 말이오?”

놀라운 말이었다.

루시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김필도는 10인 위원회란 명칭조차도 몰랐다. 그런데 아론은 접촉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 모양입니다.”

사실 이들이 권고를 한 사람은 루시안의 아버지 아서 프리우스였다. 하지만 헤이만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떤 활동을 한 거요?”

“헬모트 가문의 기사 여섯 명이 그자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 벌써 활동을 시작했거나, 아니면 활동을 시작할 의사가 있다고 간주해야겠구려.”

“그렇습니다, 회주.”

“그런데 통할 거라고 보시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샤콴 족과 센카 족의 마지막 남은 적통입니다. 그가 죽게 되면 샤콴 족과 센카 족은 완전하게 대가 끊깁니다. 말 그대로 먼지처럼 사라지게 되는 거죠. 아무리 엘라하와 다르의 수장 가문이라고 해도 우리 10인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면 모든 것을 잃고, 결국에 가서는 먼지처럼 사라지게 된다는 걸 보여 줄 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의 가주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겠구려.”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구려. 그리고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신의 정원’에 은밀하게 퍼뜨리도록 하시오.”

“아직도 두 가문을 따랐던 자들이 남아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전 회주께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살려 준 이유를 아시오?”

“아서 프리우스와 캐서린 볼튼 아이작을 따르던 자들의 반발을… 그렇군요.”

헤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일을 떠올리다 보니 답은 바로 나왔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다.

원래 10인 위원회에서는 캐서린 볼튼 아이작의 제거를 결의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정원사를 보내려는 순간 아서 프리우스와 결혼을 해 버린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었다. 몰락했다고 하지만 아이작 가문은 엘라하의 수장 가문이고 프리우스 가문은 다르의 수장 가문이었다. 그들의 결합은 ‘신의 정원’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캐서린 볼튼 아이작의 제거는 무기한 연기됐다. 대신 프리우스 가문의 가주인 아서 프리우스에게 캐서린 볼튼 아이작과 이혼하라는 권고를 했다.

하지만 아서 프리우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가 태어났다.

10인 위원회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0인 위원회의 권고가 먹히지 않은 두 번째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것도 첫 번째 경우와 같은 아이작 가문에서.

곧바로 10인 위원회는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비상 회의에서 다뤄진 안건은 아서 프리우스와 캐서린 볼튼 아이작의 처리였다. 하지만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두 패로 나뉘었다.

위원의 절반은, 10인 위원회의 떨어진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아서 프리우스, 캐서린 볼튼 아이작 그리고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세 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고, 나머지 위원들은 그들을 제거하면 두 가문을 따르던 엘라하와 다르의 반발로 인해 ‘신의 정원’의 분열을 불러와,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라며 반대했다.

다만 10인 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한 그들에 대해 강력한 후속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많은 격론이 오간 끝에 둘은 제거하고 한 명은 살려 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아이작과 프리우스 가문을 따랐던 엘라하와 다르를 묶어 두기 위한 인질이었다.

의도는 적중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두 가문을 따랐던 엘라하와 다르를 색출하여 포섭 가능한 자는 끌어들였고, 그렇지 않은 자는 제거해 왔다.

“그동안 우린 두 가문을 따랐던 엘라하와 다르의 90퍼센트가량을 제거했소. 하지만 나머지 10퍼센트는 작은 단서조차 없소.”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이용해 그들을 색출해 내겠단 말이군요.”

“그렇소.”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주. 루시안에 대한 소문을 은밀하게 흘리도록 하겠습니다.”

헤이만은 고개를 숙였다.

* * *

석실 중앙에는 촛불 하나가 위태롭게 깜박이고 있었다. 상당히 큰 공간인 듯 촛불의 밝기는 석실의 벽까지 미치지 못했다. 다만 흐릿한 음영만 어른거렸다.

그르릉!

석실의 오른편에서 나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높이 2미터, 폭 1미터에 달하는 벽이 회전했다.

쿠웅!

이윽고 벽이 멈췄다.

회전한 벽면에는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로브 후두를 눌러쓴 자가 촛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로브를 걸친 자 발치에는 작은 촛불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로브 후드를 깊숙하게 눌러써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계속해서 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개의 벽이 돌아가고 각 벽면에는 검은 로브를 걸친 자가 한 명씩 기대서 있었다. 그들 앞에도 역시 촛불이 하나씩 켜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맨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자가 입을 열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묘하게 울리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다섯 명이 서 있는 이곳은 변성 마법과 에코 마법이 동시에 펼쳐진 공간이었다.

“그렇구먼.”

네 곳에서 동시에 울림을 동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여러분을 급히 소집한 것은 최근 들려온 소문 때문이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말인가?”

처음 입을 열었던 사내와 마주 보는 쪽에 서 있던 자가 말을 받았다.

“차원 수리공의 인솔자가 돼 문 대륙으로 갔던 그가 돌아왔다고 하네.”

“그 말은 나도 들었네. 그에게 헬모트 공작 가문 기사 여섯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구먼.”

“그가 검술을 익혔단 말인가?”

듣고 있던 네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누구의 말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모양이네.”

맨 처음 입을 열었던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10인 위원회에서 가만있지 않겠군.”

반대편에 있는 자가 말했다.

“그래서 모이자고 한 거네.”

“움직이잔 말인가?”

“18년 전 이곳에는 10명이 서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다섯 명만 남았네. 우린 이미 9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손실은 계속되고 있네.”

“선택의 여지가 없단 말인가?”

“그렇네.”

“만일 그가 ‘권능의 인장’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

“그땐 우리 손으로 제거해야 하네.”

“그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가?”

“발몬 하이저 아이작은 내게 ‘권능의 인장’을 건네주면서 네 가지를 요구했네. 첫째, 아이작 가문의 피가 흐르는 이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지켜 달라. 둘째, 아이작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가 ‘권능의 인장’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달라. 셋째, 자격이 있으면 그를 주군으로 모시고 따라라. 넷째 2대에 걸쳐 시험해 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권능의 인장’과 계약을 해지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네. 그건 다름 아닌 아이작 가문 후손의 피를 ‘권능의 인장’에 적시면 된다고 하였네.”

“캐서린 볼튼 아이작에게는 시험했는가?”

“그녀는 자격이 없었네. 그래서 10인 위원회에서 정원사를 파견한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했던 거네.”

“이제 두 번째 시험을 할 참인가?”

“세월은 더 이상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네. 게다가 10인 위원회에서는 아이작 가문의 피를 이은 자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네. 그들이 손을 쓰기 전에 ‘권능의 인장’에 대한 건을 처리해야만 하네.”

“좋네. 이제 표결을 하도록 하세.”

네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맨 처음 나왔던 자가 일행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네. 신중하게 선택하도록 하게. 지금부터 표결을 시작하겠네. 난 찬성이네.”

사내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찬성이네.”

사내 오른편에 있던 자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나도…….”

“나도…….”

이윽고 남은 세 명이 전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다섯 명 모두 찬성이었다.

“그럼 이곳에 분신을 만들어 심어 둔 후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곁으로 모이도록 하세.”

“우리의 신분을 확인시켜 줄 것은 이거네.”

사내는 왼손을 홀짝 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네 개의 물체가 각 사내들에게로 날아갔다.

로브 사내들은 앞으로 날아온 물체를 잡아챘다.

“반지, 팔찌, 무기의 장신구 등 자신이 원하는 걸로 변형할 수 있는 변형 마법이 걸려 있네. 아무렇게나 원하는 대로 사용하면 되네.”

“확인은 어떻게 하는가?”

“10미터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빛이 흘러나오네.”

“알았네.”

“그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곁에서 보세.”

“밖에서 보세.”

로브를 걸친 사내들은 인사를 하고 촛불을 껐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나직한 소리와 함께 벽면이 본래 위치로 돌아갔다.

네 명이 모습을 감추고 공간에는 맨 처음 나왔던 사내 한 명만 남았다.

“미안하네, 발몬. 자네 가문을 지켜 주기엔 난 너무 늙었네. 자네가 자네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것처럼 나도 내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참이네. 내가 버릴 모든 것에는 신의와 맹세도 포함된다네. 난 자네에게 한 맹세와는 상관없이 마지막 남은 자네의 피붙이를 없앨 참이네.”

사내는 발치에 있는 촛불을 향해 손을 저었다.

휙!

사내의 손에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르릉!

촛불이 꺼지고 나직한 소리와 함께 석벽이 돌아갔다.

“내 가문을 위해서.”

쿠웅!

사내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텅 빈 공간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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