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94화 (94/225)

# 94

리시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옷이 잘 어울리는 체형인가 봐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올려다보았다. 로브를 벗고, 이곳에서 유행하는 옷을 입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나요?”

“나는 키가 작아서 어울리는 옷이 별로 없거든요.”

“알마니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요?”

“뭐라 하던가요?”

“키는 작지만 최고의 몸매라고 극찬을 하더라고요.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으면 대륙 최고 미인이 될 거라면서요.”

“손님에게 으레 하는 말이겠죠.”

“다음에 또 볼 것도 아닌데 아부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가요?”

리시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럴 거예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뭐가요?”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아본 게 처음이거든요.”

“나야 돈만 지불했을 뿐인데요, 뭐.”

“두 시간 내내 날 따라다녔잖아요. 옷 입은 것도 봐 주고. 그런 남자는 별로 없어요.”

“그건 리시아가 남자를 잘 몰라서 그래요. 남자는 바쁘지만 않으면 누구나 다 나처럼 해요. 그런데 손이 참 따뜻하네요?”

“나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김필도는 가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서 빵집과 정육점에 들러 떡과 돼지 머리를 찾았다.

마차 보관소에는 흄이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 없었지?”

“네.”

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오르자 마차는 출발했다.

황혼에 들어서자마자 김필도는 곧바로 고사 지낼 준비를 했다. 고사 지낼 위치는 황혼 1층 식당이었다.

식당 중앙 테이블 위에 돼지 머리와 고사떡을 놓았다. 돼지 머리 콧구멍에는 1천 골드짜리 골드 페이퍼를 둘둘 말아 꽂고 술잔에 술을 따라 놓았다.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천지신명님! 하늘 일마다 성공하게 해 주시고,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태평하게 해 주십시오.”

김필도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제9장 공중 정원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개보수 작업이 시작됐다.

먼저 시작한 곳은 섬이었다.

1백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잡초를 뽑고 무너진 언덕과 길을 보수하였고, 정원사들은 나무를 정리했다. ‘아내와 남편’의 주인이었던 쿠다 또한 정원사들 틈에 섞여 나뭇가지를 잘랐다.

꼬박 5일 동안 작업을 하고 나자 섬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췄다.

옷이 도착한 것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직접 왔네요?”

놀랍게도 옷을 실은 마차를 끌고 온 사람은 가게 주인 알마니였다.

“직접 온 게 아니라 아주 왔어요.”

“아주?”

“대공 전하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전부 뽑아내기 전에 쫓아내도 가지 않을 거예요.”

알마니는 데려왔던 보조 디자이너들에게 짐을 내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곧 수십 개의 상자가 쌓였다. 그것들은 전부 김필도와 리시아의 옷이었다.

“내가 이렇게 주문을 많이 했나?”

산더미처럼 싸인 상자를 보며 김필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전하께서 주문하신 거 외에 추가로 제가 드리는 선물도 있어요.”

“선물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아닌가?”

“원래 수준이 하이한 디자이너는 멋진 옷걸이를 보면 옷을 마구마구 입히고 싶어 안달이 난답니다. 그리고 이왕 선물을 할 거면 ‘억!’ 소리 나게 하자는 게 제 신조거든요. 이거 받으세요.”

알마니는 싱긋 웃으며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다른 상자와는 달리 화려하게 수가 놓인 천으로 싸인 그것은 김필도가 주문한 리시아의 속옷이었다.

“뭐가 이렇게 크지?”

김필도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다.

“속옷인데 한 벌만 하는 건 그렇잖아요. 그래서 아예 10벌을 만들었어요. 대공 전하께서 그려 주신 걸 베이스로 엉덩이 부분을 T자로 한다든가, 망사 천을 사용해서 만든다든가 하는, 미적 감각을 더하여 약간의 변형을 거쳤어요.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고마워.”

“천만에요, 디자인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제가 오히려 고맙지요.”

김필도는 속옷이 든 상자를 리시아에게 건넸다.

“뭐죠?”

리시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전에 속옷 사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전부 속옷이란 말이에요?”

“한 벌만 주문했는데 알마니가 많이 만들어 온 것 같아요.”

“속옷 디자인은 대공 전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알마니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이세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보았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의상 디자이너 생활을 10년 넘게 했지만 그것보다 멋지고 화려하고 판타스틱한 속옷은 처음이에요.”

알마니는 마차 옆에 대기하고 있는 보조 디자이너 헤라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리시아 양께 옷 입는 법을 가르쳐 드리세요.”

“알았어요.”

헤라는 총알처럼 리시아 옆으로 가서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리시아는 헤라를 데리고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 또한 김필도가 디자인했다는 속옷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했다.

“전하!”

그때 밖에서 일하던 호리슨이 손님을 데리고 왔다.

손님은 펠콘 영주 이케이 하다르만의 부관인 하크 론셀 자작이었다.

“하크 론셀 자작입니다, 대공 전하.”

하크 론셀 자작은 김필도에게 인사를 하고는 영주의 전언을 꺼내 건넸다.

영주의 전언에는 내일 공중 정원에서 연회가 있으니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달라고 돼 있었다. 시간은 오후 6시였다.

“알았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하크 론셀 자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갔다.

“공중 정원에서 연회를 연다고 참석해달라고 하는군.”

김필도는 알마니를 보며 말했다.

“공중 정원에서 연회를 연다고요?”

알마니의 얼굴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공중 정원은 어떤 곳이지?”

알마니가 깜짝 놀란 이유가 공중 정원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말 때문이라는 걸 김필도는 알아차렸다.

“말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정원으로 이동 마법이 아니면 갈 수가 없고,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란 말을 들었어요.”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5년 전에 한 번 열린 걸로 알고 있어요.”

“여간해서 열리지 않은 곳인데 이번에 열린다는 말?”

“그래요. 아마도 대공 전하 때문에 열 가능성이 높아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어떤 사람이지?”

김필도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보자마자 대공 전하라고 부른 두 번째 사람이고, 작위를 가진 귀족 중에서는 첫 번째 사람이었다. 문득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공작 같은 백작으로 유명한 분이에요.”

“공작 같은 백작?”

“국경에 있는 변경백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특히 주변 귀족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요. 만일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면 주위 영주들이 데려올 병력이 30만 명은 될 거란 말이 있어요.”

“총 4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단 말이군.”

“맞아요. 펠콘을 괜히 제국7대 도시에 끼워 넣는 게 아니에요. 비록 백작에 불과하지만 이케이 하다르만은 제국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인물 중의 한 명이에요.”

“그럼 반드시 연회에 가 봐야겠네.”

“다른 귀족들이 발치에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최고로 멋지게 꾸며 드릴게요. 마차도 제 마차를 이용하세요.”

“부탁할게.”

다음 날.

오후 4시 30분경 김필도와 리시아는 황혼을 나섰다.

김필도의 옷은 화려함보다는 차분함을 강조한 패턴이었다. 흰색 블라우스는 칼라를 비롯하여 상의 단추 부분에 달던 레이스를 과감하게 제거하여 단순화하고, 소매는 손등의 절반을 덮도록 길게 뺐다. 블라우스 위에는 허리 위로 올라오는 진회색 짧은 조끼를 걸쳤다.

아래로 갈수록 몸에 달라붙는 레깅스 스타일의 검정 바지를 입고 신발은 차원을 넘어올 때 신었던 옥스퍼드화를 신었다.

구두약이 없어 소기름을 얻어 닦았는데 제법 반질반질하다. 구두를 본 알마니가 광분했지만 김필도는 모른 척했다.

상의는 이곳에서 유행하는 연미복 스타일이었다. 몸을 꽉 조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소재의 천을 사용해서인지 착용감이 아주 좋다.

왼편 허리에는 설풍과 단도를 나란히 차고 그 위로 몸에 딱 맞는 반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이 좁은 벙거지 형태의 모자를 썼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신사풍이었다.

물론 검이 없다는 가정하에.

반면에 옆에 있는 리시아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붉은 민소매 드레스를 입었는데 가슴과 등은 깊게 파여 속살이 드러났다. 치마는 타이트하게 엉덩이를 조이다가 아랫부분은 풍성한 라인을 그린다.

특히 가슴골 사이에 매달린 푸른색 보석과 배꼽 부분에 붙은 검은 거미 장식이 눈을 붙잡았다. 교묘한 위치에 있는 두 장식은 도발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녀는 드레스 위에 숄을 걸치는 것으로 스타일을 완성했다.

“최고예요, 레이디!”

알마니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이 오르자 마차는 곧 출발했다. 마차는 알마니가 몰았다.

“아마 대공 전하를 모시는 자리라면 주위 영지 영주들이 전부 올 거예요. 전하께서는 그들 중 두 사람만 기억하시면 돼요.”

마차를 몰며 알마니가 말했다.

“누굴 기억해야 하는 거지?”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과 아델슨 토가텔 백작 두 사람이에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과 더불어 서로군벌의 수뇌라고 할 수 있어요.”

“서로군벌의 힘은 어느 정도지?”

“겉으로 드러난 건 없지만 암중으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그들이 자기네들 모임에 날 초대한 이유가 뭘까?”

“전 황제의 유일한 상속자라는 상당한 신분이지만, 가진 것도 없고 권력도 없는 사람을 써먹을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자리를 빛내 줄 용도로는 나쁘지 않다?”

“천장에 엄청나게 우아하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으면 홀의 수준이 훨씬 하이해 보이거든요.”

“장식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말이구먼.”

“제 생각일 뿐이에요.”

“그럼 난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뭐가요?”

“전에는 그런 자리에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거든.”

김필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공중 정원은 황혼에서 남쪽으로 40분가량 떨어진 남호 상공에 위치해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섬이네.”

김필도는 신기한 얼굴로 공중 정원을 보았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공중 정원의 크기는 남북 3백 미터, 동서 5백 미터의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이고 50미터 상공에 떠 있었다.

공중 정원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남호 남쪽 영주 별장에 위치해 있었다.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전날 소식을 전하러 왔던 하크 론셀 자작이 맞아 주었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공 전하.”

하크 론셀 자작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세 사람을 이동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마법진을 통해 공중 정원에 당도했다.

마법진은 곧바로 연회실로 이어졌다.

“공자.”

리시아는 김필도를 불렀다.

“네.”

“아래를 보세요.”

김필도는 고개를 숙였다. 남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놀랍게도 공중 정원의 바닥은 투명해서 아래가 그대로 투영됐다.

“엄청난 마법사가 만든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일단은 즐기도록 하죠.”

김필도는 코트를 벗어 알마니에게 건넸다. 그리고 리시아의 어깨에 걸친 숄도 벗겨 건넸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홀로 향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 전하와 약혼녀 리시아 히나시스 양 입장이오!”

문 앞에 있던 시종이 목청껏 외쳤다.

그러자 음악이 뚝 그치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부담스럽네요.”

머리 위쪽에 있는 마법등이 환하게 켜지며 아래를 비추자 김필도는 쑥스럽게 웃었다.

“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훨씬 어울렸을 텐데, 미안해요.”

“오오!”

“여신이네.”

“마법으로 고쳤을 거야.”

“이마도 손대고, 눈도 크게 하고 코는 높이고 입술도 두툼하게 만든 것 같아.”

“얼굴뿐만이 아냐. 가슴도 고친 것 같아. 저 작은 키에 저런 큰 가슴이 가당키나 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 안 들려요?”

“전부 나 욕하는 소리잖아요.”

리시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여자가 예쁘면 남자들은 침을 삼키고, 여자들은 욕을 한다는 거 몰라요?”

“내가 예뻐서 욕을 한다는 거예요?”

“도도하게 턱을 세우고 가슴도 더 내밀어요. 그리고 대화를 할 때 절대 올려다보지 말 것.”

“알았어요.”

리시아는 어깨를 활짝 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더욱 도드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