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아베다!”
쿠다는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옷 가게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천장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게는 네가 정리해서 쫓아와라.”
“내일 황혼으로 가실 겁니까?”
“어떤 자인지 파악하려면 옆에서 관찰해야 해.”
“알겠습니다, 가게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아베다의 대답을 들은 쿠다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베다의 말처럼 김필도와 리시아는 옷가게 쪽으로 가고 있었다.
“너희들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김필도와 리시아를 쏘아보았다.
“알았어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바람의 종족 페어리 족이라는 걸 알았냐고요?”
“네.”
“인간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페어리 족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럼 나이도 꽤 됐겠네요?”
“민증 나이로 열다섯 살이에요.”
“열다섯 살치고는 가슴과 엉덩이가 너무 풍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조숙한 열다섯 살로 하죠, 뭐.”
“풋! 나이는 상관없는데.”
“루시안 공자는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전 상관있어요.”
“그건 그렇고 신마전쟁 초기에 사라졌다는 세 종족과 10인 위원회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관계가 있을 거라고 보세요?”
“난 제사장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고 했을 때 조금 이상했어요. 아무리 권한이 막강하다고 해도 족장을 바꿀 정도라는 건 말이 되지 않거든요.”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해가 됐다는 거예요?”
“그들이 정령의 후예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궁극의 마법사 드반드쉬 후예가 아니라 정령의 후예라고요?”
“둘 다의 후예란 말이에요.”
“드반드쉬가 정령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리시아 양도 자신이 페어리 족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공자 말은 다른 종족도 자신들이 물이나 불의 종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전부가 가능성일 뿐이군요.”
“맞아요.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땐 그저 싹 잊고 하던 일에 몰두하는 거예요.”
“옷집에 들어가서 옷을 사자는 말?”
“저기로 가요.”
김필도는 첫눈에 보아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옷들이 진열된 가게로 리시아를 끌고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땐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안쪽은 엄청나게 컸다. 여성복과 남성복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옷이란 옷은 총망라하여 팔고 있었다.
“어서 오세용.”
약간은 느끼하고 중성적인 사내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맞았다.
“디자이너 선생님?”
김필도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느끼하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사내는 미남이었다.
어깨를 덮은 웨이브 진 금발에 몸에 찰싹 달라붙은 상의는 코르셋을 연상시킨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바지는 엉덩이는 풍성하고 점점 폭이 좁아지는 승마복과 비슷한 스타일이다.
그리고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고, 신발의 앞코는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나름 스타일리시한 옷차림이었다.
“오우! 손님, 수준이 하이하시네요. 어떻게 내가 우리 가게 수석 디자이너 겸 주인이란 사실을 아신 거죠?”
“얼굴에 벌써 디자이너 선생님이라고 씌어 있는데요, 뭘.”
“호호호! 하이한 교양을 가진 사람들만 금세 알아보는데… 난 알마니예요.”
“나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습니다, 디자이너 알마니.”
“호우! 대공 전하셨군요. 반가워요, 전하. 우리 가게를 찾아주셔서 무한한 영광이에요.”
“훌륭한 디자이너 선생님을 만나 내가 영광이죠. 옷을 구입하고 싶은데.”
“호호호호! 어떤 옷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대공 전하. 우리 집에 없는 옷은 이 세상에 없답니다.”
“사실 내가 가진 옷은 이거 하나가 전부예요. 속옷조차 없어서 지금도 입지 않은 상태고요.”
“이런! 전부 장만해야겠군요.”
알마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일단 속옷 20벌 정도 있어야겠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입을 평상복은 각각 5벌씩, 예복은 2벌씩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겠소?”
“워메, 쓰벌, 봉이네.”
“네?”
“호호호! 아, 아니에요, 대공 전하. 제가 기분 좋을 때 간혹 쓰는 감탄사예요. 그런데 하이한 교양을 가진 분답게 주문도 하이하고 쿨하게 하시네요. 당장 준비하겠어요. 그런데 이분 아가씨는?”
알마니는 선수답게 몇 초도 되지 않아 리시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내 약혼녀요. 나와 마찬가지로 옷이 거의 없는 상태라 필요한 게 많소.”
“아야!”
알마니는 안쪽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야! 이 쓰벌 연놈들아!”
알마니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네!”
그러자 보조 디자이너로 보이는 자들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이분들 사이즈 좀 재. 신발까지 만들 거야.”
“알았어요.”
여자들은 먼저 리시아의 몸 치수를 쟀다.
“속옷은 어떤 게 있소?”
김필도는 알마니를 보며 물었다.
“지금은 이런 게 대유행이에요.”
알마니는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올 것 같은 흰색 바지를 보여 주었다.
김필도의 눈에는 파자마로 보였다.
아무튼 김필도는 속옷을 받아들었다.
속옷을 만든 천은 손가락이 살짝 비칠 정도로 얇고,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혹시 스케치북 있소?”
“원하시는 스타일이 있으세요?”
“그렇소.”
“수석 디자이너!”
알마니는 옆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수석 디자이너라고 불린 사내가 스케치북과 목탄을 가지고 왔다.
“펜이 필요하오.”
“알겠습니다, 손님!”
다시 안으로 들어간 수석 디자이너는 펜과 잉크를 가지고 나왔다. 펜을 받아든 김필도는 속옷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삼각팬티와 사각팬티를 그리고 여자 속옷을 그렸다. 대학을 다닐 때 반년가량 데생 공부를 한 적이 있어서 그림은 제법 잘 그렸다. 남자 속옷과 달리 여자 속옷은 뒷부분까지 그려 주었다.
“이렇게 가능하겠소?”
김필도는 스케치북을 알마니에게 내밀었다.
“어머! 어머! 어떻게 이런 심오하고 하이한…….”
스케치북을 넘기는 알마니는 넋을 잃은 듯한 얼굴이다.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 수없이 많은 날들을 새웠다. 하지만 ‘이거다’하는 디자인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구체화되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던 것들.
그런데 우연히 들른 대공이 엄청난 걸 준 것이다.
“디자이너 알마니?”
김필도는 스케치북에 들어가려고 하듯 고개를 처박고 있는 알마니를 불렀다.
“무, 물론 가능해요, 대공 전하.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엄청난 걸…….”
“속옷이 길면 땀이 차고 불편하잖소. 늘 좀 짧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소.”
“그럼 이 여자 속옷은?”
“여자 속옷은 기능성보다는 남자의 시선을 잡아 묶는 쪽에 중점을 두었소.”
“이를테면?”
“섹시함과 화려함이오.”
“인크레더블!”
알마니는 격정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렇듯 디자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특히 여성 속옷은 기능성보다는 섹시함과 화려함을 강조해야 한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치수 재겠습니다.”
리시아의 치수를 다 잰 보조 디자이너들이 김필도 곁으로 다가왔다.
“이리 줘.”
알마니는 줄자를 빼앗더니 직접 재기 시작했다.
“난 옷 좀 둘러볼게요.”
“그렇게 하세요.”
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가능해요?”
김필도는 알마니가 옆에 내려 놓은 스케치북을 턱으로 가리켰다.
“물론 가능해요.”
“내 약혼자에게 속옷을 선물하고 싶은데 만들 수 있겠소?”
“많이 활발하신 분이세요?”
“그렇소.”
“그럼 엉덩이 쪽은 천이 적을수록 좋겠군요.”
“역시 디자이너 선생님이네요.”
김필도는 빙긋 웃었다.
“대공 전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게 또 있냐는 거요?”
“왠지 더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나도 한때 디자이너를 꿈꾼 적이 있었소.”
“그럼 저렇게 독특하면서도 판타스틱하고, 획기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이 아직 많이 있다는 말씀?”
“남는 게 시간밖에 없었으니까.”
“다 됐어요, 전하.”
치수를 전부 잰 알마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지금 갈아입을 옷부터 봅시다.”
김필도는 기성복이 놓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성복 코너에는 리시아가 먼저 가 옷을 고르고 있었다.
“내 거예요?”
김필도는 리시아가 골라 놓은 옷을 보며 물었다.
풍성하며 주름이 촘촘한 흰색 상의는 블라우스와 비슷하고 검은색 바지는 승마 바지를 닮았다.
리시아가 골라 놓은 신발은 발목까지 오는 부츠였다.
“마음에 들어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자가 처음 골라 주는 옷인데 마음에 들고 말고가 없잖아요.”
김필도는 웃는 얼굴로 리시아가 골라 놓은 옷을 만져 보았다. 천은 전부가 최고급이었다.
“전하 이렇게 해 봤는데 어때요?”
그때 알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알마니는 다리를 싹둑 잘라 낸 속옷을 들고 있었다.
“나쁘지 않구려.”
“그럼 이건 이렇게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이건 임시방편이에요, 대공 전하. 진짜는 따로 있어요.”
알마니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분 치수에 맞는 걸로 다섯 벌을 준비해 줘요. 상의 색은 화이트, 블루, 그레이, 다크, 브라운으로 준비해 주고…….”
리시아는 보조 디자이너 한 명을 달고 다니며 주문 사항을 지시했다.
그렇게 김필도와 리시아는 옷 가게에 무려 2시간을 머물렀다. 그리고 기성복 다섯 벌을 아공간에 넣고, 가게를 나섰다. 나머지는 옷이 만들어지는 대로 배달해 주기로 했다.
“검은 버린 거요?”
가게를 떠나기 전 김필도는 알마니를 보며 물었다.
알마니는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그의 몸 주위에 흐르는 마나는 상당히 안정돼 있었다. 저 정도면 톰벨보다 한 단계 낮은 소드 마스터 경지였다.
“검으로는 성공을 못했지만 가위로는 성공을 했으니, 제 길은 가위에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어쩌면 여행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즐거웠소.”
김필도는 등을 돌린 채 손을 흔들었다.
“전하!”
알마니는 김필도를 불렀다.
“왜 그러시오?”
“에스코트의 기본은 손을 잡아주는 거예요.”
“리시아 양을 말하는 거요?”
“많은 분들의 옷을 만들었지만 이분처럼 아름다운 분은 아직 못 봤어요. 행운을 놓치지 마세요. 그럼.”
알마니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재미있는 친구죠?”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게요.”
“잡을래요?”
김필도는 왼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폈다.
“손의 위치가 너무 높잖아요.”
“그럼 이 정도?”
김필도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리시아는 김필도의 손바닥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순간 따스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