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제4장 움직이는 요새
카판을 한잔하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리고 리시아가 나왔다.
“저 여자가 사람 잡지.”
김필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블루 드레스 셔츠 하나를 걸치고 머리는 타월로 말고 나온 그녀의 모습은 영화 속 여주인공을 보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김필도의 내심을 눈치챈 듯 리시아는 요염하게 웃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뻐요.”
“고마워요. 그런데 선조들이 루시안 공자에게 남긴 안배는 어디 있죠?”
목욕을 하면서도 리시아의 모든 신경은 김필도와 알마니의 대화에 가 있었다.
“창고에 있지 않을까요?”
“창고가 어디 있는데요?”
“물은 잘 나와요?”
“따뜻한 물이 콸콸 나와요.”
“그럼 나도 목욕이나 해야겠네요.”
김필도는 벌떡 일어났다.
“그 전에 궁금증을 풀어주면 안 돼요?”
리시아는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안달 난 아이처럼 보였다.
“씻고 나서 보여줄게요.”
김필도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루시안 공자!”
리시아는 김필도를 불렀다.
“네.”
“그 안에 있는 빨래, 루시안 공자 아공간에 좀 넣어주세요.”
“빨래?”
김필도는 욕조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물기를 짠 속옷이 놓여 있었다.
김필도는 욕실 문을 열고 리시아를 보았다.
“난 해방감을 두 배로 느끼고 있어요. 바바리맨 녀석들의 기분도 이해할 것 같구요.”
리시아는 방긋 웃으며 윙크를 했다.
“이러다 사고치고 말지.”
콰앙!
김필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거칠게 욕실 문을 닫았다.
“호호호! 남자가 소심하기는.”
리시아는 활짝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카판 한 잔 드려요?”
알마니는 카판을 내려놓은 포트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네.”
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마니는 카판잔에 카판을 따라 설탕과 함께 내밀었다.
“고마워요.”
“부드러운 맛을 원하면 우유를 약간 타면 좋아요.”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수도에는 카판숍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모르셨나 봐요?”
“그래요?”
“그런데 카판숍에서 파는 카판보다 대공 전하께서 내린 카판이 훨씬 깊은 맛이 나네요.”
“이게 더 낫다는 거예요?”
“카판숍 차리면 대박칠 것 같아요.”
“재주가 많은 사람이네요.”
“그런 것 같아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리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질문을 해도 괜찮을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펠라카 가문은 어떻게 하고 가위질을 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신가 봐요?”
“말하기 곤란하면…….”
“곤란할 것도 없어요. 크로 50명을 뺀 나머지가 전부 배신을 했어요. 아이작 가문보다 먼저 스러진 곳이 펠라카 가문이니까요.”
“복수할 생각도 한 것 같은데.”
알마니의 검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복수할 생각이 없었더라면 그렇듯 강한 검술을 익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복수를 할 생각으로 크로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거길 떠났어요.”
“그랬군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로를 떠날 걸 후회하지 않아요. 복수를 할 수도 없었겠지만 설사 복수를 한다고 해도 알아줄 사람도 없어요.”
“혼자만 남은 거예요?”
“그런 셈이죠.”
“그들이 그걸 몰랐을까?”
욕실 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마니는 고개를 돌렸다. 김필도가 욕실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무슨 소리죠?”
“10인 위원회라는 자들의 존재를 알고 복수를 포기한 거 아냐?”
“대공 전하도 많이 아시는군요.”
“자네 앞에 있는 리시아 양으로부터 들은 것뿐이야.”
“그랬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대륙을 뒤덮고 있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나서 포기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10인 위원회 그들이 알마니 자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알면서도 살려두었단 말이세요?”
“본보기란 말 알아?”
“그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절 살려주었단 말이에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아직 살아 있고, 자네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운발이 좋아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말이야.”
“대공 전하도 그렇단 말이에요?”
“외조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아실 테고, 엄마는 내가 네 살 때 익사하셨고, 아버지는 여섯 살 때 마차 전복 사고로 돌아가셨어.”
“그럼 혼자 사셨습니까?”
“유모가 있기는 했지만 없애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웠어.”
“그랬군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우릴 본보기로 삼았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우리 앞에 나타날 거라고 보시는 거예요?”
“알마니 자네가 시골에 처박혀 가위질만 하거나, 내가 천동의 성에 틀어박혀 시체처럼 생활하면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활동을 시작하고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야. 왜냐면 알마니 자네와 나 같은 본보기는 절대 행복하게 잘 살아서는 안 되니까. 가장 밑바닥에서 아주 불행하게 살다가 죽어야, ‘봐라. 우리 10인 위원회를 거역하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처럼 된다.’라는 명제가 성립되거든.”
“그럼 대공 전하와 전 더럽게 꼬인 거군요.”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난 내 조부나, 엄마나 아버지가 아니지.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야. 학사 사시미 김필도 말이야.”
김필도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맺혔다.
“학사 사시미 김필도는 뭡니까?”
“그런 게 있어. 자, 이제 우리 선조가 내게 무얼 남겼는지 창고를 살펴보자고.”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전방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창고를 보고 싶습니다.”
김필도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스윽!
나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실 가장 안쪽에 푸른색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기가 막히네.”
리시아는 할 말을 잊었다.
저런 식으로 창고를 숨겨두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거기 있을 거예요?”
마법진 앞에 선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창고는 루시안 공자에게 남겨진 곳이잖아요.”
“전엔 센카를 인정해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루시안 공자는 인정해주지 않았죠.”
“그럼 구경만 하세요.”
“헹! 끝까지 인정해 준다는 말은 안 하네.”
리시아는 벌떡 일어나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서자 마법진은 꽉 찼다.
“이동!”
김필도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푸른빛이 세 사람을 감쌌다.
우웅!
잠시 후 세 사람은 새로운 장소에 옮겨져 있었다.
“엄청나네.”
리시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고 한쪽 벽면에 3단의 선반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오망성 형태의 물체 수백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투기갑이었다.
“세어봐.”
김필도는 알마니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알마니는 선반을 따라가며 전투기갑의 수를 헤아렸다.
“1천 기에요. 5백 기는 빛의 전투기갑 페라시온이고 나머지는 어둠의 전투기갑 프라이온이네요. 대부분이 최상급이고요.”
“전투기갑도 등급이 있어?”
김필도는 선반에 놓인 전투기갑 한 기를 들어 올려 보였다.
“하만티움의 순도에 따라 최상급,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눠요.”
“위력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데?”
“착용자에 따라 개인차가 있기는 한데 통상적으로 최상급은 하급에 비해 여덟 배 정도 강하다고 해요.”
“최상급 전투기갑을 걸친 자는 하급 전투기갑을 걸친 기사 여덟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
“이론적으론 그래요.”
“암흑 상단이 보유한 전투기갑은 얼마나 되죠?”
김필도는 리시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 그는 1천 기의 전투기갑이 어느 정도 전력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륙3상의 한 곳인 암흑상단이 보유한 전투기갑의 수를 물어본 것이었다.
“그건 극비사항인데.”
리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극비사항?”
김필도의 오른쪽 눈썹이 휙 치켜 올랐다.
“네.”
“아론 그자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10인 위원회 수장이 알고 있다면 다른 놈들도 다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죠.”
“헹! 그 사람도 모르는 게 있네요.”
리시아는 혀를 쑥 내밀었다.
“그러면 목에 힘깨나 준다는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전투기갑의 대략적인 수는 얼마나 되는데요?”
“보통 가문은 3백 기 이하고, 10대 가문은 1천 기가량 보유하고 있을 거예요.”
“그럼 저건 어느 정도로 봐야 하는 거죠?”
김필도는 전투기갑을 가리켰다.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발탄 제국이나 10인 위원회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각 가문에 비하면 뒤떨어지는 전력이 아니다?”
“네.”
“자네 생각은?”
이번엔 알마니를 보았다.
“엘라하의 이인자 가문이었던 우리 펠라카 가문은 2백 기의 전투기갑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중 최상급은 50기에 불과했고요.”
“최상급 아니라 그보다 더한 전투기갑이 있으면 뭐하니? 입힐 녀석들이 없는데.”
“기사야 차차 구하면 되겠죠. 아무튼 아공간이나 여세요.”
“어째 알마니 자네가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김필도는 알마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잖아요.”
“놈들이면 10인 위원회?”
“앉아서 당한 건 한 번이면 족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번엔 발악을 해보자는 거야?”
“대공 전하께서 하신다면 전 참여할게요.”
“안 한다면?”
“하기 싫어도 지금은 싸울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김필도는 빙긋 웃었다.
“아공간 안 열어주실 거예요?”
“내 아공간에는 여기에 있는 걸 다 집어넣을 정도로 여유가 없어.”
김필도는 창고를 가리켰다.
창고 안에 있는 건 전투기갑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에는 각종 무기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심지어 크로스 보우와 활까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쇠로 된 무기 대부분은 녹이 잔뜩 슬어 있고, 목재로 만든 무기들은 썩어 있었다.
“여긴 창고가 아니라 무기고인가 봐요.”
리시아는 속삭였다.
“그리고 나를 위해 남겨둔 것들이 아니에요.”
“그럼 뭐죠?”
“아직은 뭐라 단언하기 힘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고, 썩는 저런 것들을 남길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정원도 아니겠네요?”
“미치지 않고야 엄청난 거금이 들어가는 이런 구조물을 만들어 정원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겠죠.”
“더 살펴봐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죠.”
김필도는 처음 발을 디뎠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가는 거예요?”
알마니는 김필도의 등에 대고 물었다.
“아공간에 집어넣지 않는다고 해도 이곳에 있는 건 전부 내 거야, 알마니. 잔말 말고 타.”
“알았어요.”
알마니는 아쉬운 얼굴로 전투기갑을 보더니 김필도 옆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