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88화 (88/225)

# 88

하크가 포션을 꺼내 내밀었다.

“됐네. 이 정도 상처로 포션은 무슨. 하크 자넨 지금부터 펠콘 영지의 영주인 나 이케이 하다르만 대행이네. 오늘 일어난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관련자를 전부 잡아들이도록 하게. 반항하는 자는…….”

이케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죽여도 좋네.”

“알겠습니다, 영주님!”

하크 론셀 자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라고!”

이케이는 제2부장인 라고 도르텐 자작을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영주님.”

“지금부터 자네는 연회 준비를 하게. 지금까지 열었던 그 어떤 연회보다 더 화려한 연회가 됐으면 좋겠네.”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공중 정원에서 열 참이네. 영지 내 귀족들은 물론이고 펠콘 백작령 주위에 있는 영지의 영주와 귀족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하크 론셀 자작과 라고 도르텐 자작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말 가져왔습니다, 영주님.”

다른 기사 한 명이 말을 끌고 왔다. 말에 오른 이케이는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이 잔상처럼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다. 연병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며 전투마를 향해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전쟁의 신 발탄을 보는 듯했다.

‘너무 늦었소, 대공. 아이작의 시대는 갔소.’

그는 말을 돌려 그의 숙소로 향했다.

* * *

펠콘 영지는 물의 도시였다.

도시 전체에 수로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 곤돌이라고 불리는 작은 배를 타면 펠콘 영지 구석구석까지 돌아볼 수 있다. 건물은 수로를 따라 세워졌는데 절반은 물에 걸친 특이한 구조다.

대부분의 수로는 크고 작은 호수와 이어져 있다. 그 호수는 여행의 시작점이면서 종착점이기도 했다.

펠콘의 이동 수단인 곤돌이 정박하는 장소이다 보니 호수 주위로 위락 시설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김필도 일행이 머물 여관인 황혼이 있는 곳도 호수였다. 하지만 다른 여관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여관은 호수 주위에 세워졌는데 황혼은 호수 중앙의 섬에 세워져 있다.

“그러니까 펠콘이 이렇게 거대 도시가 된 건 티라늄 때문이란 말이죠?”

펠콘을 보고 가장 놀란 점은 수로를 따라 세워진 건물들이었다. 단층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2층 내지는 3층 건물이고, 건물 창에는 넝쿨장미가 늘어져 있었다.

인구가 주둔 병력 포함하여 40만 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은 했지만 펠콘은 척박한 국경 마을이 아니라 화려한 마법등이 밤거리를 밝히는 거대 도시였다.

그런데 펠콘을 이렇게 거대 도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머나먼 숲에서 채굴되는 티라늄이었다.

“대륙에서 생산되는 티라늄의 60퍼센트가 거래되는 곳이잖아요. 거대 도시로 발달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파르 족은 채굴한 티라늄을 가지고 가장 가까운 도시인 펠콘으로 들어왔고, 상인들 또한 티라늄을 쫓아 이곳으로 왔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티라늄 무역은 습지였던 이곳을 수로로 이어진 거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제국7대 도시를 언급할 때 펠콘이 들어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파르 족과의 전쟁으로 티라늄 무역이 끝나면서 많이 위축되긴 했지만 금세 옛 모습을 되찾았다. 펠콘을 발달시킨 게 티라늄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티라늄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발달했던 또 하나의 산업은 다름 아닌 가공 기술이었다.

녹이 슬지 않는 티라늄은 무기를 비롯하여 장신구, 생활용품 등 쓰임새가 무궁무진했다.

기술자들은 조금이라도 싼값으로 티라늄을 구하기 위해 펠콘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펠콘 북쪽 포틴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펠콘의 성장과 함께 기술자들의 수도 점점 늘어났으며, 어느 순간 포틴 언덕은 기술자들의 터전이 됐다.

비록 티라늄 무역은 할 수 없었지만 다센 왕국과 라칸 공국에서 생산된 티라늄은 이곳으로 들어와 가공을 거쳐 제국 전역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으로 팔려 나갔다.

수많은 관광 자원과 티라늄 가공 기술은 자칫 몰락할 뻔했던 펠콘을 지켜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원래 이곳은 대륙 최고 상단이었던 할먼 상단 상단주가 대대로 사용해 왔던 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먼 상단이 망하면서 헐값에 팔려 여관이 됐습니다.”

황혼으로 이어진 구름다리를 건너가며 노인이 설명해 주었다.

‘그 친구와는 인연이 많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 말아먹은 상단이 할먼 상단이었던 것이다.

“여관은 장사가 잘돼?”

“유지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내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자리에 있는 건물인데 안됐구먼.”

김필도는 구름다리를 살폈다. 전부가 나무로 돼 있지만 썩은 부분이 단 한 곳도 없는 걸 보면 영구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하다. 중간 중간에 가로등이 세워져 있고 화려하게 조각된 마법등이 걸려 있다.

구름다리만 해도 보물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노인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을 알아?”

“황혼을 살 때 제가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발이 넓은 친구네. 참, 이름이 뭐지?”

“흄입니다.”

“그럼 골동품상도 아는 사람 있어?”

“알고 있습니다.”

“수만 골드는 나가는 물건인데 그 정도를 사 줄 골동품상도 있을까?”

“그럼 리치 씨를 불러와야겠군요.”

“구전은 섭섭지 않게 줄게.”

“구전은 이미 주셨습니다.”

“내가 언제 줬는데?”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목숨을 구해 줬다는 건 알아?”

“만일 전하께서 절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쯤 목이 잘렸을 겁니다.”

“눈치가 빠르네. 하지만 아직 안전한 건 아냐. 들어가는 순간 또 이렇게 될는지도 몰라.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해.”

김필도는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구름다리를 지나 50미터 정도를 걸어가자 눈앞에 5층 건물이 나타났다. 섬의 북쪽 절벽 위에 서 있는 이 건물이 목적지 황혼이었다. 장사가 안된다는 말이 맞는 듯 황혼에는 손님이 없었다.

김필도 일행은 최고층인 5층에 방을 잡았다.

흄에게 골동품상을 데려오라고 시키고는 객실로 올라갔다. 창문을 열자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샤워나 할까?”

들고 다니는 짐이 없어 정리할 것도 없었다. 안쪽을 대충 훑어본 후 욕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모든 시설은 과거 할만 상단의 별장일 때 사용하던 것들 그대로인 듯, 욕실은 마법 물품으로 가득했다.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 물을 데우는 장치, 배수 장치 등 모든 장치에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물을 데워 욕조에 받은 후 몸을 푹 담갔다.

오랜만에 수염을 깎고, 손톱 발톱도 깎고, 때도 밀었다. 장장 1시간 30분에 걸친 목욕을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옷을 좀 사든지 해야지.”

김필도는 침대 위에 던져 놓은 로브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가진 옷이라고는 요른이 준 로브와 셔츠, 바지가 전부였다. 속옷은 차원 이동할 때 입고 있던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 왔는데 더 이상은 무리다.

여기저기 구멍이 났을 뿐 아니라 상표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바이!”

김필도는 속옷을 쥐고 토치 마법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강한 불꽃이 생겨나고 곧 속옷은 재가 됐다.

“당분간은 노팬티네.”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치고 그 위로 로브를 입었다. 방탄조끼는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방을 나와 아래로 내려갔다.

리시아는 이미 내려와 있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호수가 한눈에 보였다.

“무슨 남자가 목욕을 그렇게 오래 해요?”

김필도가 다가가자 리시아는 빙긋 웃었다.

“완전 요물이네.”

화장 전후가 다른 여자는 많이 봤지만 목욕 전후가 이렇게 다른 여자는 처음이다. 어쩌면 하늘거리는 연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칙칙한 로브를 걸쳤던 리시아는 사라지고, 작은 요정이 앉아 있는 듯했다.

그것도 일반 요정이 아니라 아주 도발적인 성애의 요정이.

“칭찬이에요?”

“일부러 그렇게 입은 건 아니겠죠?”

김필도의 시선이 리시아의 가슴으로 향했다.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풍만하면서도 아름다운 라인을 갖고 있어 저절로 눈이 갔다.

“약혼자와 처음으로 갖는 정찬인데 아무렇게나 입고 나올 순 없잖아요.”

리시아는 김필도의 차림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꼭 그렇게 입고 나와야 했냐고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나도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이게 유일한 거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게 전부라고요?”

“1년 동안 입던 속옷도 오늘 버렸네요.”

김필도는 공연히 물을 들이켰다.

“풋!”

리시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묘한 웃음은 무슨 뜻이죠?”

“그럼 지금?”

“속옷을 입지 않은 것도 나쁘지 않네요.”

“어떤 느낌인데요?”

“해방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바바리맨 녀석들의 기분을 약간은 이해할 것도 같고요.”

“바바리맨이 뭐죠?”

“바바리맨은 말이죠…….”

김필도는 바바리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정말 그런 변태가 있어요?”

“있으니까 바바리맨이라는 명칭까지 생겼겠죠.”

“에이!”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베른은 자요?”

“씻지도 않고 곯아떨어졌어요.”

“그럼 우리 둘이 식사를 해야겠네요.”

“조금 전에 내가 그랬잖아요. 약혼자와 하는 첫 정찬이라고.”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

“가능하다면.”

리시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려 바텐을 보았다. 바텐에 있는 자가 황혼의 주인 호리슨이었다.

“시키실 거라도 있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호리슨이 말을 걸어왔다.

“와인 괜찮을 걸로 하나만 주시오.”

“알겠습니다.”

호리슨이 술을 준비하는 동안에 주방에서 요리가 나왔다. 첫 번째 요리는 버섯 수프였다. 수프는 일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김필도는 수프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

수프를 먹는 동안 주인은 와인과 와인잔을 가져와 따라 주었다. 레드 와인이었다.

“한잔 할까요?”

김필도는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와인의 맛은 깊고 그윽했다.

“원래 이런 자리는 밤에 해야 어울리는데.”

김필도는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밤까지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식사가 나왔다. 메인 메뉴는 송아지 안심스테이크와 연어 샐러드였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다.

주로 질문을 하는 쪽은 김필도였다.

그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대륙 정세에 대해서도 몰랐고, 주변에 왕국이 몇 개나 있고, 공국이 몇 개나 있는지도, 제국 상황에 대해서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보면 리시아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호수 끝에서 밀려든 어둠은 조금씩 섬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섬 곳곳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섬 곳곳에 세워진 마법 가로등에 불이 켜진 것이었다.

“우리 산책할래요?”

“좋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을 나섰다. 마법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유지비 때문에 관리가 힘들다고 하였던 흄의 말이 맞는 듯했다.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버려진 정원을 연상케 했다. 그나마 마법 가로등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길을 따라 얼마쯤 걷자 호수 쪽에서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선착장이 보였다. 선착장에는 곤돌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곤돌은 앞뒤가 똑같은 배였다. 둥글게 말려 올라간 모습이 장난감 같다. 길이는 3미터가량이고, 한가운데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리시아는 의자에 앉고 김필도는 노가 있는 부분에 앉았다. 노가 놓인 자리에도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벤치 형태였다. 아마도 노를 젓고 싶어 하는 연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듯했다.

김필도는 능숙하게 노를 저었다.

“애인 있어요?”

곤돌이 출발하자 리시아가 물었다.

“애인?”

애인 있냐는 질문을 받자마자 머릿속에 두 명의 영상이 떠올랐다. 한 명은 필녀고 다른 한 명은 시아나였다.

“애인은 없는데 평생 돌봐 줘야 할 여자는 있어요.”

“평생 돌봐 줘야 할 여자면 애인 아닌가요?”

리시아의 얼굴에 슬쩍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애인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해서요.”

“여자가 함께 있는 게 싫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요?”

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필도 옆으로 다가갔다.

“왜요?”

김필도는 영문 모를 얼굴로 리시아를 보았다.

“노 젓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그다지 재미있는 건 아닌데.”

김필도는 자리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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