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07화 (107/225)

# 107

알마니가 멀어지자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았다.

“무슨 기회요?”

“볼일 볼 기회 말이에요. 알마니 돌아오기 전에 얼른 처리하세요.”

“이 와중에 볼일을 보라는 거예요?”

당혹했을까. 리시아의 입에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알마니가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나도 자리를 피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언데드 몬스터를 막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굳이 급하지 않으면, 알마니가 출구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좀 더 기다려보든가요.”

“아니에요.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그녀가 볼일을 볼 결심을 한 것은 언데드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쉽게 발견될 장소에 출구가 있다면 그들이 언데드 몬스터가 될 리가 없을 터였다. 우선은 출구가 없는 걸로 생각하고 대비를 해야 할 듯했다.

“알았어요.”

김필도는 빠른 속도로 오가며 폭 2미터가량 되는 공간을 만들었다. 리시아는 주위를 살피며 그곳에 쪼그려 앉았다.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돌아보면 죽여 버릴 거예요.”

리시아는 불안한 눈으로 김필도를 쫓으며 소리쳤다.

“그럴 정신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김필도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혼자서 리시아 주위로 다가드는 언데드 몬스터를 전부 없애려니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고, 지긋지긋한 것들! 귀신은 뭐하고 자빠졌나 몰라 저 녀석들 싹 데려가지 않고.”

숨이 턱까지 찬 김필도는 언데드 몬스터들을 보며 투덜댔다.

바로 그때였다.

기적 같은, 아니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친 듯이 공격해 오던 언데드 몬스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백여 구에 달했던 몬스터가 사라지자 정적이 찾아왔다. 아니 한 가지 소리만 남았다. 그건 다름 아닌 리시아가 볼일 보는 소리였다.

하지만 리시아는 자신의 쏟아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느닷없이 일어난 황당한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은 듯 눈만 껌뻑거렸다.

“어떻게 된 거죠?”

리시아는 김필도는 돌아보며 물었다. 김필도는 그녀 뒤편에 서 있었다.

“글쎄요.”

김필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혹시 루시안 공자의 말 때문 아닐까요?”

“제 말?”

“네.”

“제가 신입니까. 사라지라고 하면 사라지게?”

“아공간도 공자 것만 열렸잖아요.”

“그건 뭔가 다른… 그런데 큰 거 보고 있어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네?”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 같아서요.”

“…고개 돌려욧!”

질겁한 리시아는 버럭 소리쳤다. 언데드 몬스터가 사라진 것에 정신이 팔려 지금껏 엉덩이를 내놓은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미 다 봤는데 고개는…….”

김필도는 입을 삐죽 비틀며 픽 웃었다.

“그래도 돌려욧!”

리시아는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렸다.

“알았어요.”

김필도가 고개를 돌리고 나자 리시아는 재빨리 옷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여긴 이제 리시아 양 소유가 됐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조금 전에 영역표시를 했잖아요.”

“영역표시……? 루시안!”

“하하하! 농담입니다.”

김필도는 크게 웃었다.

“짓궂기는.”

리시아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리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공 전하!”

그때 어디선가 알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마니예요.”

“가봅시다.”

두 사람은 알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5분가량 달려가자 알마니가 보였다.

“뭔데?”

김필도는 알마니 옆으로 가며 물었다.

“여기에 글이 쓰여 있습니다.”

알마니는 바닥을 가리켰다.

-상상의 방

알마니가 가리킨 곳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뜻일까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았다.

“상상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런 뜻은 아니겠죠?”

리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한번 상상해보세요.”

김필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문득 리시아가 참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우리가 쉴 수 있는 커다란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안에는 멋진 응접실이 있고, 푹신한 소파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 안락한 침실 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쉬고 싶은가 보죠?”

“여기로 들어온 지 며칠은 된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마법 공간이라 정확하게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겪은 걸 생각하면 리시아의 말처럼 며칠은 지난 것 같기도 하다.

“루시안 공자는 지금 가장 바라는 게 뭐죠?”

“연회실에서 술이라도 좀 가져올 걸 그랬나… 맞다! 술이 있었네.”

김필도는 다시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신의 눈물을 찾을 요량으로 아공간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헉?”

“말도 안 돼!”

바로 그때 알마니의 신음과 리시아의 외침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려 리시아를 보았다.

“왜 그러죠?”

“루, 루시안 공자 발치를 보세요.”

리시아는 김필도 발을 가리켰다.

“뭐가 있다고…….”

김필도는 멍해졌다. 그의 발치에 술 한 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났어요.”

“정말?”

“네.”

“알마니 자네도 못 봤어?”

“리시아 님 말씀이 맞아요.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났어요.”

“왜?”

“술이 필요하다고 한 분은 대공 전하신데 제게 물으시면 어떡해요?”

“내가 술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거야?”

“맞다, 아까도 언데드 몬스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니까 사라졌잖아요.”

문득 생각난 듯 리시아가 소리쳤다.

“그럼 여긴 내가 상상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란 말이에요?”

“여기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리시아는 바닥의 글을 가리켰다.

“리시아 양은 안 됐잖아요.”

“전 이곳 주인이 아니니까 당연히 안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리시아 양은 내가 주인이라서 된다는 거예요?”

“루시안 공자의 친가는 이곳을 만든 프리우스 가문이고 외가는 이곳을 관리했던 아이작 가문이잖아요. 루시안 공자만큼 확실한 주인은 대륙에 없을 걸요?”

“그거 일리가 있네요.”

“해보세요.”

“뭘 만들죠?”

“조금 전에 제가 했던 말 있잖아요.”

“쉴 집?”

“네.”

“난 쉬고 싶어. 안락한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김필도는 전면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

하지만 백색의 공간은 변화가 없었다.

“거봐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거잖아요.”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열어두었던 아공간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상관없는 게 아니에요. 정말 우리가 쉴 곳이 생겨났어요.”

리시아는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김필도는 다시 고개를 빼냈다.

“헐!”

그는 멍한 얼굴로 왼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2층으로 지어진 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담도 없고, 정원도 없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거실과 이어지는 주택이었다.

“진짜일까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았다.

“일단 들어가 보면 알겠죠.”

리시아는 건물 앞으로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와!”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붉은 카펫이 깔린 거실에는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미치겠네.”

현관문을 만져보던 김필도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딱딱한 나무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환상이 아니고 실체였던 것이다.

“욕실이에요, 루시안!”

먼저 들어갔던 리시아가 한편 문을 열고 소리쳤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김필도는 알마니를 보았다.

“가능해요.”

뜻밖에도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거 아냐? 이게 어떻게 가능해?”

“이 건물이 금방 창조된 게 아니고,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해요.”

“설명해봐.”

김필도는 소파로 가 앉았다.

리시아가 욕조에 물을 받는 듯 욕실에서 물소리가 흘러 나왔다.

“건물을 지어놓고 투명 마법을 걸면 되잖아요. 거실에 있는 가구에도 전부 마법이 걸려 있잖아요.”

알마니는 소파와 테이블을 가리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실체가 있다면 누군가는 발견했을 거야. 이곳으로 온 자들 전부가 이 건물이 있는 곳만 피해 갔을 리는 없을 테니까.”

“피해 갔을 거예요.”

“전부가?”

“이 건물이 있는 주위에 환영 마법을 걸면 간단하게 해결 돼요. 즉 걷는 당사자는 직선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 건물을 우회해서 가게 되는 거예요.”

알마니는 오른손으로 커다랗게 반원을 그렸다.

“좋아, 그렇다 치고. 그럼 그 숨겨두었던 건물이 내 목소리에 반응해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거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여기 상상의 방은 프리우스 가문이나 또는 아이작 가문의 혈통에게만 열려 있는 공간 같아요. 두 가문의 혈통이 아닌 자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 건물을 찾아낼 수가 없죠. 아공간도 열리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남은 건 죽음밖에 없다는 말?”

“아마 죽은 자들을 언데드 몬스터로 만드는 마법이 이곳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거예요.”

“그럼 나는 어떻게 확인한 거지?”

“프리우스 가문이나 아이작 가문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마나가 있지 않을까요?”

“아!”

김필도는 탄성을 내뱉었다.

#-네 몸속에 천둥이 있는데 아느냐?

-천둥이 있다고요?

-프리우스 가문의 피를 타고난 사람은 누구나 천둥을 가지고 있단다.

-아이작 가문도 있어요?

-아이작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은 하늘을 가지고 있단다.

-하늘이라고요?

-내가 네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느냐?

-엄마는 하늘이고 아빠는 천둥이기 때문이란 말이세요?

-천둥이 사는 곳이 하늘이잖느냐.

-그럼 아빤 엄마 품에서 산 거네요.

-그렇지.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말이 내 몸속에 천둥과 하늘이 들어 있대.”

“천둥과 하늘이라고요?”

“프리우스 가문은 천둥의 신을 믿었고, 아이작 가문은 하늘을 믿었거든.”

“그것 때문이군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엘라하와 다르의 피는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엘라하와 다르를 알아?”

김필도는 알마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 할아버지는 엘라하의 이인자였어요.”

“펠라카 가문의 후예예요?”

깜짝 놀란 목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왔다. 리시아가 문을 빠끔 열고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펠라카 가문은 뭐죠?”

“방금 디자이너 알마니가 말한 대로예요.”

“빛의 전사 엘라하의 이인자 가문이라는 거예요?”

“10대 가문과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가문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아이작 가문이 스러지면서 한 방에 훅 갔죠, 뭐.”

“그것도 정원사들 짓?”

“그 부분은 제 영역 밖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죠.”

“그들 짓이라면 다시 올 텐데 뭐가 그리 궁금해요?”

“그렇긴 하네요.”

“그건 그렇고 아공간 안에 옷 있죠?”

“전부 제 옷인데요.”

“상의 하나만 빌려 주세요.”

“바지는 필요 없어요?”

“루시안 공자 상의는 제겐 원피스와 마찬가지라고요.”

“그렇겠네요.”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아공간을 열고는 블루 드레스 셔츠와 타월을 꺼내 욕실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알마니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알마니 자네 말은 내 몸속에 있는 마나를 인지해서 프리우스나 아이작 가문의 후예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거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후대를 위한 안배는 아직 시작도 안 된 거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거면 이런 공간을 만들 이유가 없잖아.”

김필도는 닫았던 아공간을 다시 열어 카판을 내리는 도구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주전자에 물을 붓고 토치 불꽃을 일으켜 물을 데웠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거야.”

김필도는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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