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콰앙!
블랙칸의 거대한 덩치가 전투마의 몸통을 들이받았다.
김필도의 창에 의해 이미 숨이 끊어졌던 대장 전투마는 훨훨 날아 뒤편에서 달려오던 말과 부딪쳤다.
전력으로 달리던 말이 다른 말과 충돌하면 그 충격은 엄청나다. 충돌한 말은 바로 숨이 끊어졌다.
앞에서 달리던 두 마리가 죽자 뒤편에서 달려가던 말의 속도가 느려졌다.
퍼억! 우두둑!
바로 그때 거북살스러운 소리가 쓰러진 말로부터 흘러나왔다. 블랙칸이 쓰러진 말을 짓밟고 내달린 것이었다. 전투마의 뼈가 부러지고 배가 터지며 내장이 튀어나왔다.
스악!
그리고 김필도의 이야크 창 라콰가 허공을 갈랐다.
둥실!
츄악!
전투마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잘려 나간 부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다섯 마리의 전투마를 없앤 블랙칸은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또다시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이야크 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전투마의 머리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김필도의 무기는 이야크 창뿐만이 아니었다.
쿠어어어어어!
블랙칸은 광포하게 포효했다.
김필도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전투마를 쫓아 내달렸다. 엄청난 블랙칸의 위세는 도미네이션 마법마저도 무력화시켜 버린 듯 전투마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김필도는 헬칸을 들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퍽! 퍽!
김필도 앞에 선 전투마들은 장작이었다.
헬칸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전투마들의 머리가 쩍쩍 갈라졌다.
전투마 사이를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사람은 김필도뿐만이 아니었다.
검푸른 색의 작은 동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전투마 사이를 움직여 다니고 있었다. 그 작은 동체는 전투기갑을 걸친 리시아였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나간 곳에서는 잘려 나간 말의 머리가 뚝뚝 떨어진다.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는 데스 와이어였다.
그녀는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움직여 다녔다.
데스 와이어 끝에 달린 운골리안트 장식이 전투마를 향해 쏘아져 간다. 운골리안트는 손으로 던지는 게 아니었다. 의지가 발현되면 곧바로 운골리안트가 쏘아져 나가고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 감아 돈다.
운골리안트가 완전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 그녀는 데스 와이어를 힘껏 잡아당기며 몸을 날린다.
데스 와이어가 가공할 무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그때다.
보통 어떤 물체에 칼날 기능이 있는 줄을 걸어 잡아당기면 물체만 잘라 내게 된다. 힘이 한쪽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스 와이어는 잘라 내려는 물체의 두께와 강도에 따라 힘을 두 갈개로 분배한다.
하나는 원래 목적인 물체를 잘라 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이동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그녀는 데스 와이어를 잡아당기는 한 동작만으로 전투마의 목을 잘라 내고,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속도 또한 엄청나게 빨랐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전투마의 목을 잘라 냈다.
퍽! 퍽퍽! 퍽!
쿠워워워워워!
콰악!
“아무튼!”
리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주인에 그 이야크였다. 블랙칸은 전투마가 죽어도 그냥 두지 않았다. 바빠서 그냥 지나쳐갈 수밖에 없을 때를 제외하곤 철저하게 응징한다. 죽은 전투마의 시체를 짓밟아 어육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주인은 거대한 대검으로 전투마의 머리를 부수고, 종인 이야크는 죽은 전투마를 발로 짓밟는다.
잔인함의 극치를 달리는 쌍이었다.
쿠워워워워!
또다시 블랙칸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것은 승리의 포효였다.
리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마 50여 마리 중 서 있는 전투마는 한 마리도 없다. 도망친 전투마도 없다. 마구간에서 나왔던 전투마 전부가 고깃덩어리로 변한 것이었다.
“저 사내…….”
김필도를 바라보던 리시아의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키보다 더 큰 대검을 늘어뜨린 채 역광을 받고 서 있는 김필도의 모습이 화인처럼 뇌리에 박혀들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병장 끝에 있는 건물에서 갑옷을 걸친 10여 명이 이편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척!
김필도는 오른팔을 옆으로 쫙 펴며 헬칸을 수평으로 눕혔다.
“달려, 750!”
김필도는 차갑게 소리쳤다.
쿠어어어어어!
파앗!
두두두두! 두두두두!
블랙칸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전방으로 쏘아여 갔다.
차앙! 차앙! 차앙!
김필도를 향해 달려오던 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제6장 물의 도시 펠콘
“멈추시오!”
갑옷을 걸친 자들 무리 속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펠콘 성의 성주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이었다.
“난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입니다!”
이케이는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김필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블랙칸의 나아가는 속도가 더 빨라질 뿐이었다.
“빌어먹을. 장난이 아니네!”
이케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평생 검과 함께 살았던 그는 김필도의 상태를 금세 알아보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 중 저 기세를 막아 낼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들은 물러나라!”
이케이는 앞으로 튀어나가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영주님!”
기사들은 소리쳤다.
“명령이다! 타앗!”
이케이는 소리치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말은 빠르게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김필도의 헬칸이 허공을 갈랐다.
헬칸을 바라보던 이케이는 검을 불끈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전 마나를 검에 주입했다.
스악!
“헉!”
이케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일상적인 싸움은, 전투마는 그대로 두고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그런데 김필도는 전투마의 머리를 먼저 자르는 변칙 공격을 해 온 것이다. 허를 찔린 셈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케이는 검을 세우고는 몸을 최대한 뒤로 뉘었다.
차앙!
그러자 자연스레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런 그의 눈에 둥실 떠오른 말의 머리와, 잘려 나간 롱소드, 그리고 20센티미터의 단면을 가진 대검과, 붉은 뭔가가 지나가는 광경이 들어왔다. 붉은 뭔가는 말의 목에서 솟구친 피였다.
그 짧은 순간에 네 가지를 전부 보고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케이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이케이는 시선을 내렸다. 몸은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달리던 말이 갑자기 멈췄으니 앞으로 튀어나가야 하는 게 정상인데, 대검과 부딪친 충격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던 힘은 전부 상쇄되고 오히려 뒤로 떨어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빙글!
쿵!
이케이는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으로 내려섰다. 엉덩방아를 찧는 창피한 상황이 되긴 했지만 큰 부상을 입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퍼억!
바로 그때 10미터 앞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케이는 시선을 들었다.
“세상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이야크가 바닥에 앞발을 땅에 고정시킨 채 360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 않은 광경이었다.
푹!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 이야크 창날이 박혀 들었다.
이케이는 시선을 들었다.
“발탄 제국의 대공을 살해하려고 한 죄는 어떻게 처벌하나, 백작.”
김필도는 이케이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평민이라면 즉결처분이 가능하고 귀족이라면 재판에 회부됩니다.”
“그럼 나는 백작을 재판에 회부해야겠군. 발탄 제국 대공을 살해하려고 한 혐의로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갑자기 말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바로 그때 옆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강 건너에서 만났던 경비나 사공처럼 늙은 노인이 해쓱한 얼굴을 한 채로 서 있었다.
“죽여 주십시오, 대공 전하.”
시선이 마주치자 노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된 거냐?”
김필도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오늘 훈련이 계획돼 있었습니다.”
대답을 한 사람은 이케이였다.
“훈련을 위해 전투마에 이야크 창을 장착해 두었는데, 갑자기 미쳐 날뛰더니 우리를 뚫고 나와서 나를 공격했다는 건가?”
“대공 전하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이케이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누가 봐도 이번 건은 살인 미수다. 아니 대공이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전투마와 함께 시체로 누웠을 것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김필도는 이케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60대 중반이고, 반쯤 빠진 흰머리와 미간에 깊이 새겨진 주름에선 세월의 완고함이 느껴진다.
-하다르만이란 성도 기억해 둬라.
-그 가문에도 빚을 졌어요?
-빚이라고 할 것까진 없는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쪽에서 알은체를 하지 않으면 너도 모른 체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면 도와주거라.
-그런데…….
-왜 그러느냐?
-외할아버지나 아빤 다른 사람을 도와준 적 없어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죠?
-대가를 바라고 도와준 적이 없으니까.
-우리가 힘들어도 손을 내밀면 안 되는 거예요?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도움을 준 건 잊어버리고 도움을 받은 것만 기억하라고요?
-그래.
-알았어요. 애써 볼게요.
루시안의 아버지는 눈을 감기 전 많은 것들을 말해 주었다. 남긴 말에는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하다르만이란 성도 그 중 하나였다.
“그만 일어나시오.”
김필도는 라콰를 거둬들여 분해했다. 그러고는 아공간을 열고 헬칸과 함께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이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도 그만 일어나.”
김필도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노인을 보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노인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살지?”
“성 밖에 살고 있습니다.”
“괜찮은 여관 하나 소개받고 싶은데 아는 곳 있을까?”
바로 떠나야 마땅하지만 피곤에 절어 있는 베른은 물론이고, 지난 10여 일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리시아 때문에라도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무,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성에도 빈 방은 많습니다, 대공 전하.”
듣고 있던 이케이가 말했다. 김필도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선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식사라도 함께 합시다.”
김필도는 그렇게 말하고 문이 있는 곳으로 블랙칸을 몰아갔다.
노인은 이케이를 보았다.
“어디로 갈 거냐?”
“황혼으로 갈 생각입니다, 영주님.”
“모시고 가거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블랙칸을 쫓아 내달렸다.
“영주님!”
김필도 일행이 멀어지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이케이 곁으로 모여들었다.
“난 괜찮다.”
“손에서 피가 납니다, 영주님.”
부관인 하크 론셀 자작이 이케이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쿡!”
이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케이의 손에는 3분의 2가량 잘려 나간 검이 아직 들려 있었다. 그런데 검 손잡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케이는 검을 놓고 손바닥을 보았다. 찢겨 나간 곳은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 호구였다.
“여기 있습니다, 영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