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크윽!”
연이은 타격에 힘겨워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입 주위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놈이 지쳤다! 계속 밀어붙여라!”
김필도를 지켜보던 헬만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헬만의 외침 때문인 듯 천족은 더욱 거칠게 공격을 가했다. 김필도는 천족들의 검을 막으면서 리시아와 알마니를 보았다.
“알았어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필도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한 놈은 데리고 간다!”
김필도는 헬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쿠아앙!
천족의 검과 헬칸이 부딪치면서 거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김필도는 헬칸의 기울기를 낮춰 천족의 검을 흘렸다.
스르릉!
“헛!”
갑자기 김필도의 검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균형이 무너지자 천족은 깜짝 놀랐다.
천족은 자세를 잡기 위해 오른발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막 발을 바닥에 대려는 순간 목을 향해 섬뜩한 기운이 다가들었다.
“허억!”
천족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바로 전까지 그의 검 아래쪽에 있던 김필도의 헬칸이 목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는 것이다.
‘젠장!’
천족은 욕설을 내뱉었다. 막을 방법도 피할 공간도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앙!
“크아악!”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이런 게 죽음…….’
내심 중얼거리던 천족은 번쩍 눈을 떴다.
죽었다면 고통이 느껴질 리가 없을 텐데, 지금은 극심한 고통이 목에서 느껴졌다.
‘자르지 못했다.’
천족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바로 앞에 있는 김필도의 가슴팍을 향해 왼손을 내질렀다.
퍼억!
그의 주먹은 정확하게 김필도의 가슴에 박혔다.
촤르르르!
“크아악!”
하지만 비명을 지른 사람은 주먹을 내지른 천족이었다. 절반가량 파고들어 갔던 헬칸이, 톱을 당길 때와 비슷한 형태로 빠져나가며 상처가 더 커졌던 것이었다. 절반가량 잘렸던 목은 3분의 2까지 잘려 나갔고, 동맥마저 잘린 듯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천족은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김필도와 리시아, 그리고 알마니는 한 덩어리가 돼 어둠의 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퍼억!
어둠의 벽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세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천족들은 멍한 얼굴로 김필도가 사라진 어둠의 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둠의 벽이 세 사람을 삼켜버린 것 같았다.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바닥에 떨어진 피가 다였다.
“커억!”
김필도를 공격했던 천족은 그제야 목을 감싸 쥐고 풀썩 쓰러졌다. 지금껏 당했던 다른 천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은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포, 포션을…….”
천족은 동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족 한 명이 급하게 포션을 꺼내 상처 부위에 부었다.
“크아악!”
천족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포션을 붓던 동료는 당황했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신호가 아닌 극심한 고통에 겨워 내지른 비명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던 천족의 몸이 금세 잠잠해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저것 때문에 비명을 지른 거니까 당황할 필요 없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포션을 붓던 천족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편에 헬만이 서 있었다.
헬만이 가리킨 곳은 부상으로 숨이 끊어진 자의 가슴이었다.
천족은 시선을 내렸다. 동료의 가슴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천족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독은 아니다.”
헬만은 김필도 일행을 삼켜버린 어둠의 벽을 바라보았다.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지금껏 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만일 검에 독이 묻어 있다면 자신 또한 중독됐어야 한다. 그런데 중독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원인은 나도 모른다.”
헬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부하들은 독에 중독된 것 같은 증상을 보이다 심장이 터져 죽었다. 심지어 다리에 부상을 입은 부하마저도 심장이 터져 죽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헬만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세 가지 마나가 합쳐질 때 전투기갑을 파괴하는 힘이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로선 당연했다.
‘나중에 알아보는 수밖에.’
헬만은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에서 하다르만 백작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긴 어떤 곳이냐?”
헬만은 어둠의 벽을 가리켰다.
“죽음의 장솝니다.”
“죽음의 장소?”
“수백 명을 들여보냈지만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럼 놈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 살아 온다고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살아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냐?”
“공중정원을 만든 자는 대공의 친가 쪽이고 외가에서는 7백 년 동안 관리를 해왔습니다.”
“혈족은 살아 나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설사 살아 나온다고 해도 여전히 그림자 대공일 뿐입니다.”
“그랬단 말이지. 좋다, 이젠 어떻게 할 참이냐?”
“열다섯 명의 영주를 살해한 자들을 향해 복수의 검을 뽑아야지요.”
“큭큭큭!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겠구나.”
헬만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헤를리온 회수는 핑계일 뿐이다.
-하면?
-나는 그곳을 제2의 문 대륙으로 만들 생각이다.
-제2의 문 대륙은 무슨 말입니까?
-제2차 신마전쟁이 벌어질 장소라는 뜻이다.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천좌.
문득 이곳으로 오기 전 세이아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가자!”
헬만은 하다르만 백작을 보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다르만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제2장 마계10군단
인간이 떠난 비긴 마을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2~3미터의 거대한 덩치를 지닌 그들은 마계를 탈출한 이카렌 일행이었다.
마계10군단 대원 1천 명과 이카렌이 거느렸던 사병 850명 중, 탈출에 성공한 자는 마계10군단 대원 480명, 사병 2백 명, 어둠에 땅에 있던 전대 친위대 대원 백 명을 합쳐 총 781명이었다.
“한 명도 없습니다, 군단장님.”
비긴 마을을 돌아보고 온 퀼과 솔트가 보고했다.
“한 명도?”
이카렌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림살이도 없습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바로 그때 이야크 몇 마리가 급하게 달려왔다.
이야크 위에 타고 있는 자는 현 친위대 대주 하이닐이었다. 하이닐은 마을 외부를 살피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어때?”
“남쪽에 수백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가보자.”
이카렌은 이야크를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얼마 후 그들은 비긴 마을 남쪽 살겁의 현장에 도착했다.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시체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마족의 짓이구먼.”
시체를 살피던 록이 말했다.
“마족 중에 이런 짓을 할 자는 칼베리언밖에 없어요.”
“그놈이 갈 만한 곳을 아는가?”
록의 눈동자에 스산한 기운이 어렸다.
“문 대륙은 넓어요.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그를 찾아낼 수 없어요.”
“열 명이라면 그렇겠지.”
록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야크 발자국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정도 발자국이면 수백 명은 되겠군요.”
“이곳에 그런 조직이 있는가?”
“블러드 데빌단이라고 추방자들의 집단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인간을 적대시하지 않아요.”
“이런 짓을 벌일 자들이 아니란 말인가?”
“맞소. 크로는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소.”
대답은 동쪽 숲에서 들려왔다.
이카렌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동쪽 숲에서 두 명이 이야크를 몰아 나오고 있었다.
오른편 사내를 바라보던 이카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황금색 전투기갑을 걸친 천족은 전에 함께 여행을 했던 라이자칸이었다. 방금 대답한 이도 그였다.
“라이자칸!”
이카렌은 반가운 얼굴로 라이자칸을 향해 이야크를 몰아갔다.
“또 만났구먼.”
라이자칸 또한 활짝 웃으며 이카렌을 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라이자칸 앞으로 다가간 이카렌이 물었다.
“조, 조사할 게 있어서 이곳으로 왔네.”
라이자칸은 더듬거렸다.
“조사할 거요?”
이카렌은 라이자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이자칸의 신분은 대천신군 부군장이었다. 설령 조사할 게 있다고 해도 부군장 정도 되면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라이자칸 곁에는 수행원이 한 명도 없다.
“그, 그렇네. 그리고 이 친구는 블러드 데빌단 전단장인 크로네.”
라이자칸은 이카렌의 시선을 피하며 옆에 있던 자를 소개했다.
“또 뵙습니다, 부군단장.”
크로는 이카렌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단장.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칼베리언에게 패했소.”
“그랬군요. 일단 저쪽으로 가요. 제 일행도 소개해줄게요.”
이카렌은 라이자칸과 크로를 데리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분은 대천신군의 부군장 라이자칸이에요.”
먼저 록 일행에게 두 명을 소개해주었다.
“반갑소, 나는 라이자칸 데탄 일리아드 소르본느요.”
먼저 라이자칸이 인사를 했다.
“천계 최고 전사를 여기서 뵙게 되다니 영광이오. 난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이외다.”
록은 깜짝 놀랐다.
그는 라이자칸 데탄 일리아드 소르본느란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1천 년 전이지만 천계 최고 전사의 한 명이 바로 라이자칸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별말씀을 다 하시오.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 경이야말로 마계 최고 전사란 소문이 자자하신 분 아니오? 그런데 1천 년 전엔 상급마족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어둠의 땅에서 놀고먹다 보니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각성을 하셨단 말이오?”
“나뿐만 아니라 저 녀석들도 몽땅 각성을 했는데, 대단은 무슨.”
“허허! 겸손이 지나치시오. 1천 년을 노력해야 간신히 이를 수 있는 게 각성인데,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 우린 뭐가 되는 겁니까?”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려 1천 년 동안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정진해놓고, 별것 아니라고 하는 건 속 보이는 짓이죠?”
“네?”
“내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게 맞다는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라이자칸은 활짝 웃었다.
그가 마족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식 없는 말투와 행동이다. 때로는 건방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직설적이기 때문에 머리 굴릴 필요가 없어 대하기 편하다.
“그리고 이 친구는…….”
라이자칸은 크로를 가리켰다.
“그 녀석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이다.”
록은 크로를 바라보았다.
“대주님!”
크로는 이야크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그의 본명은 크라베로 핵타 타르맨으로, 1천 년 전 친위대 대주였던 록의 종자였다. 그가 걸치고 있던 전투기갑 또한 록으로부터 받은 거였다. 록이 어둠의 땅으로 수감되면서 마계로부터 추방됐던 것이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남 좋은 일만 시킨 것 같구나.”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대주님.”
크라베로는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아서라. 나도 장담하기 힘든 놈이 칼베리언이다. 그래, 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떠났습니다.”
“떠나?”
“네.”
“어디로 떠났단 말이냐?”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차원의 벽을 넘었단 말이냐?”
“휴도니아 대륙과 경계였던 차원의 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