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이동!”
마법진이 발동하고 세 사람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 상태로!”
거실 중앙에 선 김필도는 낮게 소리쳤다.
우웅! 우웅! 우웅!
나직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더니 무기고로 향하는 마법진 옆으로 네 개의 마법진이 더 생겨났다.
그리고 거실 또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욕실 왼편으로 주방과 식당으로 보이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정도면 완전한 가정집이네요.”
변화한 거실을 훑어본 알마니가 말했다.
“일단 더 돌아보자고.”
김필도는 두 번째 마법진에 올랐다.
곧 푸른 광채가 세 사람을 감싸고, 그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식량 창고였다.
식량 창고 또한 상당히 많은 음식이 보관돼 있었던 듯 각 선반에는 부스러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세 번째로 들어간 곳은 갑옷을 비롯한 의복이 보관돼 있는 보급 창고였다. 갑옷이나 의복들 역시 대부분 가루로 부스러진 상태였다. 마법 공간이라고 하지만 흐르는 세월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보급 창고까지 확인한 일행은 거실로 돌아왔다.
특이한 사항은 각 방을 연결하는 마법진이 김필도의 명령에만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여긴 정원이 아니에요.”
김필도는 카판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뭐죠?”
리시아가 물었다.
“요새예요.”
“요새라고요?”
“네. 이 요새의 마지막 주인이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각 무기와 보급품들이 각 창고에 가득 쌓여 있었던 거군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필도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전쟁을 준비한 게 아니라면 그러한 것들을 창고에 넣어둘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듣고 있던 알마니가 물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그래. 아무튼 이곳에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는 식재료를 꺼내놓았다.
“식기류는 꺼낼 필요 없어요.”
식기를 꺼내는 김필도를 알마니가 만류했다.
“저 안에 있는 도자기들 다 쓸 만해요.”
“그럼 포크와 나이프만 있으면 되겠네?”
“네.”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2층엔 올라가 봤어?”
“두 분이 쉬시면 될 거예요.”
“함께 자라고?”
“침실은 두 개니까 함께 자든 따로 자든 알아서 하세요.”
“알았어.”
김필도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한 공간 안에 욕실, 화장실, 거실, 침실이 있는 일체형 구조였다.
거실에는 푹신하게 보이는 짐승 털과, 벽난로 앞으로 좌식 테이블 하나만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다.
“그땐 이런 집은 꿈도 못 꿨는데.”
2층을 둘러본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반지하 단칸방을 구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남들은 아파트나 뭐다 하면서 억억, 댔지만 그때는 화장실도 없었던 그 반지하 단칸방이 최고였다. 얼마나 들떴는지 필녀와 함께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공했네.”
김필도는 혼잣말을 하며 웃음을 흘렸다.
“전 저 방을 사용할게요.”
뒤따라 올라온 리시아가 손끝으로 왼편을 가리켰다.
“그렇게 하세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와, 이인용 소파 , 소파 테이블, 옷장이 놓여 있었다. 거실에 있던 가구들과 마찬가지로 영구 마법이 걸린 듯 상태는 멀쩡했다.
침실을 둘러본 김필도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방으로 들어가는 곳을 빼면 사방이 꽉 막힌 형태였다.
“이 정도에 창이 있어야 맞는데.”
그는 한쪽 벽면으로 걸어갔다.
우웅!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동 커튼이 열리는 것처럼 벽면이 투명해지며 밖이 보였다.
“헐!”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분명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는데, 공중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무래도 비밀의 방으로 가는 통로는 여기에 있겠네. 비밀의 방으로 가고 싶어.”
김필도는 낮게 말했다.
우웅!
그러자 그가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둥근 마법진이 생성됐다.
“리시아 양!”
김필도는 리시아를 불렀다.
“다녀오세요.”
문 앞에 기대선 리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여길 세운 사람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긴 해요.”
“그런데요?”
“여긴 루시안 공자를 위해 남겨진 곳이잖아요.”
“염탐을 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예의도 아닌 것 같고요.”
“이곳은 날 위해 남겨진 것도 아닐뿐더러 난 별로 숨기고 싶은 게 없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할 테니까 그때 대답해주세요.”
“특이하기는.”
김필도는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동!’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푸른 광채가 그를 감싸더니 곧 모습을 감췄다.
“제가 특이한 게 아니라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리시아는 방긋 웃으며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벽난로 옆에는 발화기능을 가진 암탄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암탄은 장작 대신 사용하는 돌로 화력이 좋고 발화점은 낮으며 인체에 유해한 가스가 전혀 나오지 않아, 실내용 벽난로의 연료로 많이 쓰인다.
그녀는 암탄 두 개를 집어 들고는 천천히 비볐다.
마찰이 일어난 부분에서 연기가 나더니 금세 불꽃이 피어올랐다.
리시아는 불이 붙은 암탄을 벽난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불꽃이 약간 더 커지기를 기다렸다가 암탄 다섯 개를 더 올렸다. 불꽃이 커지면서 훈훈한 기운이 일었다.
“좋다…….”
리시아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불을 쬐면서 조금 전 김필도가 모습을 감췄던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솟아 나왔던 마법진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래층 거실이 아니고 이곳에 별도로 만들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장소라는 뜻일 터였다.
그녀가 1층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따라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리시아의 예상대로였다.
김필도는 공중 정원에서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장소와 마주했다.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진들이 중첩돼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은 바닥에 그려진 평면 마법진이 아니라 공중에 새겨진 3차원 마법진들이었다.
“그런데 수명이 다했네.”
마법진을 살피던 김필도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3차원 마법진 다섯 개가 중첩된 부분에 마정석이 놓여 있었는데, 밝은 광채를 뿌려야 정상인데 수명을 다한 전구처럼 희미한 빛만 뿜어내고 있다.
“이건 날 기다린 것도 아니고.”
김필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살려놓고 보자.”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기존에 있던 마정석을 드러내고 리모스에 얻은 하만티움을 얹었다.
마정석이 들어가는 자리는 총 128개였다.
“이제 이것만 넣으면.”
김필도는 마지막 마정석을 드러내고 하만티움을 얹었다.
웅웅웅! 웅웅웅웅웅!
파앗!
마나가 공명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더니 푸른 빛으로 선을 긋는 것처럼 허공에 줄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희미했던 마법진이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수백 개의 마법진은 일제히 강렬한 광채를 토해냈다. 그 광채가 얼마나 밝은지 공간 전체가 푸른색으로 들어찼다.
우르르!
멈췄던 숨을 토해내듯 공중 정원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김필도는 경이로운 눈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마법진들을 바라보았다.
#-반갑다, 후예여.
느닷없이 머릿속으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김필도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마법진 한곳에 고대 복장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홀로그램이었다.
#-나는 리반 프리우스다.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홀로그램 속 노인은 프리우스 가문에서 배출한 마지막 황제, 즉 공중 정원을 만든 사람이었다.
“전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입니다.”
김필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 공중 정원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황제이셨던 아버지가 10인 위원회 회주 앞에서 무릎까지 꿇는 치욕을 당하는 걸 본 후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장차 황제에 오르면 10인 위원회를 없애버리겠다고 맹세를 했다.
나의 계획을 더욱 구체화시켜 준 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르케 다무르 에단베르 일리케 폰 크레디아였다.
“……?”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다르케 뒤쪽의 이름이 스승인 요른의 이름과 같았던 것이다. 즉 다르케 다무르 에단베르 일리케 폰 크레디아는 요른 사부가 돌봐달라고 하였던 드래곤이었다.
#-그녀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했다.
하지만 10인 위원회를 공략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수천의 엘라하와 다르의 호위를 받고 있어, 지상으로부터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장소는 한 곳, 허공밖에 없다.
수천 명을 동시에 은밀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거대한 성채.
공중 정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공중 정원을 대놓고 지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되자마자 실정과 폭정을 일삼으며 내 자신을 망가뜨렸다.
국민들의 원성이 자자할 즈음 공중 정원을 짓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은 공중 정원을 짓고 있는 나를 욕하고 저주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발탄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들을 반드시 없애야 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수시로 연회를 베풀면서 전투기갑을 준비하고, 무기를 숨겼다. 전투기갑을 착용할 기갑 기사와 무기를 들고 싸울 기사들도 양성했다.
그들을 양성한 장소는 제국의 서쪽 끝 펠콘이었다.
국경의 전략 요충지에 기사를 양성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서 기갑기사 1천 명과, 소드 마스터 급에 해당하는 기사 1만 명을 양성하였다.
이제 나는 공중 정원과 함께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이 항해의 끝에 뭔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목숨을 버려가면서 만들어준 이 공중 정원과 함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신이시여! 부디 10인 위원회를 없애는 걸 허락하소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못다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홀로그램은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공중 정원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정원이라면서 수많은 무기를 숨겨두었는지 그 이유도 알게 됐다.
그리고 요른 사부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항해를 시작했다는 건 이 거대한 놈이 움직인다는 건데……. 저 녀석을 써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김필도는 방금 리반 프리우스의 홀로그램이 있던 자리에 놓인 투구를 집어 들었다.
투구는 특이할 게 없는 양동이 형태의 평범한 헬름이었다. 김필도는 헬름을 눌러썼다.
헬름을 쓰고 마나를 주입하자 바로 앞에 그림이 나타났다. 그것은 공중 정원의 조감도였다.
“재미있네.”
김필도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진해졌다.
헬름 안에는 공중 정원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단시간에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는 헬름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이동 마법진에 올랐다.
어느새 어두워진 듯, 거실은 컴컴했다. 벽난로 불빛만 주위를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숙녀를 너무 오래 혼자 두는 거 실례라고요.”
벽난로 앞에서 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어요.”
김필도는 벽난로 앞으로 갔다.
리시아에게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한잔했나 봐요.”
리시아 앞의 좌식 테이블 위에는 포도주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오지 않는 약혼자를 기다리다 보면 술을 마실 수밖에 없거든요. 자요.”
리시아는 김필도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김필도는 그녀 옆으로 앉으며 술잔을 받았다. 그러자 리시아는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정이 넘치네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나야 늘 정이 넘치죠.”
리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필도는 리시아의 시선을 흔연스레 받아 넘기며 술잔을 비웠다.
“포도주가 아니네요?”
적색이기에 포도주인 줄 알았는데, 알코올 도수가 아주 높은 브랜디 종류였다.
“난 그걸 다섯 잔이나 마셨다고요.”
“술이 아주 센가 봐요?”
김필도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이 센 게 아니라 술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있어요.”
“일이라면?”
“글쎄요.”
리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듯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급기야 기우뚱 쓰러졌다.
김필도는 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와락!
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김필도를 껴안고 맹렬하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