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입술이 마주치는 순간 리시아는 혀를 강하게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김필도의 옷을 벗겨 내렸다. 그녀의 손은 마치 모터를 단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였다.
상의를 벗겨내고 하의를 벗기더니 말을 타는 것처럼 올라탔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찢듯이 벗었다.
불빛 속에 터질 듯이 풍만한 몸매가 드러났다. 그녀는 키만 작았을 뿐 모든 것이 컸다.
리시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점점 뜨거워지고 리시아는 다시 거칠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폭풍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둘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상대를 향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김필도는 물론이고 리시아도 이렇듯 상대에게 완전하게 몰두한 적은 없었다.
특히 리시아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잠을 잔다고 해도 지금처럼 능동적으로 행동한 적도 없었다. 늘 수동적이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아론과 관계를 가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론이 원하는 대로 했을 뿐 그녀가 리드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의 손을 불꽃이 이는 곳으로 이끌었다.
둘 사이에는 가식도 없고, 체면도 없었다.
찢듯이 내팽개친 옷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던져버렸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건 김필도란 사내 한 명이었다.
“하아!”
마침내 그의 가슴에 무너져 내렸다.
리시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랑의 여운은 온몸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어쩌면, 당신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리시아는 최면이라도 걸린 듯 중얼거렸다.
제5장 칼베리언의 야망
영주 열다섯 명의 죽음에 이어 충격적인 소문이 펠콘을 강타했다. 그것은 공중 정원의 폭발 소문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중 정원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꽃을 남기며 폭발했다고 하였다. 그 폭발이 얼마나 강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공중 정원이 떠 있던 곳으로 가 호수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텅 빈 허공만 바라보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일부 노인들은 불길한 조짐이라며 혀를 차기도 했지만 공중 정원 폭발 사건은 급변하는 조류에 밀려 금세 잊혀갔다. 바로 급변하는 조류는 다름 아닌 전쟁 준비였다.
#-나 이케이 하다르만은 가이우스 황제께 열과 성을 다해 충성을 다했다. 그건 제군들도 알고 나도 알고 가이우스 황제도 알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나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을 자객으로 했다.
내가 원하는 건 국경의 안정이었다.
파르 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티라늄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물가가 올랐으며 영지민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펠콘 성 너머의 머나먼 숲과 하르카 대습지는 땅으로서 가치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황제는 그곳을 욕심내 파르 족과 전쟁을 하였고, 발탄 제국 국민은 굶주리게 됐다. 이에 나는 충심을 담아 황제께 말했다.
발탄 제국의 미래를 위해 파르 족과 화친을 하자고.
그런데 황제는 나의 충심에 대한 대답을 자객으로 대신했다. 황실의 비밀 조직인 크로를 보내 연회를 틈타 열다섯 명의 영주와 그들의 가족을 살해하였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침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황제와 내통하여 공중 정원으로 크로를 끌어들인 데코니 홀트마하 백작의 목을 쳐 죽은 영주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왜냐면 우리 서로군벌에 자객을 보낸 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만나 열다섯 명 영주와 그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외친 하다르만 백작의 출정식 전문은 서로군벌 전 영지로 전달됐고, 각 영지의 임시 영주들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단순히 영지를 차자하기 위한 영지전이 아니라 서로군벌 전체의 사활을 건 전면전을 위한 준비였다.
서로군벌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수도 테라로 전해졌다.
당연 테라가 발칵 뒤집혔고, 3대 공작가와 5대 후작가의 가주들은 입궁하라는 명령을 받고 급거 황실로 들어갔다.
크레믈 궁 1층 회의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이들 여덟 명은 헬모트 공작가, 이콰라 공작가, 노르탄 공작가의 세 공작과 드보르칸 후작가, 힐리아드 후작가, 크로디아 후작가, 헥사이어 후작가, 트란도르 후작가의 다섯 후작들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50대 중반의 사내가 들어왔다. 소탈한 복장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이 발탄 제국의 황제인 크레믈 디칸 가이우스 황제였다.
“반갑소. 앉으시오.”
여덟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가이우스 황제는 손을 젓고는 그의 자리에 앉았다.
“좋은 일로 얼굴을 봐야 하는데 유감이오.”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차를 가지고 와 황제의 잔에 따랐다.
“어떤 상황이오?”
황제의 시선은 헬모트 공작에게로 향했다.
“서로군벌 수장인 이케이 하다르만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건 나도 들었소. 그런데 정말 서로군벌 소속 영주 열다섯 명이 살해된 거요?”
“영주뿐만 아니라 연회에 참석했던 자들 전부가 살해당한 걸로 보입니다.”
“전부라면?”
“그 연회에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도 참석했습니다.”
“그도 죽었단 말이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다 죽었는데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만 살아남았다는 게요?”
“하인 일부도 살아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열여섯 개 영지를 거느린 대영주가 된 셈이구먼.”
“그렇습니다, 폐하. 그런데…….”
“내가 크로에게 명령을 내렸는지 그게 궁금한 거요?”
“크로가 개입한 건 확실합니다, 폐하. 이미 증거까지 나온 상황입니다.”
“이케이 하다르만 제거 작전은 아주 긴 기간을 두고 조금씩 진행해나가는 작전이었네, 공작. 그렇듯 급하게 처리할 사안이 아니었네.”
“하지만 사건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행위라는 걸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구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리대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순리라면?”
“일단 전쟁을 말려야 할 것 아닌가.”
“후작 작위로 달래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해보시오.”
“그럼 북로군벌과 동로군벌 그리고 남로군벌의 수장들도 승작을 시켜줘야 형평성이 어긋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남로군벌의 델리카슨 백작가는 아이작 가문과 상당히 친분이 두터웠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가?”
“친분이 두터운 정도가 아니라 전대 가주인 베쿠스 델리카슨은 발몬 하이저 아이작 황제와 친구였습니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가?”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도 함께 보잔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공중 정원이 사라졌다고 했는가?”
“사라진 게 아니고 폭발했다고 합니다.”
“폭발?”
“네.”
“사라졌는지 폭발했는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없어진 게 분명하다는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펠콘의 명물이었는데 아쉽구먼. 아무튼 오늘 회의는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합시다. 세세한 사안은 헬모트 공작이 알아서 처리해주시오. 그리고 언제 부를지 모르니까 테라를 떠나지 않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귀족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 회의 때 봅시다.”
“끄응!”
헬모트 공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거대한 저수지도 작은 틈 하나로 무너진다고, 그의 판단으로는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의 반란은 별것 아닌 사건으로 취급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제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시겠소?”
이콰라 공작은 헬모트 공작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일단 변경백들에게 연락을 취해봐야지요.”
“통신실로 갈 참이오?”
“함께 가시겠소?”
“그럽시다.”
“나도 갑시다.”
이콰라 공작에 이어 노르탄 공작이 따라 나섰다.
세 공작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떴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드보르칸 후작을 비롯한 5대 후작가의 가주들이었다.
후작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어떻게 보면 모욕을 당해 화를 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공작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도 갑시다.”
드보르칸 후작은 일행을 향해 말했다.
“정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제2후작가라 불리는 힐리아드 가문의 가주 힐리아드 후작이 드보르칸 후작을 따르며 물었다. 힐리아드 후작이 그라고 말한 사람은 김필도였다.
그가 김필도에 대해 아는 것은 차원 수리공 일원이 돼 문 대륙에 다녀온 큰아들 때문이었다.
김필도에 대한 그의 큰아들의 판단은 ‘공작가의 세 아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자가 공중 정원에서 죽었다는 말이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누구 말이오?”
드보르칸 후작은 모른 척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을 말하는 거지 누구겠소?”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드보르칸 후작은 되물었다.
“후작의 영애인 올가 드보르칸 남작으로 알고 있소이다.”
“올가 말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람이라고 하였소.”
“하면?”
“그런 자가 죽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외다.”
드보르칸 후작은 빠르게 걸었다. 잠시 후 그를 비롯한 다섯 후작은 크레믈 궁을 나섰다.
크레믈 궁을 뒤로한 드보르칸 후작은 고개를 돌려 2층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2층에는 세 공작이 올라간 통신실이 있었던 것이다.
‘잘들 해보게.’
드보르칸 후작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편.
통신실로 들어간 세 공작은 세 변경백에게 연락을 취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북쪽 고칸 성의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에게 연결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쪽 카탄 성의 영주인 페더러 디바스칸 백작과 남쪽의 베쿠스 델리카슨 백작에게 먼저 연결을 시도해서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다시 고칸 성과 연결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받지를 않습니다.”
마법구에 마나를 주입하던 통신 마법사가 헬모트 공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의적으로 받지 않은 게냐, 아니면 사람이 없는 게냐?”
헬모트 공작은 물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황실과 연락을 취하는 핫라인 앞에는 근무자가 상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통신 마법사의 말에 헬모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황제와 직접 연락을 취하는 핫라인에는 근무자를 상주시키고 있다.
공작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백작이 근무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고칸 성의 성주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은 일부러 받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뜻이구려.”
지금껏 지켜보고 있던 노르탄 공작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코스트가 그럴 자가 아닌데…….”
이콰라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 공작 중 고칸 성의 영주인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과 친분이 돈독한 사람이 그였던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헬모트 공작은 이콰라 공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 생각은 그렇소, 헬모트 공작.”
“그랬으면 좋겠소, 공작.”
헬모트 공작은 혼잣말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