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농담이 아닙니다, 군단장. 카판 타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록은 이제는 한술 더 떠 공대까지 했다.
“아무튼 대주의 엉뚱함은 아무도 못 말려요.”
보고 있던 히발이 피식 웃으며 록 옆으로 무릎을 꿇었다.
“난 카판 타는 법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너희들과는 상관없다.”
“대주가 군단장님께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데, 부하인 우리는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다니란 말이오?”
“나는 니들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을 참이다.”
“차라리 강요하시오. 그게 훨씬 대주답소.”
“난 카판 타는 기술을 배우는 데 목숨을 걸 거야.”
“저기…….”
이카렌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록과 히발을 보았다. 록과 히발의 마음을 모르진 않고 그녀 또한 마계10군단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록을 비롯한 전대 친위대였다.
원로 마족으로 대접하자니 늙은 퇴물 취급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부하로 부리자니 신분들이 너무 높다.
전대 친위대의 처우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록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록은 부하가 되기 위한 핑계로 카판 제조법을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다.
“카판 내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하겠단 말입니까?”
록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가르쳐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루시안에게 꿀밤 한 대 맞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럼 됐습니다, 군단장님. 군단장님께서 카판 내리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걸로 알고 충성 맹세를 하겠습니다. 오픈!”
록은 아공간을 열고 그의 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공손하게 이카렌에게 내밀었다.
이카렌은 얼결에 록의 검을 받아 들었다.
“나 하말리온 가문의 장자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은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 군단장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군단장님께서 절 버리지 않는 이상 이 맹세는 지켜질 것이며, 맹세를 어기는 순간 나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은 위대한 마족의 전사가 아닐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록은 양팔을 쭉 펴 얼굴과 함께 바닥에 댔다.
그의 모습은 완전한 복종의 표식이었다.
‘역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이자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10군단이 왜 마계와 천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조직이라고 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분명 외적으로 드러난 신분은 록과 히발이 높다. 록은 3미터 키의 최상급 마족이고 히발은 상급 마족이다. 반면에 군단장인 이카렌은 중급 마족에 불과하다.
그런데 록과 히발은 중급 마족인 이카렌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맹세를 하고 있다.
“나 라베이커 가문의 장자 히발 벨프스 라베이커는…….”
록에 이어 히발의 충성 맹세가 시작됐다.
히발 또한 진중한 얼굴로 충성을 맹세하였고, 절대 복종의 표시로 두 팔과 얼굴을 바닥에 댔다.
“전대 군단장님들보다 더 훌륭한 군단장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아니 여러분들이 도와주면 분명히 그렇게 될 거예요. 그만 일어나세요.”
“말씀 놓으십시오, 군단장님.”
“그건 안 돼요, 록. 록이 나를 군단장으로 인정하고 충성 맹세를 한 것처럼 나 또한 록과 히발 그리고…….”
“불가합니다, 군단장님. 마계10군단의 군단장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부하는 부하일 뿐입니다, 군단장님!”
록은 강경했다. 그는 이카렌이 말을 놓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태세였다.
결국 이카렌이 먼저 손을 들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도록.”
이카렌은 별수 없이 말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감사합니다.”
록과 히발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자, 이제 그동안 미뤘던 이야기를 하기로 해요.”
이카렌의 시선이 라이자칸에게로 향했다.
헤를리온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루시안 기억하는가?”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인데 잊을 수가 없죠. 죽어도 못 잊을 거예요.”
“그가 자네를 구해주었단 말인가?”
“데메우스 그놈의 처형식에서 날 구해줬으니까요.”
“그 쥐새끼가 군단장님께 처형식을 거행했단 말입니까?”
듣고 있던 하이닐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데메우스가 누군가?”
록은 하이닐을 보았다.
“프리메우스 원로의 아들이고, 새로 구성된 마계10군단의 군단장이 될 잡니다.”
“쓰레기 같은 놈이구먼.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습니까?”
록은 이번엔 이카렌을 보았다.
“리모스에서 혼자 있을 때 놈들에게 포위를 당했어.”
“아무리 포위를 당했다고 해도 군단장님의 실력 정도면…….”
록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카렌은 겉보기엔 중급 마족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최상급 마족에 필적한다. 지금 정도의 실력이면 데메우스 떨거지들을 없애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 처형식을 당했다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지금보다 많이 약했어. 지금의 20퍼센트 정도나 됐을까?”
“그럼 그날 이후에 강해진 겁니까?”
“아냐, 그 사람 때문에 강해졌어.”
“그 사람이라면?”
“내게 라그나뢰크에 도달한 레드 드래곤 이나함이 남긴 하트를 주고 잊힌 전설의 신검 세딕을 준 사람.”
“레드 드래곤의 하트와 잊힌 전설의 신검 세딕을 줬다고요?”
록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이자칸과 히발, 그리고 하이닐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카렌이 말한 두 가지는 꿈에서조차 보기 힘든 보물 중의 보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보물을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를 동시에 줬다? 그것도 마족이 아닌 인간이.
“드래곤 하트가 없었으면 난 죽었을 거야.”
“그랬군요.”
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카렌이 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더불어 이카렌은 각성을 해도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데 일부러 각성을 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됐다는 거죠?”
이카렌은 라이자칸을 보았다.
“세이아칸에게 발견된 모양이네.”
“발견돼요?”
“절벽에서 올라오다가 세이아칸에서 발견돼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낭떠러지로 던져졌다네.”
“거, 거긴 내가 내려준 곳인데.”
이카렌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카렌은 히데우스로부터 김필도에 대해 듣지를 못했다. 히데우스는 그의 검 헬칸과 오테르의 인장 때문에 김필도가 위험해질까 봐, 이카렌을 만났을 때에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네.”
“세이아칸 그잔 결코 실수하는 자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그렇네. 그는 절대 실수하지 않네.”
“그럼?”
“그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네.”
“그가 헤를리온을 얻었단 말인가요?”
“천계에서는 그렇게 파악하고 있네.”
“그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사실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네.”
“그런데요?”
“세이아칸이 루시안을 던져버린 그날 표범처럼 생긴 동물이 루시안을 쫓아 낭떠러지로 뛰어들었다네. 세이아칸은 천좌 제1군 세라핌에게 검은 동물을 조사해 오라고 명령을 내렸네. 그런데 그가 시체로 발견됐다네.”
“천좌 제1군인 세라핌이 시체로 발견됐다고요?”
“놀랍게도 그를 없앤 자가 루시안이었네.”
“정말요?”
이카렌은 깜짝 놀랐다.
천좌 제1군 세라핌은 상급 마족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천족이다. 그런 자를 없앨 정도면 엄청나게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방법은 헤를리온 말고는 없다.
“그래서 천계에서는 휴도니아 대륙에 대천신군을 파견했네.”
“헤를리온을 찾기 위해서란 말인가요?”
“그렇네. 그리고 얼마 전엔 붉은 학살자들과 블러드 데빌단이 배를 타고 저 바다를 건너갔네.”
“그들 역시 헤를리온을 찾으러 갔다는 말이군요.”
“정확하게 천계나 마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를리온을 찾는다는 미명 하에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갔다는 거네.”
“그렇군요.”
이카렌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가려면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록은 카판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카렌은 록을 보았다.
“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배 말입니다.”
“휴도니아 대륙으로 가고 싶어?”
“2천 년 전에 잠깐 들렀던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밤에만 움직이면 됩니다.”
“그리고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 마법 스크롤도 상당히 보유하고 있으니까 휴도니아 대륙에서 활동하는 덴 크게 지장 없을 겁니다.”
“그런 것도 가지고 있었어?”
“저는 록입니다, 군단장님.”
록은 활짝 웃었다.
“그럼 배만 만들면 된다는 거네.”
“마계10군단 대원들 중에는 목수 출신도 상당히 많습니다, 군단장님.”
듣고 있던 하이닐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좋아, 하이닐. 지금부터 배를 건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친위대는 하나로 합치고, 마계10군단과 사병도 하나로 합칠 거야. 불만 없지?”
“물론입니다, 군단장님.”
하이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선은 이곳을 제대로 정비하는 게 먼저야. 이곳 대지의 성을 우리 마계10군단 근거지로 만든 다음에, 전함은 생각해보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하이닐은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저희들도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단장님.”
이어 록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록은 전함 설계도를 그려놓도록 해.”
“전함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록 일행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행이 나가고 30분가량 흘렀을 때 여자 마족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린과 라임이란 이름을 가진 마족으로 마계10군단 대원이었다.
“어쩐 일이야?”
이카렌은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군단장님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럼 부관?”
“부관은 아니고 그냥 시중…….”
“부관 맞아. 아무튼 청소를 할 참이었는데 잘 왔어.”
“청소는 이미 다…….”
“사내들이 청소한 걸 믿어?”
“호호! 그렇네요.”
세린은 피식 웃었다.
“멋진 욕실도 있으니까 목욕도 할 수 있을 거야. 열심히 해보자고.”
“알았어요, 군단장님.”
세린과 라임은 활짝 웃으며 청소 준비를 했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 루시안.”
이카렌은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