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04화 (104/225)

# 104

록은 황당한 얼굴로 크라베로를 보았다.

차원의 벽은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동안 존재해왔다. 그런데 그 벽이 없어졌다?

크라베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자세한 사항은 모릅니다. 칼베리언과 블러드 데빌단의 흔적을 쫓다가 차원의 벽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은 바다로 변해 있었습니다.”

“허!”

록은 라이자칸을 보았다. 라이자칸과 크라베로가 함께 확인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친구 말이 맞소.”

“정말 바다였던 말이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맞소이다.”

“아무래도…….”

록은 고개를 돌려 이카렌을 보았다.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요.”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친위대 대주인 하이닐을 보았다.

“하명하십시오, 군단장님!”

“저들을 묻어줘.”

“알겠습니다.”

하이닐은 고개를 숙이고는 친위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커다란 봉분 다섯 개가 세워졌다.

“끝났습니다, 군단장님!”

봉분 만드는 작업이 끝나자 하이닐은 보고를 했다.

“좋다, 하이닐. 지금부터 휴도니아 대륙과 경계를 이루고 있던 차원의 벽이 있는 곳으로 간다.”

“존!”

하이닐은 우렁차게 소리치고는 마계10군단 대원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하아!”

“타앗!”

“차앗!”

두두두두! 두두두두!

잠시 후 마계10군단 대원 8백여 명은 차원의 벽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일행이 차원의 벽이 있던 자리에 도착한 것은 한 달 후였다.

“아!”

“맙소사!”

“헐!”

일행의 얼굴이 멍해졌다.

라이자칸과 크로의 말마따나 그들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정말 차원의 벽이 있던 자리가 맞소?”

록은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라이자칸을 보았다.

“저기를 보시오.”

라이자칸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저게 증거란 말이오?”

“차원의 벽을 통과하는 마법진이 설치돼 있던 건물이외다.”

“그럼 정말로 여기가 차원의 벽이 있던 자리란 말입니까?”

“그렇소이다.”

라이자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칼베리언 그놈은?”

“헤를리온을 찾아 휴도니아 대륙으로 갔을 거요.”

“지금 헤를리온이라고 했소?”

록은 깜작 놀랐다.

이카렌을 비롯하여 주위에 있던 마족들 또한 전부 경악했다.

문 대륙의 멸망을 가져왔다는 전설의 신기 헤를리온.

그걸 찾아 휴도니아 대륙으로 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소, 록.”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는가?”

“비긴 마을로 돌아갈 건지, 이곳에 마을을 건설할 건지 그걸 묻는 건가요?”

“마계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이곳에 정착해야 할 거 아닌가.”

“비긴 마을은 인간이 건설한 마을이라 우리 마족과는 맞지 않아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건 성벽밖에 없어요.”

“살 집은 어차피 새로 지어야 한다는 말이군.”

“그래요, 록.”

“하면?”

“저기가 좋겠어요.”

이카렌은 대략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산을 가리켰다. 산의 높이는 해발 2천 미터쯤 되어 보였다.

“알았네.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라고 하겠네.”

록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전대 친위대 대원과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산을 향해 내달렸다. 이카렌 일행은 그들을 따라 산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도착한 마계10군단 대원들은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며 주위를 수색했다.

산을 수색하던 그들이 적당한 장소를 찾아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해발 5백 미터 지점이었는데,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성채 같았다.

“여기로 한다!”

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족들은 풀과 나무를 베어 냈다. 무성했던 나무가 잘려 나가자 공터는 점차 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공터로 생각했던 그곳은 거대한 성채였다.

성채는 총 4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단은 가로 1킬로미터 세로 3백 미터고, 2단은 가로 6백 미터 세로 3백 미터 3단은 가로 세로 3백 미터, 4단은 가로 세로 백 미터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 형태였다.

단과 단 사이를 오가는 길은 계단이었다.

1단과 2단 사이에는 네 개의 계단이 있고, 2단과 3단 사이에는 두 개의 계단, 그리고 3단과 4단 사이에는 한 개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을 터인데 계단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아니 계단뿐만이 아니었다. 각 단에 있는 석조 건물들은 비교적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가 대지의 성이었구나.”

성채를 살피던 이카렌이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카렌을 따르던 록이 물었다.

“저길 보세요.”

이카렌은 1단과 2단 사이의 절벽을 가리켰다. 절벽의 높이는 30미터가량이었는데 그곳 중앙에는 거대한 홈이 파여 있었다.

“저게 글이란 말인가?”

“‘노콴 데 크라’라는 고대언데 대지의 성이란 뜻이에요.”

“대지의 성이면?”

“신의 시대에 인간들이 살았던 곳의 이름이 대지의 성이었어요.”

“우리 마족의 암흑의 성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곳이란 말이군.”

“그런 것 같아요.”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곧 맨 위쪽인 4단에 발을 디뎠다.

가로 세로 백 미터 정도인 공터에는 뒤쪽 절벽에 바짝 붙어서 3층 석조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건물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

이카렌은 탄성을 흘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 차원의 벽이 있던 자리에서 보았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성채가 아니라 요새구먼.”

“우린 멋진 성을 얻은 것 같네요.”

“저 건물도 멋진 것 같구먼.”

록은 뒤편의 3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런가요?”

이카렌은 건물로 향했다.

건물 1층은 널따란 대전이었다. 회의실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듯 돌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한편으로 배치돼 있었다.

건물 안에서는 대원들이 한창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멋진 곳입니다, 군단장님.”

대원들을 감독하고 있던 하이닐이 이카렌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런 것 같네. 그런데 물이 있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자 이카렌이 물었다.

“물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찾아볼게.”

이카렌은 위로 올라갔다.

몇 개의 공간으로 나뉜 2층은 집무실로 사용하면 좋을 듯했다. 2층을 대충 둘러본 다음 3층으로 향했다.

3층으로 올라간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3층은 일반 가정집과 같은 구조였다. 한가운데에는 바다를 향해 뻥 뚫린 거실이 있고, 거실 양옆으로 침실, 화장실 드레스 룸 등이 구비돼 있었다.

“욕실이…….”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드레스 룸으로 보이는 공간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만들어두었으면서 욕실을 만들지 않았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다!”

이카렌은 방긋 웃었다.

그녀가 선 곳은 돌침대가 놓인 공간, 즉 침실의 가장 안쪽이었다. 그곳에는 2미터가량 되는 석문이 달려 있었다.

이카렌은 석문을 천천히 밀었다.

그르릉!

경량화 영구 마법이 걸린 듯 나직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렸다.

“빙고!”

바로 앞에 환상적인 비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로 세로 10미터가량 되는 널따란 수조가 절벽에 붙어 있었는데, 수조 위쪽 2미터 부근 절벽에서 물이 흘러나와 수조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수조의 깊이는 5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카렌은 몸을 돌려 건물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3층 건물은 절벽과 한 몸이었다. 즉 석재를 가져와 쌓아 올린 게 아니라 절벽을 깎아내 건물을 만든 것이었다.

“보물이네.”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욕조가 있는 곳을 나온 이카렌은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석조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건 어디로 놓을까요?”

어느새 1, 2층 정리가 끝난 듯 하이닐은 나무 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가 가리킨 테이블은 마계를 떠나오면서 가져온 살림살이였다.

마계10군단 대원들은 도망치듯 그곳을 나온 게 아니었다. 마계10군단이 사용하던 모든 비품과 살림살이를 아공간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었다. 탈출이 아니라 이사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바다를 볼 수 있게 놓아줘.”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하이닐은 고개를 숙이고는 이카렌의 살림살이를 부려놓았다. 침대, 옷장, 화장대, 서랍장, 장식장, 서가 등 그녀가 마계에서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 아공간에서 나왔다. 그것들은 하이닐의 지시 하에 각 방으로 배치됐다.

두 시간에 걸쳐 살림 정리가 끝났다.

“여긴 됐으니까 다른 곳을 정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그리고 록과 라이자칸을 불러줘. 자네와 퀼, 히악스도 오고.”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하이닐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10분 후.

마계10군단 수뇌라고 할 수 있는 자들 모두는 이카렌의 숙소 3층 거실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전대 친위대 대주 록, 부대주였던 히발, 라이자칸, 현 친위대 대주 하이닐, 부대주 크라제, 마계10군단의 수장 퀼, 사병 조직 수장 히악스까지 총 일곱 명이었다.

그들이 들어서는 순간 이카렌은 카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판 타는 법을 김필도로부터 배웠고, 그동안 꾸준히 연습하여 지금은 최고의 맛을 뽑아낼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카판 향이 진동할 수밖에 없었다.

“전망 좋구먼.”

록은 바다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다른 건물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나요?”

이카렌은 걸러진 카판을 카판잔에 따르며 물었다.

“다른 건물에서도 잘 보인다네.”

“그런데…….”

“여긴 미인이 타주는 카판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멋진 풍미를 가진 카판을 탈 수 있는 건가?”

사실 록은 카판 마니아였다. 하지만 지금껏 수없이 많은 카판을 마셨지만 이렇듯 향이 진한 카판을 맛본 적이 없었다. 카판 냄새를 맡는 순간 입 안이 저수지로 변한 것처럼 침이 고였다.

하지만 문 대륙에서 첫 회동인데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여 참는 중이었다.

“한잔하세요.”

록의 상태를 눈치챈 이카렌이 카판잔과 함께 설탕을 건넸다.

“고, 고맙네.”

록은 카판잔을 급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오!”

그는 마시기도 전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천 년간 카판 마니아였던 그는 냄새만으로 카판의 맛을 알아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향을 음미하던 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판을 마셨다.

“아!”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카판을 마셨다. 형언할 수 없는 카판의 맛에 록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완전 신의 맛이야.”

록은 졌다는 듯 다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맛을 내는 방법을 내게도 가르쳐줄 수 있는가?”

록은 간절한 얼굴로 이카렌을 보았다.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배운 거라서 전수해드릴 수가 없네요”

이카렌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부탁하겠네, 군단장. 아니 이걸 가르쳐주면 충성을 맹세하겠네.”

록은 벌떡 일어나 이카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세요. 카판 타는 법 가지고 이러시면 내가 무안해지잖아요.”

이카렌은 깜짝 놀라 록 앞에 마주 무릎을 꿇었다. 비록 그녀가 마계10군단의 군단장이긴 하지만 록은 전전대 군단장을 모신 원로다. 아무리 장난이라고 하지만 그가 무릎을 꿇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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