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98화 (98/225)

# 98

“왜?”

“조금 전에 대공 전하께서는 제게 ‘이케이가 몰랐을까?’라는 질문을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 부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도 알고 있었을 거란 결론이 나왔어요.”

“그러면서도 이곳에 왔다는 거야?”

“서로군벌을 이탈하려고 하는 배신자를 찾기 위해서라면 모험할 가치는 충분하잖아요.”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해?”

“이케이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겠지만 크로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공중 정원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작 가문의 비밀을 풀고, 그거와는 별도로 서로군벌을 이탈하려는 배신자를 찾는다?”

“그럴싸한 추리 아니에요?”

“일리가 있기는 한데…….”

김필도는 생각에 잠겼다.

이곳 공중 정원에 아이작 가문에서 남긴 뭔가가 있다는 사실은 이케이는 물론 크로를 보낸 자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정작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좋은 거였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아직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리시아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걸 어떻게 알죠?”

“알마니 때문에 옷을 갈아입었잖아요.”

“홀에서 빠져나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거죠?”

“맞아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마니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채근하여 홀에서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면 그의 감시하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케이의 감시망에서 벗어났다면 전적으로 알마니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죠?”

“저쪽으로요.”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나무 옆에는 시체 한 구가 뒹굴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나 있었다. 시체는 계단으로 들어가려다가 살해된 듯했다.

“이자는 크로가 아니에요.”

시체를 살펴보던 알마니가 말했다.

“연회실에 있던 귀족 중의 한 명이야. 이름이 카데인이라고 했던 것 같아.”

김필도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헤를리온을 해제했다.

“왜 그래요?”

“전투기갑을 착용한 자의 검에 찔린 게 아니에요.”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전투기갑을 벗고 가자는 건가요?”

“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 같은데 들어갈 거예요?”

“선조가 남긴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확인해 봐야죠.”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상당히 길었다. 20미터가량 내려왔을 때 비로소 바닥이 나왔다.

계단 바닥은 확 트인 공간과 이어져 있었다.

그곳엔 희미하게 안개가 끼어 있어 얼마나 넓은지 알 수가 없었다. 일행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여긴 마법 공간이에요, 루시안 공자.”

뒤따라오던 리시아가 말했다.

“그건 나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계단의 높이가 20미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곳 공중 정원은 호수 위 50미터 높이에 떠 있었다. 20미터 지하로 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계단이 사라졌어요.”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리시아의 말처럼 정말로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어떤 걸 우려했는데요?”

“마법 공간을 컨트롤하는 자가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린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뜻이 되죠.”

“대공 전하! 저기 시체가 있어요.”

앞서가던 알마니가 소리쳤다.

김필도와 리시아는 잰걸음으로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잔?”

시체를 바라보던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심장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자는, 서로군벌 세 수뇌 중 한 명인 아델슨 토가텔 백작이었다.

“아델슨 토가텔 백작은 반항한 흔적이 없어요.”

시체를 살피던 리시아가 말했다.

“하지만 경악한 표정이죠.”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을 당했다는 뜻이겠죠?”

“그럴 거예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은 누굴까요?”

“조금 후면 밝혀지겠죠.”

김필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시체는 아델슨 토가텔 백작의 시체를 발견한 장소에서 1백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이번에도 역시 심장을 찔려 즉사한 시체였는데, 할벤리 영지의 영주 도슨 할벤리 자작이었다.

“이러다 서로군벌 소속 영주들의 시체를 전부 보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리시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던 옛말은 맞았다.

일행은 줄줄이 시체를 발견했다. 영주들의 시체는 물론이고 귀족들의 시체까지도 발견했다. 연회에 참석한 자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펠콘 성에서 보았던 코너 트레일 자작의 시체도 있었다.

“이자는 4군단 군장인 볼 프콘 자작이고, 저잔 5군단 군장인 볼리어스 필 자작이에요. 볼 프콘은 이콰라 공작가 사람이고, 볼리어스 필 자작은 헬모트 공작가 사람이에요.”

또다시 발견한 두 구의 시체에 대해 알마니가 설명을 덧붙였다.

“점점 재미있어지네.”

김필도는 빙긋 웃었다.

“재미있어요?”

리시아는 뜨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로써 서로군벌에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만 남게 됐잖아요.”

“그가 범인이란 말인가요?”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문제는 크로와 한통속이냐 아니냐 하는 건데… 당신 생각은 어때?”

김필도는 오른편 안개 속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참으로 대단하오, 대공.”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10여 미터 건너편에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이 나타났다.

“이 모든 게 당신 작품?”

“15개 영지 영주를 없애는 일인데 무슨 수로 나 혼자 하겠소.”

“그러면 현 황제와 함께 했다는 말?”

“황제와 한패가 된 자는 내가 아니라 데코니 홀트마하요. 이곳에 크로가 들어올 수 있게 해 준 놈도 그고.”

“황제와 편을 묶은 것도 아닌데 영주 15명을 살해한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영주를 살해한 자는 데코니 홀트마하가 될 거니까 상관없소.”

“전쟁을 할 셈이구먼.”

“잘 보셨소, 대공. 홀트마하 영지를 제외한 나머지 영지 상속자들은 아비의 복수를 원하게 될 거요. 난 그들이 원하는 걸 해 줄 뿐이고.”

“백작이 원하는 건 뭔가?”

“그건 내가 말해주마.”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 옆으로 거대한 덩치가 모습을 나타냈다. 사내는 황금빛 광채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너는?”

김필도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 옆으로 나타난 자는 문 대륙의 이야크 평원에서 대결을 벌였던 천족 헬만이었다. 쇠못을 가시처럼 박아 넣은 이야크 창을 가지고 다니며 인간을 벌레로 취급하던 자.

“기다렸다, 벌레.”

김필도를 바라보는 헬만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기다려?”

김필도는 의아한 얼굴로 헬만을 보았다.

“제1좌께서 네놈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더구나.”

“그러니까 그자의 말을 듣고 날 찾아왔단 말?”

“그렇다, 벌레.”

“그 와중에 소식을 전하다니, 대단한 놈이네.”

김필도는 픽 웃고는 고개를 들어 헬만을 보았다.

가만히 보니 헬만과 이케이는 홀로그램이었다. 즉 실체는 다른 곳에 있고, 영상만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태였다.

“벌레가 겁나나 보지?”

김필도는 슬쩍 도발해 보았다.

“천만에! 다만 나는 헤를리온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보고해야 하기에 참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다시 보게 돼서 반갑다, 벌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키 큰 누렁이.”

김필도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추켜 올랐다.

제11장 그곳은 바다였다

“천족은 벌써 인간의 땅인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간 걸고 알고 있소.”

“그게 무슨 소리요?”

프리메우스의 말에 쿤할은 깜짝 놀랐다.

마족 평의회 비상 회의가 개최된다고 해서 참석했다. 사실 그는 이번 마족 평의회에서 프리메우스를 매장시켜 버릴 참이었다.

프리메우스 주도로 시작된 마계10군단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변했다. 처음 군단장 친위대들이 집단으로 반발하여 ‘어둠의 땅’으로 수감될 때만 해도 일이 일단락되는 걸로 여겼다. 비록 항명을 행하긴 했지만 제10군단에 필요한 자들이라 머잖아 풀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흘렀다.

어둠의 땅으로 들어갔던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가 친위대 대원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강력한 뭔가로 뒤통수를 사정없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카렌을 비롯한 친위대 대원들이 탈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자가 다름 아닌 프리메우스였던 것이다.

마계5군단, 6군단, 7군단을 출동 준비 시킨 채 상황을 주시했다. 프리메우스는 2군단과 3군단을 동원하여 탈출하는 그들을 포위했다.

그때 첫 번째 변수가 등장했다.

이카렌이 사병처럼 거느리고 있던 850명이 2군단과 3군단을 공격한 것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치고 들어오자 2군단과 3군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이카렌의 사병을 막아 냈다.

이카렌의 사병과 전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두 번째 변수가 등장했다.

항명하지 않고 남아 있던 친위대와 마계10군단 대부분이 2군단과 3군단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기세로 2군단과 3군단을 치고 들어갔다. 마계10군단은 마계군단 중에서도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이카렌의 사병 850명과 싸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마계2군단과 3군단은 연신 밀리기 시작하였고, 프리메우스는 급히 마계1군단과 4군단에게 출병을 지시했다.

바로 그때 세 번째 변수가 등장했다.

사실 마계10군단 군단장 친위대의 항명은 처음이 아니었다. 전대 군단장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칼베리언의 재판이 끝났을 때도 친위대 대원들의 항명이 있었다.

그 당시 친위대의 수장이었던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은 칼베리언과 결투를 하게 해달라고 마족 평의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마족 평의회는 그의 요청을 묵살하고 칼베리언에게 군단장 살해 방조혐의만 적용하여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친위대 대원들은 집단으로 반발하였고, 해산하라는 마족 평의회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결국엔 항명죄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수장이었던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과 함께 어둠의 땅에 수감됐던 전대 군단장 친위대 대원들이 광풍처럼 밀고 나왔다.

마계2군단은 물론이고 3군단에서도 그들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어둠의 땅에 갇혀 있던 1천 년 동안 한 단계씩 각성을 해 버린 것이었다.

각성 의식을 거치지 않고 순수한 실력으로 각성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격어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한 단계 상위로 각성하는 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천 년 이상 걸린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다.

하지만 그 효과 또한 엄청나다.

각성 의식을 통해 각성한 자들보다 최소한 2배 이상 강하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전대 군단장 친위대 1백 명은 전부가 각성을 한 것이다.

엄청난 강자가 된 그들은 제2군단과 3군단이 구축한 포위망을 탈출하여 차원의 벽 쪽으로 나아갔다.

2군단과 3군단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1군단과 4군단은 그들을 추격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마계10군단 대원들의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려야 했고, 결국엔 놓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양측 합쳐 3천 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자가 생겼다. 마계2군단과 3군단은 전멸 직전까지 갔고, 제1군단과 4군단 또한 추격하면서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마계10군단 대원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781명이라는 많은 수가 탈출에 성공했다.

마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중대한 사안이고 그럴 자는 이번 일을 주도했던 프리메우스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를 축출하려고 하였던 이 자리에서 프리메우스는 천족이 인간 세상에 진출해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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