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97화 (97/225)

# 97

기갑기사들은 검을 들어 올리며 급하게 좌우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김필도에 비하면 한참 늦었다. 어느새 기갑기사 한 명 앞에 도착한 김필도는 검을 내리찍고 있었다.

기갑기사는 급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카앙!

이나함의 검은 기갑기사의 검을 부러뜨리고 투구를 자르며 파고들어 갔다.

“아악!”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슈캉!

목까지 파고든 검을 뽑아내며 발로 사정없이 찼다.

콰앙!

복부를 강타당한 기갑기사의 신형이 훨훨 날아갔다. 날아가는 그 사내를 쫓아 김필도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강철의 바람 노콴 라콰(Noqan Laqwa)!”

또다시 짤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김필도의 신형은 바람처럼 기갑기사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차앙!

강한 소성과 함께 기갑기사의 목이 일거에 잘려 나갔다.

척!

휘익!

기갑기사 한 명을 없애고 착지하는데 다른 기사 한 명이 검과 함께 쏘아져 왔다.

김필도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인간의 검으로는 헤를리온을 잘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왼팔로 상대의 검을 막으면서 이나함의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잉!

왼팔 손목에 찬 팔찌가 푸른 광채를 발하는 것 같더니 좌우 폭은 좁고 위아래가 긴 타원형의 방패가 생겨난 것이었다.

콰앙!

방패에서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좋긴 하네.”

김필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검을 막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정령의 방패가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김필도는 왼팔을 강하게 밀어 쳤다. 그러자 공격했던 기갑기사가 한발 물러났다.

그 순간 김필도는 왼팔의 방패를 몸 앞으로 끌어당겨서는 수평으로 펴며 밖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슈캉!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잘려 나간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아악!”

김필도는 방패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방패 가장자리는 뭉툭했다. 그런데 뭉툭한 면에 바람의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김필도는 방패에 살기를 실었다.

그러자 바람의 기운이 급격하게 형태가 변했다. 그것은 바람의 검, 윈드 소드(Wind Sword)였다. 놀랍게도 정령의 방패는 방패 가장자리를 따라 윈드 소드가 생성되는 기능이 있었다.

“볼수록 마음에 드네.”

김필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령의 기운을 이용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시아 또한 전에 비해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완전한 스파이더맨이었다.

전엔 데스 와이어를 이용해서 몸을 날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벽이고 천장이고 상관없이 척척 붙는다.

그리고 데스 와이어를 던지고 기갑기사를 향해 돌진하고 검으로 또는 데스 와이어로 목을 잘라 낸다.

어느새 살아 있는 기갑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척!

리시아는 김필도 옆으로 내려섰다.

“어떻게 된 거죠?”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전투기갑에는 회수 기능의 마법이 걸려 있어, 전투기갑의 주인이 죽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돼 있다. 전투기갑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완전하게 부서져 어떤 방법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엔 회수조차 되지 않는다. 역으로 회수되지 않는 전투기갑은 복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때문에 전투기갑 기사를 죽일 땐 가급적 심장을 부숴 전투기갑과 기갑기사를 동시에 없애 버리는 것이다.

방금 김필도가 사용한 방법도 대부분 그랬다.

따라서 김필도에게 당한 자들의 전투기갑은 회수되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리시아에게 당한 자들은 다르다.

목이 잘린 자들은 전투기갑의 일부만 손상된 상태로 봐야 한다. 즉 마정석만 바꿔 끼우면 복구가 가능하다.

그런데 회수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리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회수 마법이 먹히지 않는 장소란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전투기갑이 회수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다른 마법은 다 먹히는데 회수 마법만 먹히지 않는다?”

김필도는 목이 잘려 나간 기갑기사들 가까이 다가갔다.

기갑기사의 가슴에는 검은 물체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오각형으로 된 그것은 다름 아닌 페라시온이었다.

“알마니 자네 생각은 어때?”

김필도는 시체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알마니를 보며 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이자들의 정체는 알아낸 것 같아요.”

“누군데?”

“크로예요.”

알마니는 시체의 손목을 보여 주었다.

시체의 손목에는 대략 7센티미터 크기의 검은색 까마귀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럼 이제 이놈들이 노린 대상이 나인지 이케이인지 그것만 알아내면 되겠네?”

“둘 다일 가능성이 높아요.”

알마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파르 족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에요. 대표적인 반전파죠. 그리고 이곳에서 전쟁이 지지부진하는 이유도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지 않아서란 말도 있어요.”

“펠콘 성이 과거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티라늄 무역을 시작해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가이우스 황제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눈엣가시예요. 다른 영지 같으면 힘으로 눌러 버리면 될 터인데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동원 가능한 병력이 40만이나 돼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황제 자리를 걸어야 한다는 말이네?”

“말이 그렇게 되는 거죠. 서로에게 득 되는 게 전혀 없는 무의미한 전쟁이 되는 거예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황제 자리에서 축출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황제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공중 정원에 모인 틈을 타서 전부 없애 버릴 생각을 했다는 거야?”

“그랬을 거예요.”

알마니는 주위를 돌며 복구 가능한 페라시온을 수거했다.

그사이에 김필도와 리시아는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김필도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밖은 정원이었다. 정원에는 20여 명의 기갑기사들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기갑기사들은 일제히 몸을 돌렸다.

“이케이가 그걸 몰랐을까?”

김필도는 기갑기사들의 수를 헤아리며 물었다.

“네?”

알마니는 되물었다.

“일단 저것들을 먼저 처리하고 이야기하자.”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달려가면서 그는 광속의 바람 라콰를 펼쳤다.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기갑기사들의 허리를 자르고 있었다.

차르릉!

전투기갑이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악!

그와 동시에 데스 와이어가 기갑기사의 목을 잘라 내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퍼억! 슈캉!

윈드 소드의 칼날이 생성돼 있는 방패가 적 기갑기사의 검을 막아 내고 목을 잘라 낸다. 김필도의 움직임은 빛살이었다.

방패로 막고 빙글 돌며 검으로 자르고, 검으로 막고 방패를 내리찍어 머리를 부수는데 잔상이 남았다.

이동할 때는 광속의 바람 라콰를 펼치고, 검을 휘두를 때는 굴강의 강함 노콴 마법을 펼쳤다. 그의 손에 들린 방패와 검은 적을 부수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했다.

굳이 방패와 검이 아니더라도 적이 죽는다는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아악!”

“컥!”

“윽!”

“크윽!”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을 자르면 전투기갑 페라시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기갑기사들은 목만 노려서 없앨 만큼 약자가 아니었다. 우선은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적 기갑기사의 심장도 과감하게 찔러 페라시온과 기갑기사를 동시에 없앴다.

“원래 그리 강했어요?”

알마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사실 김필도가 옷을 맞추고 간 다음에 아는 사람을 통해 뒷조사를 해 보았다. 과거에 알았던 자가 보낸 정보는 ‘그림자 대공 이상도 아하도 아니다.’라는 한마디였다.

주시할 가치도 없는 자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 나섰던 것은 알 수 없는 끌림 때문이었다. 알마니는 디자이너답게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보다는 ‘감’을 우선시한다. 그런데 그 감이 대공을 따라가야 한다고 맹렬하게 다그쳤다.

마침 충전의 시간도 필요하고 해서 미련 없이 대공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대공은 까도 까도 속이 보이지 않는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문득 뭔가 큰일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강한 사람이 어딨어?”

“그럼 저게 다 뭡니까?”

알마니는 쓰러진 기갑기사들을 가리켰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이케이 말이에요?”

“그는 나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대공 전하라고 불렀어.”

“그가 정말 그랬어요?”

알마니는 깜짝 놀랐다.

“왜?”

“제가 아는 그는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무릎을 꿇을 사람이 결코 아니거든요.”

“그럼 뭔가 노리고 무릎을 꿇었다는 거야?”

“40만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자가 뭐가 아쉬워 아무것도 없는 그림자 대공에게 무릎을 꿇겠어요? 그건 나라도 안 하겠어요.”

“그렇겠지?”

설령 그가 외조부께 충성을 맹세했던 자라고 해도 45년이 지난 지금 아이작 가문을 위해 일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가만…….”

-제국 서부에 가면 대륙에서 가장 멋진 정원이 있는데 들어 본 적 있느냐?

-아뇨?

-아주 멋진 정원이 있단다.

그 정원은 우리 프리우스 가문이 황제 보위에 있을 때 조성했는데 아래쪽으로는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이고, 사시사철 꽃이 핀다고 하더구나.

-지금도 갈 수 있어요?

-갈 수 있으면 데리고 갔겠지 이렇게 말로 해 줄 리가 없지 않겠느냐.

-누가 만든 거죠?

-리반 프리우스 대제께서 조성했단다.

-리반 프리우스 대제시라면 우리 가문에서 배출한 마지막 황제잖아요.

-맞다. 실정을 많이 했던 분이셨지. 그 정원 또한 그분이 행한 대표적인 실정 중의 하나였고.

-그런 걸 만들면서 국력을 낭비했다는 뜻인가요?

-그렇단다. 아무튼 이반 프리우스 대제께서는 그 정원을 아이작 가문에 넘겼단다.

-아이작 가문도 제 가문이잖아요.

-아이작 가문이 정원을 관리한 시기는 7백 년이다. 그 정원을 별장처럼 사용했는데, 그곳에 가 있던 어느 날 반란이 일어나서 죽을 뻔할 일이 있었단다. 정원이 있던 지역 영주가 아니었으면 그 당시 황제는 죽었을 게야.

-목숨을 구해 준 그 영주에게 줘 버렸군요.

-그렇단다.

-그럼 우리 게 아니잖아요.

-아이작 가문은 물론이고 프리우스 가문의 숨결이 어린 곳 아니냐. 언제고 시간 나면 한번 가 보라고 말해 주는 거란다.

-알았어요.

“왜 그러세요?”

“아버지 말씀이 떠올라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제국 서쪽에 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고 하셨어.”

“그게 다예요?”

알마니는 실망한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뭔가 대단한 게 나올 줄 알았는데, 특별히 신경 쓸 만한 건 없었다.

“그 정원을 만든 사람은 리반 프리우스 대제시고, 아이작 가문에 넘겼어. 그리고 아이작 가문은 이곳을 7백 년 동안 별장으로 사용했고.”

“그러니까 여긴?”

알마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친가에서 만들고 외가에서 7백 년 동안 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라는 거야.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한번 가 보라고 하셨어. 이미 다른 사람 소유가 됐다는 걸 아시는 분이 한번 가 보라고 하셨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이곳의 주인이 제국 서부 군벌의 수장인 이케이 하다르만이라는 사실을 아시는 분이.”

“반드시 가 봐야 한다는 뜻이군요.”

대답은 리시아가 했다.

“반만 맞았어요.”

“반만 맞아요?”

“서부 최대 군벌이 소유한 별장으로 침입해 들어오려면 그만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곧 힘을 갖춘 후에 가 보라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그분은 공중 정원의 정확한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으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루시안 공자를 위한 뭔가가 있다는 말인가요?”

“나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아이작 가문의 후예를 위해 뭔가가 있는 거겠죠.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우리 아버지뿐만이 아니라는 거고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도 그 사실을 안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런데 저 녀석들 때문에 틀어져 버린 거죠.”

“틀어진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김필도의 말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알마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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