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06화 (106/225)

# 106

제3장 상상의 공간

어둠의 벽 안으로 빨려 들어간 김필도 일행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백색의 공간이었다.

“여긴 어디죠?”

리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나도 처음인데 알 리가 없잖아요. 일단 가보기나 하죠.”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리시아와 알마니는 주위를 살피며 김필도를 따랐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백색의 공간만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세 사람이 처음으로 뭔가를 발견한 것은, 느낌에 의지해 세 시간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끙!”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백색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들은 언데드 몬스터의 하나인 본 메이지(Bone Mage)와 본 나이트(Bone Knight)였다.

어둠 속이 아니라 백색의 공간에서 나타난 언데드 몬스터의 모습은 섬뜩했다.

“우리처럼 이 안으로 들어왔던 자들인가 봐요.”

리시아는 언데드 몬스터들을 살피며 속삭였다.

좀비들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언데드 몬스터들의 수는 벌써 백여 객체가 넘었다.

“디자이너!”

김필도는 알마니를 불렀다.

“네, 대공 전하.”

“쟤들 키가 너무 큰 거 같지 않아?”

김필도는 언데드 몬스터를 가리켰다.

“키를 적당하게 재단하란 말씀이세요?”

“응!”

“재단이 될는지 모르겠네요.”

“일단 해봐.”

“알았어요, 대공 전하.”

파앗!

알마니의 신형이 언데드 몬스터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가 다가가자 언데드 몬스터들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먼저 본 메이지가 알마니를 향해 마법을 쏘아댔다.

커다란 화염구가 쏘아져 나오고, 검은색의 마나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알마니는 그런 공격을 무시했다.

그가 착용한 전투기갑은 무방비 상태에서도 4클래스 마법까지는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알마니의 가위가 벌어졌다가 오므려질 때마다 언데드들의 목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이것들아, 내가 바로 디자이너 알마니다. 가위 신이란 말이다.”

알마니는 신이 났다.

수백 구의 언데드들이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 다니며 본 메이지와 본 나이트의 목을 잘랐다.

“어떻게 한 거죠?”

빠른 속도로 움직여 다니는 알마니를 바라보며 리시아가 물었다.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는지 궁금해요?”

“우선 천족을 없앤 방법부터 알고 싶어요. 아니 천족의 전투기갑인 세이기온을 부순 방법이라고 해야겠네요.”

“그 바쁜 와중에 그것까지 봤어요?”

듣고 있던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리시아를 보았다.

“약혼자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거예요.”

“약혼자라서 그랬다는 거예요?”

“미래를 맡길 사람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럴 땐 기뻐해야 하는 거죠?”

“당연히 기뻐해야죠. 디자이너 알마니가 인정한 엄청난 몸매의 소유자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데 싫어한다면 사내가 아니죠.”

“그런데 어째 입맛이 쓰네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고사도 있잖아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자만이 성공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말 아닌가요?”

“성공의 문이 곧 미인일 수도 있잖아요.”

“풋! 갖다 붙이기는.”

“말해주기 싫은 거예요?”

“세 마나를 합친 힘이에요.”

“세 마나를 합친 힘이라고요?”

“물, 불, 바람 또는 물, 불, 대지 또는 불, 바람, 대지 등의 힘을 하나로 합친 다음 검을 통해 밀어 넣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건 마법사만 가능할 거… 아니 마법사도 불가능한 거잖아요.”

“가능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그 가능한 사람이 루시안 공자?”

“아마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천족이나 마족 앞에서 침을 뱉어도 된다는 거죠.”

“침을 뱉는다는 건 무슨 소리죠?”

“목에 힘을 주고 째려볼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동등하게 설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죠.”

“그리고 루시안 공자가 이거라는 말도 되고요.”

리시아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헬만 그놈은 천족 제4계급이 불과해요.”

“하지만 루시안 공자는 그를 가지고 놀 정도로 강하잖아요.”

리시아는 김필도가 헬만을 일부러 살려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천족이나 마족 중에는 헬만 같은 녀석을 어린애처럼 다룰 수 있는 자들은 널렸어요. 당장 이 검의 주인만 해도 내가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요.”

김필도는 헬칸을 가리켰다.

“문 대륙에서 주운 게 아니고 물려받은 거였어요?”

리시아는 헬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계 3대 신검의 하나인 헬칸을 무슨 수로 줍습니까?”

“그, 그게 헬칸이에요?”

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김필도가 들고 있는 검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계 3대 신검의 하나인 헬칸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네.”

“그럼 그 오른손에 팔찌도?”

이번엔 마신의 팔찌 파라온을 가리켰다.

“이건 왜요?”

“그 팔찌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그런 것들이 보여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빤히 보았다. 마신의 팔찌 파라온은 문 대륙에서부터 차고 있었다. 하지만 팔찌 안에 들어 있는 마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그런데 리시아는 그걸 꿰뚫어본 것이다.

“전엔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요?”

“이것들 때문인 것 같아요.”

리시아는 자신의 가슴 사이를 가리켰다.

“바람의 눈 때문에 능력이 업그레이드 됐다는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맞아요. 이 녀석은 고대의 무덤에서 얻었고, 이 오테르의 인장과 헬칸은 마족으로부터 얻었어요.”

“그걸 준 마족의 신분은 상당히 높았겠죠?”

“죽기 전에 마계10군단 군단장이었으니까 낮다고는 할 수 없겠죠.”

“당신 정말 인간 맞아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인간이 마계10군단 군단장으로부터 신검과 가문의 인장을 물려받고, 천족과는 원수를 지는 게 가능하냐고요.”

“마족과 천족 친구도 있는데요?”

“진짜?”

“네.”

“끙!”

리시아는 김필도를 쏘아보았다.

꽤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하면서 많은 걸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전하! 이 새끼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때 알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알마니를 보았다.

어느새 분리를 했는지 그의 양손에는 가윗날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상태에서 알마니는 가공할 속도로 움직여 다니며 언데드들의 목을 잘랐다.

그런데 시체로 변한 언데드는 한 마리도 없었다. 가윗날로 잘라낸 머리는 금세 다시 붙어 알마니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지금까지 뭐 한 거야?”

김필도는 알마니를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정확하게 150마리를 없앴어요.”

“그런데 전부 살아났다는 거야?”

“이 새끼들 이름이 언데드 몬스터잖아요.”

“죽지 않는 몬스터라는 거야?”

“이미 죽은 녀석들이잖아요.”

“그렇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언데드 몬스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의 헬칸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두세 객체의 언데드 몬스터가 박살이 났다. 김필도는 길을 만들며 알마니를 향해 걸어갔다.

리시아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데쓰 와이어로 언데드 몬스터의 몸통을 잘라내며 김필도를 따랐다.

두 사람 손에 죽어간 몬스터의 수는 50마리가 넘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알마니 곁으로 다가갔다.

“다 해치웠…….”

뒤를 돌아보던 김필도는 말끝을 흐렸다. 방금 잘라냈던 머리와 몸통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튀어 오르더니 잘린 부위로 날아가 자석처럼 철썩 달라붙는 것이었다.

“소용없다고 그랬잖아요.”

알마니는 힐난하듯 소리치며 그 앞으로 다가온 언데드 몬스터를 향해 가윗날을 휘둘러댔다.

“저것들을 없애는 방법 몰라?”

“방법이야 너무나 잘 알아서 탈이죠.”

“말해봐.”

“신성력이 엄청나게 충만한 사제가 있어야 해요.”

“디자이너 자네 신성력 가진 거 있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리시아 양은?”

“신전에 가본 기억도 까마득해요.”

“나도 무신론자니까…… 두 번째 방법은 뭐야?”

김필도는 다시 공격을 시작하며 알마니에게 물었다.

“신성력을 간직한 무기가 있으면 돼요.”

“그런 것도 없겠지?”

“전 없어요.”

“나도 없어요.”

리시아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세 번째 방법은?”

“성수가 있으면 돼요.”

“그것도 없겠지?”

“그런 것 같아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녀석들과 싸우면서 피할 장소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세 사람은 언데드 몬스터들과 싸우며 자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지만 언데드 몬스터를 피할 만한 건물이나 지형은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백색의 공간뿐이었다.

“돌아버리겠네.”

서서히 피로가 밀려오는 듯 알마니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좀 쉬어. 물도 좀 마시고.”

“알았어요.”

김필도의 말에 알마니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아공간을 열었다.

“오픈(Open)!”

“……오픈!”

아공간이 열리지 않자 다시 소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알마니의 아공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 돼요?”

리시아는 알마니를 보았다.

“네. 언니가 열어보세요.”

알마니는 리시아 쪽으로 가며 말했다.

“알았어요. 오픈(Open)!”

리시아는 그녀의 아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알마니와 마찬가지로 아공간이 열리지 않았다.

리시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죽여도 살아나는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하면서도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공간 안에 음식과 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공간을 열 수 없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쉴 곳도, 숨을 곳도 없는, 그야말로 백색의 공간 아닌가.

“루시안!”

리시아는 김필도를 불렀다.

“아공간이 안 열려요?”

김필도는 언데드 몬스터를 없애며 물었다.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픈(Open)!”

김필도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그러자 그 앞에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공간이었다.

“어?”

리시아는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의 아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알마니는 열 수 없었던 아공간을 김필도는 대번에 연 것이다.

“오픈!”

그녀는 조금 전 잘못했나 싶어 다시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아공간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죠?”

“내가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잖아요.”

김필도 또한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대공 전하 아공간에 먹을 게 있느냐가 중요해요.”

알마니가 김필도의 아공간을 흘끔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먹을 건 많은데 대부분 날고기야.”

“먹을 게 있다는 게 중요하지 익힌 고기냐 날고기냐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물은 없어.”

“물이 없다고요?”

“전에 넣고 다녔는데 떨어졌어.”

“염병.”

알마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음식보다 물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물을 가진 두 사람의 아공간은 열리지 않고, 열린 아공간에는 물이 들어 있지 않다.

어떻게든 싸움이 멈추면 이곳을 탐험하여 나갈 방법을 찾을 텐데, 언데드 몬스터에 잡혀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다.

“나하고 리시아 양하고 싸우고 있을 테니까 알마니 자넨 이곳을 샅샅이 훑어보고 와.”

“알았어요, 대공 전하.”

“차앗!”

김필도는 고함을 내지르며 언데드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그의 대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언데드 몬스터들은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앗!”

리시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데쓰 와이어는 헬칸보다 더 살상력이 강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 몬스터 수십 객체의 몸통이 뎅겅뎅겅 잘렸다.

3분의 2 정도를 없애고 나자 여유가 생겼다.

“가!”

김필도는 알마니를 향해 소리쳤다.

“얼른 다녀올게요.”

알마니는 포위망을 탈출해 나갔다. 그때 10여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가 알마니를 쫓아갔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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