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홀 안으로 새어들었다.
이어 소스라치는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딱 종이 한 장 차인데.”
리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멈추려고 해서 멈춘 게 아니었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비명이 듣자 자기도 모르게 멈춰 버린 것이었다. 검사로서의 예민한 감각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하면 되지 뭘 망설여요.”
김필도는 리시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일어났다.
콰앙!
“여, 영주님 적입니다.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연회실 문이 벌컥 열리고 기사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몇 명이나 되더냐?”
이케이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악!”
“으악!”
“크악!”
비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쪽으로 가면 문이 있소. 그곳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이케이는 검을 빼들며 소리쳤다.
“악!”
“아악!”
“으악!”
이번엔 느닷없이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쪽의 문을 향해 달려가는 귀족과 영주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한 자들은 광대들이었다.
“광대들을 조심하시오!”
휙!
누군가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 한 자루가 빠른 속도로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왔다. 일격필살의 기세로 김필도를 공격한 자는 조금 전 몸을 거꾸로 접었던 폴더녀였다.
슈캉!
김필도의 허리에서 백색 광채가 일렁였다.
푸욱!
어느새 도집을 벗어난 단도가 폴더녀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가 있었다.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용서되지 않는 게 있어, 아가씨!”
김필도는 폴더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죽지 않은 듯 폴더녀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자신이 더 빨랐는데, 왜 먼저 심장을 내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건 바로 내 약혼녀의 목숨을 노리는 거야.”
슈캉!
왼손으로 단도를 뽑아냄과 동시에 오른손은 설풍을 뽑았다. 뽑는 동작 자체가 공격으로 이어지고 폴더녀의 목을 지나쳤다.
“갈까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감싸 안고 몸을 피했다.
툭!
쿠웅!
츄악!
두 사람이 자리를 뜨는 순간 폴더녀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더니 몸통이 쓰러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
바로 그때 출입문 쪽에서 알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야!”
김필도는 검을 들어 올렸다.
“아이고! 아직 살아 계셨군요.”
알마니는 활짝 웃으며 김필도와 리시아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기는요. 대공 전하를 찾아왔죠.”
“이럴 땐 빨리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대공 전하를 두고 어딜 가요. 아무튼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빨리 옷이나 갈아입으세요.”
“옷을 갈아입어?”
“작업할 때는 반드시 작업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작업?”
“아무튼 내 자존심으로 빚어 낸 예복에 피를 묻히는 야만적인 행위는 절대 안 돼요. 당장 작업복으로 갈아입으세요.”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알마니를 보았다.
제10장 다시 만나다
“끙!”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와 리시아는 홀 왼편 벽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상황이다. 그곳은 화장실로 나가는 문인데 화장실 앞에는 연회를 즐기다 피곤하면 잠시 쉴 수 있는 휴게실이 마련돼 있다.
두 사람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어간 곳은 그 휴게실이었다. 사실 김필도도 옷을 갈아입으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알마니의 황당한 요구에 군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발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데스 와이어를 풀어 한편에 놓은 리시아는 김필도 앞으로 등을 들이댔다. 드레스 단추가 전부 뒤에 달려 있으니 그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죠.”
김필도는 단추를 풀어 주며 대답했다. 드레스 단추가 풀리면서 속살이 드러났다.
“문 대륙에서 암살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단추가 다 풀리자 리시아는 자연스럽게 드레스를 벗었다. 그러자 속옷이 드러났다.
그 속옷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 입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끄응!’
김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 여자와 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체향만 맡아도 돌아 버릴 지경인데, 아슬아슬한 속옷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는 리시아를 보니 가슴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김필도의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시아는 태연했다. 아니 바로 뒤에 김필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보통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게 되면, 먼저 갈아입을 옷을 꺼내 놓고 입고 있던 옷을 벗는데, 리시아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녀는 드레스를 벗고 난 후 아공간을 열더니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그리고는 엎드린 자세로 옷을 집어넣고 있다.
옷을 넣다 말고 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왜 말이 없어요?”
“코피가 나게 생겼는데 말이 나오겠어요?”
“풋!”
피식 웃은 리시아는 드레스 상자를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안쪽을 살피더니 상의 속옷을 꺼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들이 날 노리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김필도는 끈을 묶어 주며 물었다.
“아니면 모임 자체를 노리고 왔든지요.”
“그러니까 리시아 양 말은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을 비롯한 각 지역의 영주들을 노리고 왔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김필도는 아공간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낸 다음 상의와 바지를 빠르게 벗어 옆에 놓고 옷을 입었다.
얇은 소가죽을 검은색으로 염색한 승마바지 위로 품이 풍성한 연회색 드레스셔츠를 입었다.
바로 옆에서 시선이 느껴지자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뭐 하는 거죠?”
“남자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거든요.”
“혹시 이제 곧 남자가 떠날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해요?”
“불쌍한 친구네요.”
“누구요?”
“아론이란 친구 말이에요.”
휙!
김필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시아는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훌쩍 뛰어오른 그녀는 김필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억!”
김필도는 깜짝 놀라 소파 위로 넘어졌다. 리시아는 넘어진 김필도의 입에 입을 맞췄다.
또다시 불같은 감정이 두 사람을 휩쓸었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키스를 하면서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바로 그때 문밖에서 알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 사람 교육 좀 시켜야겠어요.”
입술을 뗀 리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김필도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그래야 할까 봐요.”
“흥! 개뿔이 교육은 무슨. 적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그러고 싶어요?”
알마니는 철부지 아이들 나무라듯 다그쳤다.
“우린 약혼한 사이잖아요.”
리시아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생긋 웃었다.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공간에 신발을 집어넣고 발목까지 오는 가죽부츠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 풀어 놓았던 설풍과 단도를 엉덩이 쪽으로 걸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해요. 어서 나오세요.”
알마니는 손까지 흔들며 재촉했다.
“어떤 자들인지 알아?”
김필도는 휴게실을 나서며 물었다.
“짐작 가는 자들이 있기는 한데 몇 녀석 잡아 봐야 정확하게 알 것 같아요.”
“그놈들이 누군데?”
“크로(Crow)라는 자들이에요.”
“크로?”
“황실 비밀 결사예요. 인원수는 물론이고 소속된 자의 신분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휩싸인 조직이에요. 몸 어딘가에 까마귀 문신을 하고 있다고 해요.”
“이번에 생긴 조직이야?”
“아니에요. 아이작 가문에서 황제가 나오면서 만든 조직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작 가문은 자신들의 황권을 지키기 위해 비밀 조직 크로를 만들었다는 거네?”
“그렇다고들 해요.”
“그럼 발몬 하이저 아이작 그분이 황제 자리를 잃을 때 그들은 움직이지 않은 거야?”
“그 부분에 대한 내막은 저도 몰라요.”
“일단 놈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를 알려면 몇 놈 잡아야 한다는 거네?”
김필도는 문을 빠끔 열고 밖을 살폈다.
창! 창창창! 창창!
“으악!”
“크악!”
“으아악!”
멀리서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아마도 모두들 홀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김필도는 도를 풀어 놓고는 가슴에 손을 대고 낮게 소리쳤다. 곧 그의 가슴에서 검은 운무가 흘러나오고 헤를리온이 구현됐다.
“오픈(Open)!”
아공간을 연 그는 이나함의 검을 꺼내고는 설풍과 단도는 집어넣었다.
“변장하는 거예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시아가 물었다.
“실력을 보여 줘서 좋을 게 없잖아요.”
“그럼 전에 괜히 전투기갑을 걸쳤네요.”
펠콘 성에서 공격해 오는 말을 없앨 때 전투기갑을 입은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본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럴까요?”
“그리고 알아도 상관없잖아요.”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리시아는 전투기갑을 구현했다. 전투 기갑의 구현이 끝나자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앞으로 맥주 줄게요.”
리시아를 지켜보던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전투기갑을 걸친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전투기갑을 걸쳐도 이건 없어지지 않아요.”
리시아는 가슴 사이를 가리켰다.
김필도는 리시아의 가슴을 보았다. 그녀의 가슴 사이에 푸른색 보석이 장식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귀에 차고 있던 귀걸이도 밖으로 노출돼 있고, 손목의 반지도 노출된 상태였다. 그리고 김필도가 왼팔에 차고 있는 정령의 방패도 외부로 드러나 있었다.
“훨씬 돋보이고 좋아요.”
“돋보여요?”
“네.”
“뭐가요?”
“가슴이 돋보이지 뭐가 돋보이겠어요.”
“음흉하긴.”
김필도를 흘겨본 리시아는 아공간을 열고 검을 꺼냈다. 그녀의 검은 김필도가 가진 설풍과 단도처럼 검 날이 곡선이었다.
“안내해.”
김필도는 문을 활짝 열었다.
“저쪽으로 가요.”
알마니는 그가 들어왔던 문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홀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한 가지는 드러난 셈이네.”
홀을 나선 김필도는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뭐가요?”
리시아가 물었다.
“내가 장식물의 하나였다는 사실 말이에요.”
“루시안 공자를 생각했다면 어떻게든 구하려고 손을 썼을 거란 말이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리시아는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왜요?”
“기분 나빠요?”
“리시아 양과 멋진 춤을 췄는데 기분 나쁠 리가 없잖아요. 다만 대공 전하라고 꼬박꼬박 부르던 이케이 그자가 가증스러울 뿐이죠.”
“아무튼 루시안 공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어요. 나도 아주 좋았어요.”
“저기 놈들이 있다!”
바로 그때였다.
안쪽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더니 10여 명의 기갑기사가 나타났다.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김필도의 입에서 실전 마법 주문이 터져 나왔다.
슈아악!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마, 막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