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흡!”
“어머머!”
사내들은 침을 삼켰고, 여자들은 질시 가득한 신음을 내뱉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이 크게 소리치며 김필도 옆으로 다가갔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소, 백작.”
김필도는 담담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영주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케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주들은 일렬로 늘어섰다.
“그럽시다.”
김필도는 소리 없이 웃었다.
늘어선 순서가 은연중에 형성되는 서열이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분은 홀트마하 영지의 영주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입니다.”
이케이가 가장 먼저 소개시켜 준 사람은 알마니가 말한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이었다. 알마니에게서 말을 들을 때 상당히 나이를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40대 초반으로 상당히 젊었다.
“처음 뵙습니다, 대공 전하.”
“반갑소, 백작.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그런데 혼자 오신 게요?”
김필도는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집사람은 급한 일이 있어서 처갓집에 갔습니다.”
“그랬구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로 소개받은 자는 아델슨 토가텔 백작이었다. 그는 60대 중반 정도로 이케이와 비슷한 연배였다.
영주와 영주 부인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까지 소개받는 데 30분가량이 소요됐다.
멈췄던 음악이 다시 시작됐다.
일부는 홀 중앙으로 나가 춤을 추고 일부는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눴다.
“문 대륙에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리시아와 술을 한잔 하고 있는데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이 다가왔다.
“차원 수리공을 인솔해서 다녀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요.”
김필도는 대수롭잖게 받아넘겼다.
“함께 춤을 주실 영광을 제게 주십시오.”
그때 젊은 청년 한 명이 다가와 리시아에게 춤을 청했다. 리시아는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추세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리시아는 배꼽 부분에 붙어 있던 운골리안트를 가슴 부분으로 올려붙이고는 청년을 따라 홀로 나갔다.
“문 대륙은 어떻습니까?”
리시아를 바라보던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이 물었다.
“밤에는 미친 듯이 춥고 낮에는 돌아 버릴 정도로 더운 곳이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란 말이군요.”
“날씨는 어떻게 견딘다고 해도, 몬스터 때문에 사람은 살 수가 없소.”
“몬스터가 그렇게 강합니까?”
“가장 약한 놈이 래딕커란 녀석인데 그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면 그랜드 마스터도 견디지 못하오.”
“하하! 농담이 심하십니다, 전하. 아무리 몬스터가 강하다고 해도 그랜드 마스터가 견디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소. 아무튼 나는 개떼들로부터 나의 레이디를 구하기 위해 가 봐야겠소. 즐거운 시간이었소, 백작.”
김필도는 손을 흔들고는 홀로 걸어갔다.
홀에는 리시아 근처에 대여섯 명이 춤을 추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필도를 바라보는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어리석은 놈!”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여기가 네놈들의 무덤이 될 거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그는 차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델슨 토가텔 백작이 물어왔다.
“어디 가시오?”
“바람 좀 쐬려고요.”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홀에서 나갔다.
한편.
홀로 나간 김필도는 리시아의 손을 잡고 춤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 춤을 못 추는데 어떡하죠?”
김필도의 말을 들으며 리시아는 가슴에 달았던 운골리안트를 다시 배꼽 쪽으로 옮겼다.
“출 줄 아는 춤이 전혀 없어요?”
“내가 추는 춤은 카바레 블루스밖에 없는데…….”
김필도에게 나이트클럽은 춤추며 노는 곳이 아니라 사업장이고 술 마시는 곳이었다. 당연히 춤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그나마 부하 중에 카바레에서 제비 짓을 하는 카바레 킴이란 녀석 덕택에 카바레 블루스는 흉내 낼 정도는 되었다.
“카바레 블루스?”
“이런 춤이에요.”
김필도는 카바레 블루스를 설명하면서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대충 감이 잡혀요. 일단 저쪽으로 가요.”
리시아는 악단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 근처로 간 리시아는 지휘자를 향해 노래를 청했다.
지휘자는 연주하던 곡을 멈추고 리시아가 부탁한 노래를 연주했다.
경쾌한 선율이 갑자기 끈적끈적한 음악으로 바뀌자 춤을 추던 이들은 당황했다. 달라진 음악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텝이 꼬여 버린 것이었다.
이내 그들은 춤을 멈추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홀에 남은 사람은 리시아와 김필도뿐이었다.
두어 번 스텝을 밟았을 뿐인데 리시아는 능숙하게 춤을 췄다.
“운골리안트 장신구는 왜 위로 올렸다가 내린 거죠?”
문득 조금 전 상황이 떠올라 물었다.
“옷이 뜨잖아요.”
리시아의 말에 김필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처럼 드레스 앞쪽이 약간 벌어지며 가슴이 깊게 드러나 보였다. 손을 내리고 있을 땐 상관없는데 들어 올리자 옷이 벌어졌다.
“내게는 보여 줘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보여 줘도 상관없다는 게 아니라 그게 없을 때가 가장 예쁘거든요.”
“가장 예쁜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건가요?”
“여자는 자기의 가장 예쁜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거든요.”
“그럼 계속 훔쳐봐야겠네요?”
김필도는 음흉한 얼굴로 말했다.
“흥!”
리시아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은 듯 춤에 집중했다.
김필도와 리시아가 음악에 취해 홀을 누비고 다니는 그 시각. 차가운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조금 전 공중 정원의 연회장 홀을 나갔던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이었다.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 발치에는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쓰러진 사내는 영주와 귀족을 안내했던 하크 론셀 자작이었다. 하크 론셀 자작의 심장에서는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주변 정리가 끝났습니다.”
갑옷을 걸친 기사 한 명이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 곁으로 다가오며 보고했다.
“그들은 어디 있느냐?”
“호수 변에 대기 중입니다.”
“모시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기사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10분 후 로브를 걸친 자들 3백여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가 마법진이 설치된 장솝니다.”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은 이동 마법진이 설치된 석실을 가리켰다.
“들어갈 곳은 확보했소?”
로브를 걸친 사내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정 북쪽으로 들어가면 되오.”
“부숴라!”
사내는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로브를 걸친 자들 몇 명이 손을 가슴에 댔다. 잠시 후 사내들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전투기갑을 걸친 모습으로 변했다.
스르릉!
파앗! 파앗!
검을 뽑아든 기갑기사들이 이동 마법진이 설치된 석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둔탁한 소성이 들려오고 이동 마법진이 설치된 석실이 박살났다.
“여기 말고 다른 통로는?”
명령을 내린 사내가 물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없소.”
“진입한다!”
사내는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주머니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 옆에 놓고는 가슴에 손을 대고 전투기갑을 착용했다.
전투기갑을 착용한 자들은 마법 스크롤을 가지고 별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플라이(Fly)!”
“플라이(Fly)!”
“플라이(Fly)!”
기갑기사들의 입에서 낮은 외침이 터져 나오고 손에 들린 마법 스크롤이 찢겨 나갔다.
달빛 속에 3백여 명의 기갑기사들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기갑기사들은 허공으로 날아 올라가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에서 싸늘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한편 적이 침입한 사실을 알 리 없는 공중 정원에서는 여전히 연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춤추는 시간이 끝나고 광대들이 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남녀로 구성된 광대들은 인간이 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자세를 선보이며 영주와 귀족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특히 몸을 뒤로 접어 두 발로 술잔을 잡아 술을 마시는 묘기는 압권이었다.
탄성과 더불어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완전 360도로 접히는 신개념 폴더네.”
김필도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신기해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리시아 양은 신기하지 않아요?”
“저런 걸 못하는 사람에게나 신기한 거죠.”
“리시아 양도 가능해요?”
“저런 건 기초에 해당하는 건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물론 몸을 거꾸로 접을 정도로 유연하다. 하지만 우쭐하여 자랑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치한 짓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공연히 자랑을 하고 싶어졌다.
“믿어지지 않는데요?”
“이건 어때요? 저거보다 더 어려운 건데.”
리시아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 전부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손가락이 손등에 딱 달라붙었다.
“헐?”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리시아의 손을 보았다. 아무리 몸이 유연하다고 해도 손가락이 저런 식으로 젖혀지는 건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손목을 뒤로 젖혀 접는 것이었다.
“그만 해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말렸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를 괴물로 여길 것 같았다.
“재미있어했잖아요.”
“재미있어한 게 아니라 신기해했죠.”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무튼 하지 말아요.”
“괴물 같아요?”
“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가 애인이라고 해서 특이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애인이라고 말한 적 없는 걸로 아는데요?”
“평생을 두고 돌봐 줘야 한다면 애인보다 더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그건 내 생각이고 시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이름이 시아나?”
“네.”
“예쁜 이름이네요.”
“이름 못지않게 얼굴도 예뻐요.”
“키도 크겠죠?”
“2미터쯤?”
“좋겠다!”
“나보다 15센티미터나 커요.”
“당신은 나보다 35센티미터나 크죠.”
“내가 키 작다고 차별한 적 있어요?”
“없으니까 문제예요.”
“그게 문제가 된다고요?”
“키 작다고 타박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하면 당신을 싫어하기라도 할 텐데, 그렇지도 않으니까 갈수록 좋아지잖아요. 그것뿐이라면 괜찮은데 판타스틱한 속옷까지 선물로 주는 사람을 어떻게 싫어해요.”
리시아는 알마니 흉내를 내며 말했다.
“참! 속옷은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예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귀었기에 그렇게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는 거죠?”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김필도는 황당하다는 듯이 픽 웃었다.
현대에서 가져온 지식을 조금 이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바람둥이로 돌변한 것이다.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난 애인이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건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요.”
“흥!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겠죠.”
“네?”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김필도를 향해 리시아는 얼굴을 맹렬하게 부딪쳤다. 그녀가 확인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키스였다. 키스를 능숙하게 한다면 풍부한 경험을 했다는 방증이니까.
아니 그건 핑계에 불과했고, 갑자기 키스가 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 솟구쳤다. 어쩌면 맨 후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른 사람의 시선이 차단돼 더 대담해졌는지도 몰랐다.
막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