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제8장 고사를 지내다
다섯 종족 중 가장 약하고 수명이 짧았던 인간은 신을 통해 강한 힘과 영원한 삶을 얻고자 하였다.
인간이 최초로 섬겼던 신은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물의 정령이었다. 그들이 밟고 살았던 땅의 정령은 제외됐다.
정령왕들은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정령을 받아들인 인간은 수명이 더 늘어났으며 천족이나 마족과 비슷한 경지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정령을 받아들인 인간을 정령 전사라고 하였는데 바람의 정령 전사는 라쿤, 불의 정령 전사는 세다크, 물의 정령 전사는 쿠딕이라 하였다.
그들로 인해 인간보다 더 강한 새로운 종족이 탄생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바람의 종족 페어리, 불의 종족 셀릭, 물의 종족 머메이드였다.
새로운 종족이 된 그들은 급속하게 세를 불려 나갔다.
그들의 등장을 가장 두려워했던 종족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자신들과 비슷한 종족의 출현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부 인간은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그 일에 다두 드래곤을 끌어들였다.
다두 드래곤들 또한 신의 자식임을 자처하고 있던 터라 인간이 신으로 모시는 정령왕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인간들이 부탁을 하자마자 정령의 후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불의 정령왕 셀리어스는 셀릭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고, 바람의 정령왕 실레카는 라쿤을 데리고, 물의 정령왕 엘 사르는 쿠딕을 데리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때 정령 편에 섰던 자들이 단두 드래곤들이었다.
신마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다두 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을 지휘했던 세 정령왕은 소멸하였고, 다두 드래곤과 단두 드래곤은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양 드래곤이 신마 전쟁 1만 년 동안 등장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비록 정령왕은 소멸하셨지만 우리 페어리 족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쿠다 말은 내가 페어리 족이란 말이에요?”
“라쿤의 대족장께서 차신 바람의 유물은 바람의 정령왕 실레카께서 남기신 겁니다. 그분께서는 바람의 유물 주인이 나타나면 자신도 부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통해서 부활한다는 건가요?”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부활한다는 말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정령왕이 부활하는 건 좋은데 리시아 양에게는 무슨 이익이 있는 겁니까?”
듣고 있던 김필도가 물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람의 힘?”
“네.”
“바람의 힘이라면 너무 추상적이 않나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았다.
“구체적으로 저도 어떤 건지 모르겠어요. 다만 제 몸속에 거대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요.”
“좋은 거였으면 좋겠네요.”
“무슨 뜻이죠?”
“내가 새끼 조폭을 거쳐 대불종합개발 이인자 자리에 오르면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거든요.”
“이 힘은 우연히 얻은 게 아니란 말인가요?”
“큰 이익을 준 것일수록 치러야 할 대가도 컸어요. 아무튼 바람의 힘이 뭔지 연구나 해 보세요.”
“이거 받으십시오.”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쿠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쿠다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상자는 조금 전 리시아가 받았던 것과 비슷했다.
“내게도 주는 거요?”
“커플만 손님으로 받기 위해 가게 이름을 ‘아내와 남편’으로 지었던 겁니다.”
“여자가 시험에 통과하면 사내에게는 이걸 준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건 뭐요?”
김필도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초록색 팔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수호 방패라고 부르는 정령의 방팹니다.”
“이게 방패란 말이오?”
김필도는 팔찌를 가리켰다.
“정령의 방패를 가진 자는 라쿤 족장의 수신호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리시아 양을 호위해야 한다고?”
김필도는 리시아를 가리켰다.
“그 조항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리시아는 헤벌쭉 웃었다.
“암흑 상단의 상단주이자 헨 족의 족장을 호위한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어요, 리시아.”
그녀는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더맨이었다. 아니 스파이더맨보다 더 강하다. 스파이더맨은 거미줄로 사람의 목은 잘라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녀가 지닌 데스 와이어는 사람의 목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린다.
그런 사람을 호위한다는 건 난센스다.
“난 루시안 공자의 호위를 원해요.”
“오히려 날 보호해 줘야 할 텐데요?”
“아무튼 차 보세요.”
“난 싫습니다.”
김필도는 팔찌를 내려놓았다.
“밑져야 본전이라며 차 보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러세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본전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 안 찬다는 거잖아요.”
“방패라잖아요, 방패.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혼자인 날 보호하기 위해 차는 거라잖아요.”
리시아는 팔찌를 들더니 김필도의 왼손에 강제로 끼웠다.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김필도는 왼손 손목을 주시했다. 리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팔찌는 흡수되듯 손목으로 파고들어갔다.
‘웃!’
김필도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갑자기 왼손 손목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외부에서 침입한 기운과 내부에서 인 기운이 충돌하면서 오는 고통이었다.
‘파고들어가지 못한다.’
김필도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어렸다. 헤를리온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아무리 강한 기운이라도 파고들어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터엉!
머릿속으로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손목 안으로 파고들어가던 정령의 방패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하곤 궁합이 안 맞는 모양이네요.”
김필도는 웃으며 정령의 방패를 뽑았다. 하지만 정령의 방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찌가 루시안 공자의 손목에서 나오기 싫은 것 같은데요?”
리시아는 빙그레 웃었다.
“난 여자만 빼고 모든 것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찰 거예요?”
“팔찌를 뽑는다며 손목을 자를 수는 없잖아요. 이쪽에만 팔찌가 있어서 서운했는데 잘됐죠, 뭐.”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방패는 어떻게 만들죠?”
리시아는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그거야 준 사람이 알겠죠.”
김필도는 쿠다를 보았다.
“저도 모릅니다.”
“그럼 댁이 아는 건 도대체 뭡니까?”
“라쿤의 대족장은 반드시 나타나실 거란 그 한 가지는 압니다.”
“라쿤은 전부 몇 명이나 있죠?”
“라쿤은 폭풍의 전사라 부르고 총 일백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장은 수신호위이십니다.”
“그러니까 내 부하가 1백 명이 생겼단 말?”
“그렇습니다, 수좌.”
“헐! 팔찌를 주더니 이젠 부하를 1백 명이나 준다? 그것도 ‘폭풍의 전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자들을…….”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부담돼요?”
리시아가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일이 꾸며지고, 진행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요.”
“어떻게 할 거죠?”
“역사가 됐든 세월이 됐든 리시아 양과 나는 선택을 받았으니 일단은 지켜봐야죠. 그러다가 아니다 싶으면…….”
“아니다 싶으면?”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놔야지요.”
“어떻게 되돌려 놓을 건데요?”
“연결 고리를 전부 잘라내야지요.”
“그게 무슨…….”
“바람의 유물과 연결돼 있는 자들은 라쿤밖에 없잖아요. 그들만 없으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리시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라쿤은 댁을 포함해서 1백이요, 아니면 포함하지 않은 수가 1백 명이라는 거요?”
김필도는 대답 대신 쿠다를 향해 물었다.
“……!”
쿠다는 멍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가 말한 원점이라는 건 폭풍의 전사 라쿤을 전부 없애 버리는 걸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라쿤의 수가 1백 명인지 101명인지를 묻고 있다.
쿠다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를 죽여서 원점으로 만든단 말입니까?”
“나야 일이 제대로 안 됐을 경우엔 아름다운 이별을 바라지만, 댁들은 왠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우릴 인간 전사와 같이 취급하시면 곤란합니다.”
“내가 보기엔 같아.”
김필도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우린 수명이 5백 년 정도 됩니다.”
“그래 봐야 같아. 왠지 알아?”
김필도는 쿠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목이 잘리면 뒈지니까 같다는 거야.”
“으음!”
쿠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명심해, 쿠다. 나는 물론이고 리시아 양을 가지고 놀 생각이면 지금이라도 포기해. 아니면 너희들은 전부 죽어. 물론 정령왕이라는 그 계집까지 포함해서.”
“가, 감히……!”
‘정령왕이라는 그 계집’이란 말에 화가 난 듯 쿠다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참는 거야. 차후에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눈에 힘주면 목을 쳐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가게 정리해서 내일까지 황혼으로 와. 황혼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
“가, 가게를 정리하란 말입니까?”
“리시아 양을 대족장이라고 부른 놈은 너야. 그리고 대족장은 입으로만 모시는 게 아냐. 몸과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 모시는 거야. 황혼으로 오지 않아도 넌 죽어.”
“이익!”
쿠다는 김필도를 노려보았다.
“검을 가져올 시간을 주겠다. 내 명령을 듣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검을 가져와라. 그게 아니라면 내일까지 황혼으로 오고.”
김필도는 차갑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걸음을 떼려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시 몸을 돌려 보니 리시아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이면 정리할 가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골라 봐요.”
김필도는 제 집인 것처럼 진열장을 가리켰다.
“이렇게 돼 있어요.”
리시아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약지에는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몸속으로 파고들어 갔던 반지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바람의 심장이란 녀석도 나왔어요?”
“여기요.”
리시아는 가슴을 가리고 있던 옷을 내렸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 그 일 때문일까. 스스럼없이 가슴을 드러냈다.
“매립형이네.”
김필도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에메랄드는 그녀의 가슴과 가슴 사이 깊은 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몸속에 박혀 있다는 뜻이었다.
“제 몸과 하나가 됐나 봐요.”
리시아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네요.”
“좋은 점도 있기는 하네요.”
이내 리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두 사람은 상점을 나섰다.
그런 김필도와 리시아를 쿠다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쿱!”
쿠다는 안쪽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라쿤들에게 연락해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천둥의 성’으로 모이라고 해라.”
“그자를 따를 겁니까?”
“수호 방패는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몸속으로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가 수호 방패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호 방패를 거부할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렇다고 떼어 놓지도 못했다.”
“힘의 균형을 이룬 상태란 말입니까?”
“그것도 알 수 없다. 아무튼 여차하면 그를 제거해야만 하니까 동지들에게 그렇게 전해라.”
“알겠습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