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사공에게도 정보를 사려고요?”
리시아는 금화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나루터에는 뗏목이 정박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조금 전 건물 안에 있던 자만큼이나 늙은 병사가 서 있었다.
“모르는 곳으로 갈 때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뗏목에 올랐다.
리시아는 김필도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뗏목에 오른 그는 먼저 수고한다고 하더니 병사에게 1골드를 건네준다. 그러고는 늙은 병사와 함께 밧줄을 잡아당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집중하고 들어도 정보가 될 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았다.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스타일인가 보네.’
그녀는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뗏목은 천천히 성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도착지점에 다다랐는지 뗏목이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공 전하.”
노병은 뗏목에서 내리는 김필도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수고하게.”
김필도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블랙칸을 데리고 뗏목에서 내렸다. 나루터에서 성문까지는 5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누구냐?”
뗏목에서 내리자마자 성문 위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친 금발 사내는 3군단 군장인 코너 트레일 자작이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다!”
김필도는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성문 앞에서 이름을 말하는 것 또한 정상적인 절차였다.
“난 히나시스 가문의 가주 리시아 히나시스예요. 여긴 내 시종 베른이고요.”
“성문을 열어라!”
드르륵! 드르륵!
코너 트레일 자작의 외침에 이어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성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엄청나네.”
김필도는 놀란 얼굴로 성문을 바라보았다. 성문은 폭이 5미터에 두께가 2미터나 되는 엄청난 크기였다.
더욱 놀라운 건 그런 게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문 하나가 올라가자 또 하나의 성문이 나타났고, 그것까지 올려지자 비로소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곳도 펠콘 성 내부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10미터 높이의 성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성벽의 길이는 5백 미터가량이었는데 좌우측 끝에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었다.
“나는 코너 트레일 자작이오.”
아래로 내려온 코너는 김필도를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지나가는 길이다.”
김필도는 짤막하게 용건을 말했다.
“펠콘 성 규칙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무기를 회수하도록 돼 있소.”
코너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정한 규칙이냐?”
“영주님께서 정한 규칙이오.”
“만약 그 규칙이 내게만 적용된 아주 특별한 거라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은 큰 실수를 하게 될 거라는 걸 명심해라.”
“어떤 큰 실수를 말하는 거요?”
코너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철없는 대공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이스 그놈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난 문 대륙에서도 사소한 실수를 했어. 내가 검을 뽑으면 죽는다고 분명히 경고를 했는데, 한 놈이 나를 향해 검을 뽑은 거야. 참고로 그놈이 검을 뽑을 때 꼭 너 같은 표정이었어. 존만한 새끼가 놀고 있네 하는 표정 말이야.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욱하더라고. 아마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래서 녀석의 목을 향해 이야크 창을 사정없이 찔러 버렸어. 이야크 창을 찌르는데 녀석이 그러더라고, 실수였다고. 검을 뽑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뽑아 버렸다고 말이야. 나도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김필도는 코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실수를 하고 말았어. 아주 사소한 실수 말이야. 이놈의 팔이 멈추질 않는 거야.”
김필도는 눈짓으로 자기 손을 가리켰다.
부르르!
코너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대공의 사소한 실수로 이 생과 작별을 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기 줄까?”
김필도는 엉덩이 쪽에 걸려 있는 설풍과 단도를 가리켰다.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호, 호신용 무기는 가지고 계셔도 됩니다.”
“아하! 호신용은 상관없는 거군.”
김필도는 환하게 웃었다.
“마,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대공 전하.”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실수한 모양이지.”
“그,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서로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뭐 하고 있어?”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코너는 뜨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영주께 안내해 줘야 할 거 아냐. 발탄 제국의 대공이 펠콘 성에 왔는데 영주께 인사도 없이 그냥 간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모, 모시겠습니다, 대공 전하.”
코너는 블랙칸의 고삐를 잡았다.
“수고 좀 해 줘.”
김필도는 훌쩍 뛰어올라 블랙칸에 탔다.
“타고 가도 되는 거예요?”
김필도를 바라보는 리시아의 얼굴엔 놀라움이 가득하다. 비록 남작 바로 위 작위가 자작이라고 하지만 코너 트레일은 40대 중반이다. 즉 상당한 연륜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런 자를 어린아이 다루듯 굴복시켜 버리다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잖아요.”
김필도의 말에 리시아는 이야크에 올랐다.
키가 워낙 작은 탓에 그녀의 이야크 안장에는 손잡이가 하나 더 달려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올라가 앉았다.
그녀는 김필도 옆으로 이야크를 몰아갔다.
“키가 작으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래도 리시아 양은 운이 좋은 거예요.”
“왜요?”
“몸매의 비율이 좋아서 많이 작아 보이진 않거든요.”
김필도는 말을 몰아가며 말했다.
1미터 50센티미터. 옆에 서면 아주 작은 키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생각보다 작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얼굴과 상체에 비해 상당히 길어 보이는 하체 때문일까. 리시아는 작은 키를 몸매로 커버하는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말이라도 고맙네요.”
리시아는 싱겁게 웃었다.
“원래 공치사는 돈 드는 게 아니거든요.”
“흥!”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리시아 양은 어때요?”
김필도는 분해해서 끼워 놓았던 이야크 창을 뽑아 조립했다.
“그런 것 같아요. 조금 전부터 이 녀석이 예민해졌어요.”
리시아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리시아 양은 거북살스러운 느낌을 감지하면 가슴이 예민해져요?”
김필도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리시아는 버럭 소리쳤다.
“방금 가슴을 가리키지 않았어요?”
“내가 가리킨 건 가슴이 아니라 이 녀석이라고욧!”
리시아는 가슴 사이에 걸린 가운뎃손가락 크기의 검은 거미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거미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김필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거 살아 있어요?”
리시아의 가슴에 걸린 장식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기운이 감지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엥?’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생명체의 기운이 감지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리시아는 뭔가를 들킨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운골리안트는 지옥의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거미를 말하는데…….’
김필도는 다시 리시아의 가슴을 보았다.
“어딜 보는 거예요!”
리시아는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그러고 보니… 꽤 크네요?”
새로운 발견이었다. 로브 때문에 가려져 있었을 뿐, 지금 보니 리시아는 상당히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물론 그녀의 체구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죽고 싶어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하하하! 어쩌면 앞으로 술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김필도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이야크 창을 끼우는 장치를 세웠다. 그 장치는 안장의 앞과 뒤쪽에 있었다. 뒤쪽의 장치도 세우고 라콰를 끼워 넣었다.
어느새 일행은 내부 성벽 끝에 도착했다.
김필도는 코너를 쫓아 모퉁이를 돌았다.
내부는 정사각형 구조였다. 반대편까지는 거의 1킬로미터는 될 것 같았다. 건물은 반대편과 좌우측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중앙은 연병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10만 명이 전부 이곳에서 근무하는 건 아니겠지?”
김필도는 코너에게 물었다.
“이곳에 있는 막사는 귀족과 기사들 숙솝니다. 병사들은 외성에 숙소가 있습니다.”
“외성도 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완전한 요새네.”
김필도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코너를 따라갔다.
“저건 뭐 하는 건물이지?”
김필도는 왼편 3백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거북살스러운 기운의 진원지가 바로 그 건물 안쪽이었던 것이다.
덜컹!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히힝! 히히힝!
두두두두! 두두두두!
그리고 수십 마리의 말이 튀어나왔다.
말은 전부가 안장이 얹혀 있는데 안장 양편에 이야크 창이 고정돼 있었다. 전투마에 이야크 창을 고정시켜 돌격하게 하는 공격 기술은,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하곤 한다.
물론 전투마는 무조건 적진을 향해 돌진하도록 도미네이션 마법을 걸어둔다.
“대, 대공 전하!”
코너는 해쓱한 얼굴로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환영식인가 보지?”
김필도는 전투마들을 빠르게 훑었다.
전투마의 수는 대략 50마리 정도다. 마구간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고 이편을 향해 달려오는 걸 보면 의도는 명백하다.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헬칸을 꺼내 안장 옆에 걸었다. 그리고 아공간을 닫았다.
전투마들은 어느새 1백 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안 피할 거예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보며 소리쳤다.
“환영식을 피해 도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거든요. 리시아 양은 피하세요.”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이야크 창 라콰를 집어 들었다.
프릉!
전방에서 달려오는 전투마들이 뿜어내는 투기를 감지한 듯 블랙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됐다.
“가자, 750!”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쿠와와와와아!
성이 떠나갈 듯한 광포한 포효가 블랙칸에게서 터져 나왔다.
파앗!
이어 블랙칸 뒤편으로 흙더미가 날렸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블랙칸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50여 마리의 전투마가 쏘아져 오고 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김필도는 전방을 살폈다. 전투마 사이 거리는 1미터 정도로, 이야크가 뚫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전투마를 보낸 놈들 또한 그걸 노리고 간격을 좁게 잡은 것 같았다.
‘짐승이건 인간이건 집단을 이루면 대장은 늘 있기 마련이지.’
“밟아, 750!”
김필도는 블랙칸의 방향을 중앙에서 달려오는 전투마 정면으로 잡았다. 그놈이 바로 전투마들의 대장이었다.
“차앗!”
거리가 가까워지자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푸욱!
그의 이야크 창은 전투마의 머리를 뚫고 들어갔다.
푹! 푹!
전투마 양쪽에 달려 있던 두 개의 창은 블랙칸의 양쪽 어깨 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진 못했다. 갑옷과 강철처럼 단단한 블랙칸의 근육은 이야크 창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파고들 듯하던 이야크 창은 바로 좌우측으로 튕겨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