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오픈(Open)!”
리시아는 아공간을 열고 높이가 20센티미터쯤 되는 판을 꺼냈다. 아래쪽은 단단한 나무로 돼 있고, 위는 푹신하게 만들어진 방석이었다.
그녀는 방석을 김필도 옆에 놓고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이제야 좀 눈높이가 맞네.”
김필도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키 작은 게 싫어요?”
“키 큰 사람들은 키 작은 사람들의 비애를 전혀 몰라요.”
“혹시 그동안 내가 불편하게 했나요?”
“많이 불편하게 했죠.”
“이를테면?”
“이야크를 탈 때 허리도 안 잡아 주고, 함께 이야기를 할 때 눈높이를 맞춰 준 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기분 나빴어요?”
“난 키는 작지만 가슴은 큰 여자잖아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마음이 넓다는 거에는 동의해요?”
“마음이 넓은지는 모르겠는데 가슴이 크다는 거엔 동의해요.”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물에 빠지고 싶어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자기 입으로 크다고 했잖아요.”
“그건 마음이 넓다는 뜻이잖아요.”
“그럼 그렇게 말해야지요.”
“흥!”
처음이 아닌 듯 그녀는 김필도보다 더 능숙하게 노를 저었다.
“노 잘 젓네요?”
“무슨 의미죠?”
“별다른 뜻 없어요. 나보다 더 잘 젓는 것 같아서 그래요.”
“남자가 쪼잔하게.”
“뭐가 쪼잔하다는 거죠?”
“능숙하다는 건 자주 저어 봤다는 뜻이고 젊은 여자가 혼자 노를 젓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지금처럼 누군가와 함께 저었을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한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네.”
“진짜 안 궁금해요?”
리시아는 오른손을 김필도의 목 뒤로 돌리더니 손바닥을 김필도 뺨에 대고 그녀 쪽으로 홱 돌렸다.
“네.”
느닷없이 리시아의 가슴이 어깨를 압박해오자 김필도는 움찔하며 대답했다.
“다시 물을게요. 정말로 전혀 안 궁금해요?”
리시아는 찌를 듯 쳐다보며 물었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울 것 같네요?”
김필도는 리시아의 눈을 보았다. 문득 인형처럼 큰 눈이 슬퍼 보였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요!”
“궁금해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이에요. 풀 네임은 아론 드반드쉬 카이제 이클라우스예요. 나이는 서른 살이고 10인 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어요. 머리는 화려한 금발이고 은색 눈동자를 가졌어요. 키는 190센티미터쯤 되고요.”
“완전 엄친아네요.”
“엄친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는 늘 1등이고, 키도 크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집도 부자고, 싸움도 잘하면서 여자들에게 매너까지 좋은 녀석 말이에요.”
“완벽한 사람이란 뜻인가요?”
“네.”
“그럼 그는 엄친아 맞아요. 아니 엄친아 중에서 엄친아예요.”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내 꿈이었어요.”
“완벽함과 답답함은 동의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죠?”
“그 친구가 답답해요?”
“답답하고 완고해요. 늘 이런 말을 달고 살아요.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안 할 거야.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라고 말이에요.”
“늘 상대방이 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한다는 건가요?”
“맞아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래요. 그는 내 눈에 시선을 맞추면서 이렇게 말해요. 지금 키스를 하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을게.”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네요.”
“이성적인 정도가 아니라 키스할 때 방법까지도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아니 행복한 거예요, 리시아.”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억센 손이 그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리시아의 손이었다.
리시아는 그의 입술을 빼았았다.
김필도는 물론이고 리시아 그녀도 생각지 못한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한 이별의 아픔 때문에 모성애가 발동하여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맞춰 버렸다.
입맞춤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딥키스를 하며 두 손으로는 상대방의 옷을 찢듯이 벗겼다.
김필도의 로브와 상의가 떨어져 나가고 리시아의 드레스가 흘러내렸다. 이어 김필도의 바지가 던져지고 리시아의 속옷이 내팽개쳐졌다.
달빛이 숨을 죽일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지만 두 사람은 눈으로 서로의 몸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손과 입으로 서로의 몸을 감상했다.
두 사람의 입술에서 목에서 가슴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양손은 서로의 몸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샅샅이 훑고 다녔다. 눈, 코, 입, 목, 가슴, 아랫배를 낙인찍듯 어루만졌다.
손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 입이 뒤를 따랐다.
쿵!
두 사람의 신형이 곤돌 한편으로 쏠렸다.
곤돌이 급격하게 기울었지만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더 거칠게 서로를 탐했다.
풍덩!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편으로 쏠린 두 사람의 체중을 감당하기엔 곤돌은 너무 약했다. 더구나 김필도는 지금 15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을 가진 상황.
차가운 물에 온몸을 적시자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김필도는 급하게 잠수를 했다. 리시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이 달빛 탓에 물속은 밝았다.
저 아래쪽에서 손발을 휘젓고 있는 리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김필도는 그곳으로 헤엄쳐 갔다.
리시아 곁으로 간 그는 허리를 감고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곤돌을 잡아요.”
김필도는 뒤집어진 곤돌의 측면을 가리켰다.
“가지 말아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꽉 잡았다.
“옷은 찾아와야 하잖아요. 여기 붙잡고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빨리 와요.”
“물론.”
김필도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헤엄을 쳤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떠 있는 리시아의 옷을 발견했다.
“루시안!”
리시아는 헤엄쳐 가는 김필도를 불렀다.
“네.”
김필도는 몸을 멈추고 리시아를 돌아보았다.
“난 아직 그를 사랑해요.”
“아론 그 친구를 말하는 거예요?”
“네.”
“나도 그래요.”
“평생 돌봐 줘야 한다는 그 아가씨요?”
“아뇨?”
“그럼?”
“김필녀요.”
“김필녀?”
“네.”
“그녀는 어디 있죠?”
김필도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헤엄쳐 갔다.
‘맞아. 그랬지.’
문득 조금 전 김필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행복한 거고요.’
그 말은 곧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키스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키스 후에는 이성을 잃었다.
“풋!”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키스만으로 불타올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책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한껏 비웃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욕망은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이 남자와 자고 싶다, 아니 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강박증처럼 조여 오는, 풀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놀랍다는 말밖에…….
제7장 라쿤의 왕
“무슨 생각해요?”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시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에요.”
“겉옷만 주워 왔어요.”
김필도는 드레스와 로브를 들어 보였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비싸고 좋은 건데.”
“선물 받은 거예요?”
“생일날에요.”
“생일이 언젠데요?”
“7월 1일이요.”
“7, 7월 1일이라고요?”
김필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제 이름은 지었으니까 생일을 정해야지.
-생일은 왜?
-우리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선물을 주고받아야 할 거 아냐?
-선물 받고 싶어?
-오빠는 내가 주는 선물 싫어?
-싫기는, 나도 받고 싶어.
-오빠도 그렇고 나도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생일을 정해서 선물을 주고받는 거야.
-12월 25일 어때?
-왜?
-성탄절이니까 따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도 성당에 가면 주잖아.
-에이! 작더라도 각자가 준비해야지 성당에서 주는 게 무슨 선물이야.
-그럼 언제로 하지?
-7월 1일로 하자.
-7월 1일은 왜?
-언젠가 고아원에 있던 신상명세서를 봤는데 내가 들어간 날이 7월1일이었어.
-네가 고아원으로 들어간 날을 생일로 하자고?
-내가 처음 들어간 그날 오빠와 난 처음 만났을 거잖아.
-그렇네?
-7월 1일로 할 거야?
-응! 그렇게 하자.
하지만 생일만 정했을 뿐 선물다운 선물은 단 한 번도 해 주지 못했다. 자장면 한 그릇을 둘이 나눠 먹는 게 전부였다. 난생처음으로 케이크라는 걸 사들고 윤치성과 함께 집으로 갔다.
하지만 필녀는 집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필녀는 자기 생일날에 죽었다.
‘내 생일이기도 하지.’
“무슨 생각해요?”
“아, 아니에요.”
김필도는 얼른 물속에 머리를 담갔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있자 감정이 추슬러졌다.
푸우!
고개를 내밀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속옷을 선물할 정도면 아주 자상한 남자 같은데, 아닌가요?”
“속옷을 선물 받은 게 아니에요.”
“조금 전엔…….”
“그는 돈을 줬어요. 사는 건 내가 하고요. 문제는 속옷 살 돈 정도는 내게도 있다는 거죠.”
“내가 하나 사 줄까요?”
“피이! 자기 옷 사 입을 돈도 없으면서.”
“조금 후면 돈이 생길 겁니다.”
“무슨 수로 돈이 생겨요?”
“흄이 골동품상을 데리고 온다고 했잖아요.”
“난 걱정 하지 말고 자기 옷이나 사 입으세요. 속옷 하나로 1년 동안 입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무튼 가장 좋은 걸로 하나 사 줄 테니까 기대하세요.”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진짜 사 준다니까 그러네.”
“추워요.”
두 사람은 발을 저어 곤돌을 호숫가로 밀고 갔다.
“……?”
문제가 생긴 건 호숫가에 당도하면서부터다. 둘 다 벗고 있는 상태라 아무렇지도 않게 나갈 수 없었다.
리시아는 답을 구하는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함께 나갈래요. 내가 먼저 나갈까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이런 경우엔 남자가 먼저 나가 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나도 알몸이잖아요.”
“그럼 여기서 입고 나가요.”
리시아는 벌떡 일어나서는 옷을 짰다. 얕은 곳까지 나와 있던 탓에 몸을 일으키자 가슴은 물론이고 하체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럴 거면 나가서 짜는 게 낫지 않나요?”
김필도는 리시아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