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99화 (99/225)

# 99

“사실인가?”

어둠 속 저 먼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최상급 마족들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을 몽땅 장악해 들어갔다.

그리고 주위가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쿤할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의자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자.

한 팔로 턱을 괴고 있는 그는 마족의 수장인 마왕이었다. 조금 전까지 없었던 그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네 원로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들 중 누구도 마왕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왕!”

프리메우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마왕의 자리에 오를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왕을 보는 순간 자신의 실력이 그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상급 마족이 된 후에도 쉬지 않고 힘을 길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건 또 다른 경지가 있다고 봐야 했다.

‘최상급 마족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뜻인데……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군.’

프리메우스는 내심 중얼거렸다.

“근거가 있는가?”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천신군의 천좌10군 중 제1좌 세라핌과 제10좌 헬만의 거처가 불분명하여 탐문하던 중 휴도니아 대륙에서 천좌 제10좌인 헬만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로 볼 때 제1좌인 세라핌 또한 휴도니아 어딘가에 있을 걸로 사료됩니다.”

프리메우스는 세라핌이 김필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보이지 않은 그가 휴도니아 대륙 어딘가에 은신해 있는 걸로 확신하는 건 당연했다.

“그들이 왜 인간들이 살고 있는 휴도니아 대륙으로 갔단 말인가?”

“헤를리온 때문입니다.”

“음!”

“으음!”

“음!”

프리메우스를 비롯한 세 명의 원로는 물론이고 마왕의 입에서마저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헤를리온.

실전 마법과 더불어 철족이 만들어 낸 최강의 무기.

실전 마법과 헤를리온 그 두 가지를 피해 세상의 주인이었던 다섯 종족은 문 대륙에서 엑서더스를 해야 했다.

더불어 문 대륙으로 마계10군단을 파견한 이유 중의 하나가 헤를리온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헤를리온이 휴도니아 대륙에 있단 말인가?”

“아직 정확하진 않습니다.”

“하면?”

“헤를리온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마왕은 관심을 보였다.

프리메우스의 얼굴에 한순간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헤를리온이라면 이번 실수를 전부 덮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일이 의도대로 풀려가고 있었다.

“신이 전에 말씀드렸던 가드 맵의 선택을 받은 인간을 기억하십니까?”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라고 했던 인간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왕.”

“그가 어쨌단 말인가?”

“그 인간은 대천신군과 마계10군단 일부와 함께 리모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천신군의 수장인 세이아칸 카셀 디나브 에바르본에게 심장이 뚫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마왕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그것은 그가 흥분했다는 의미였다.

“심장이 뚫린 채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졌던 자가 멀쩡히 살아나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포션을 복용한 거 아닌가?”

“세이아칸은 천족 중에서 가장 악랄한 자로 알려져 있고, 인간을 몬스터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그자가 가장 좋아하는 살해 방법은 검을 심장에 찔러 넣은 다음 위 아래로 돌려 구멍을 넓히는 거라고 합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세이아칸에게 당한 모든 자를 조사했는데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습니다.”

“끝맺음이 확실하다는 뜻이구먼.”

“세이아칸 그자에게 걸리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가 살아난 이유가 헤를리온 때문이라고 본다는 건가?”

“우리 마계에 내려오는 과거 기록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철족 추장 헬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고 죽음을 확인했다. 그랬던 그가 신갑 헤를리온을 통해 다시 부활하여 리모스로 쳐들어오고 있다.’ 그 내용으로 보면 죽은 자를 살려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갑 헤를리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헬칸이 무덤으로 택했다는 리모스에서 부활했습니다.”

“쿤할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마왕은 쿤할을 바라보았다.

“이견 없습니다.”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세이아칸에 대해서는 쿤할도 잘 알고 있었다. 편집증적인 성격은 마계까지 소문이 나 있다. 그런 자들은 다른 거는 몰라도 누군가를 괴롭힐 때는 철저하고 빈틈이 없다. 그런 자의 손에서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마계에까지 소문이 났다면 말 다 한 것이다.

“계속해 보게, 프리메우스.”

프리메우스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천계에서 세라핌과 헬만 그리고 천족 10여 명이 비밀리에 휴도니아 대륙을 갔다는 사실입니다.”

“헤를리온이 아니라면 갈 이유가 없단 말인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더구나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인간 황제로부터 대공 작위를 하사받은 잡니다. 만일 헤를리온이 인간 황제의 손에 들어가고, 수십 수백 개의 헤를리온이 제작된다면, 전쟁을 즐기는 인간의 특성으로 볼 때, 앞으로 1백 년 안에 우리 마계로 침입해 들어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잔 뜻인가?”

“그렇습니다. 다행히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현 황제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황제가 헤를리온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든지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구먼.”

“그렇습니다, 마왕.”

프리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옛날 문 대륙을 탈출할 때 다섯 종족이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어떤 종족이 됐든 다섯 종족의 평화를 깨는 종족은 나머지 종족의 연합 공격을 받게 될 거라고 하였던 협정 말입니까?”

“그렇네, 프리메우스. 비록 우리가 강하다고 하지만 천족, 인간, 드워프, 엘프가 연합하여 공격해 오면 견디지 못하네.”

“신 또한 직접 휴도니아 대륙을 공략할 생각은 없습니다, 마왕.”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천족보다 더 획기적인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말해 보게.”

“죄수를 이용할 참입니다.”

“으음!”

죄수를 이용한다는 말에 쿤할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프리메우스가 말한 죄수란 히데우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칼베리언이다.

오늘 칼베리언에 대해서도 말할 참이었는데, 프리메우스가 선수를 쳐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칼베리언에 대해서는 입을 열 수가 없다.

왜냐면 칼베리언은 마왕의 사생아니까.

사실 1천 년 전 칼베리언에 대한 재판에서 군단장 살해죄를 적용하지 못하고 살해 방조죄만 적용했던 것도 마왕의 사생아란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죄수?”

쿤할은 마왕의 얼굴에 어린 기대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사면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그는 칼베리언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계10군단 전 군단장의 살해 방조 혐의로 종신형에 처해진 칼베리언과 그 일행을 가석방해 줄 참입니다.”

“다른 원로들도 찬성했소?”

“찬성할 거라고 믿습니다.”

“칼베리언에게 어떤 일을 맡길 참인가?”

“휴도니아 대륙으로 건너가 헤를리온의 행방을 탐문하는 임무를 줄 생각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죄수를 부려먹을 수 있겠소?”

“인간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어떤 방법 말인가?”

“인간은 차원 수리공을 보낼 때 주로 극형을 언도받은 죄수를 뽑습니다. 임무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공했을 땐 사면이라는 상을 내려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칼베리언에게도 사면을 약속하겠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물론 마왕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겠지만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구먼. 원로들은 어떤가?”

마왕은 쿤할을 보았다.

“좋은 방법이라 사료됩니다, 마왕.”

이견을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인간도 하는 걸 마족이 못한다는 건 인간보다 열등한 종족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왕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하였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마왕.”

프리메우스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렇게 하게.”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겼다, 쿤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프리메우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이로써 칼베리언을 풀어 준 것과 마계10군단 사건은 깔끔하게 해결됐다. 아니 주도권을 완벽하게 거머쥔 상황이었다.

‘마계에는 전사들이 넘쳐난다, 쿤할. 해체된 마계10군단이나, 지리멸렬한 2군단, 3군단은 금세 복구된다. 전보다 더 강한 조직으로.’

“그리고 죽었던 자가 다사 살아났다는 건 누군가 조력자가 있다는 걸 뜻하는 것 같은데 프리메우스 원로 생각은 어떤가?”

‘응?’

프리메우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분명 그 단서는 리모스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히데우스가 입구를 망가뜨린 바람에 현재로선 들어갈 방법이 없다. 설령 단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찾을 방법이 없다.

그런 이유로 보고를 하지 않았는데 마왕이 그걸 들고 나온 것이다.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구먼.”

“아닙니다, 마왕.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말해 보게.”

“마계10군단의 반란으로 인해 1군단, 2군단, 3군단, 4군단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상태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계5군단에게 임무를 맡길 참이었습니다.”

“5군단 군단장도 자격에 문제가 있는가?”

“네?”

프리메우스는 의아한 얼굴로 마왕을 보았다.

“차원의 벽을 건너가서 해야 하는 임무는 가급적이면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는 자들에게 시켰으면 해서 하는 말이네.”

“무슨 말씀이신지?”

“마계10군단의 새로운 군단장이 탄생했다고 들었네. 그를 문 대륙으로 보내 자격을 시험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마왕.”

프리메우스는 고개를 숙이고는 회의장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숙소로 들어가 칼베리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 칼베리언은 비긴 마을을 앞에 두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칼베리언.”

“난 당신 얼굴 보는 건 별론데.”

칼베리언은 마법 통신구 표면을 노려보았다.

일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메우스는 몸에 건 금제를 풀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계로 쫓아가 목을 잘라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느냐?”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는 중이오.”

“재미있는 일?”

“잉여 몬스터를 골라내는 일을 하고 있소.”

칼베리언은 싱긋 웃으며 마법 통신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법 통신구 표면에 개목걸이를 차고 발목에 족쇄를 찬 인간들의 모습이 보였다.

“으음!”

프리메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칼베리언이 말한 잉여 몬스터는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마법 통신구 표면에는 남녀가 뒤섞인 인간 수백 명이 나타났다. 목에는 개목걸이를 차고 발목에는 족쇄가 걸려 있다. 그리고 목걸이와 족쇄는 하나의 쇠사슬로 연결돼 있었다.

하나로 연결돼 있는 자들은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라 짐승에 가까웠다. 사내는 옆에 여자가 있거나 말거나 바지를 내린 채 볼일을 보고, 그 옆에서는 여자가 엉덩이를 드러내 놓고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본다.

큰 걸 보는 자도 있고 작은 걸 보는 자도 있다.

그리고 그들 바로 옆에서는 뭔가를 오물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다. 식사를 하는 자들이다.

마왕에게 공연히 사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문득 밀려왔다.

‘아냐, 저놈이 짐승처럼 행동하면 할수록 마왕은 위축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놈에게 자신의 친부가 마왕이란 사실을 알려 주는 거야.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프리메우스는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였다.

“사면의 기회가 생겼다, 칼베리언.”

“사면?”

활짝 웃으며 인간의 행태를 보여 주던 칼베리언은 얼른 마법 통신구를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그렇다.”

“무슨 꿍꿍이속이지?”

칼베리언은 싸늘한 눈으로 프리메우스를 보았다.

“마계에서 죄인의 사면을 결정할 수 있는 분은 마왕뿐이라는 걸 모르느냐?”

“쥐새끼 당신이 아니고 마왕이란 말인가?”

“말조심하라, 칼베리언. 사면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취소해달라고 마왕께 요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 왜냐면 사면 취소 명령을 내릴 거라면 내게 연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칼베리언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사면이 싫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프리메우스도 녹록한 자가 아니었다. 자식 일에 대해서는 판단력이 흐려지긴 하지만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결코 칼베리언에게 휘둘릴 자는 아니었다.

“좋소, 말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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