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정확하진 않았지만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였던 이콰라 공작의 말은 맞았다.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에게 닥친 피치 못할 사정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검은 피부의 덩치들이었다.
“우리 고칸 성에는 어쩐 일이시오?”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은 굳은 얼굴로 전면에 서 있는 두 명을 보았다. 새카만 전투기갑을 걸치고 2미터에 달하는 대검을 든 자들은 다름 아닌 마족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일반 마족과는 달랐다.
일반 마족의 뿔은 검은색, 붉은색, 녹색, 은색, 황금색인 데 반해 두 마족의 뿔은 흰색이었다.
두 마족은 칼베리언의 부하인 켈러와 헤익스였다.
칼베리언을 비롯한 블러드 데빌단이 바다를 건너 휴도니아 대륙에 도착한 것은 2주 전이었다.
비록 저돌적이고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자 같지만 칼베리언은 머리가 나쁜 자가 아니었다. 그는 좋은 머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신중하고 치밀했다.
휴도니아 대륙에 도착해서 그가 가장 먼저 지시한 일은 약탈이 아니라 대륙 정세 파악이었다. 그 일을 맡은 자는 켈러였다.
켈러는 휴도니아 대륙 상황을 조사하였고, 무려 6천만 명이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칼베리언을 비롯한 마족은 기절할 듯 놀랐다. 설마 인간의 수가 그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움은 금세 희열로 변했다.
6천만 명을 전부 없애는 것은 그 어떤 놀이보다 짜릿한 유희였던 것이다. 과거 없앴던 마족 10만 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날부터 좀 더 효율적으로 많은 수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인간의 피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인간의 호전적인 본성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마침 서로군벌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어 기회도 좋았다. 칼베리언이 북로군벌을 택한 것은 좀 더 큰 전쟁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북로군벌을 장악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과의 대화였다.
“먼저 내가 가져온 선물부터 열어봐라.”
켈러는 이코스트 백작 앞에 내려놓은 상자를 가리켰다. 이코스트 백작은 상자를 열었다.
“으음!”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자 안에는 다섯 개의 머리가 들어 있었는데, 고칸 성 주변 다섯 영지 영주의 머리였다.
곧 이코스트 백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 재미있는 놈이구나.”
켈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머리가 잘린 다섯 영주는 자신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 이코스트 백작은 쏘아볼 뿐 아니라 살기까지 흘리고 있다. 그런데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마족으로 치자면 중급 마족 정도의 기세를 풍겨내고 있었다.
“좋은 일로 온 게 아닌 모양이구려.”
이코스트 백작은 한 걸음 물러나며 검을 뽑았다.
힘을 끌어올리자 그의 금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내 동료가 3백 명이 넘는데 다 상대할 자신 있느냐?”
켈러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3백 명?”
“그렇다, 이코스트. 내 명령 한마디면 오늘 밤 안으로 이곳 고칸 성에 있는 생명체는 전부 몰살을 당한다. 그래도 상관없느냐?”
“나는 고칸 성의 영주…….”
“왜 이렇게 늦느냐, 켈러.”
나직한 호통과 함께 켈러 옆 공간이 열리더니 칼베리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저들은?’
이코스트 백작은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자는 무려 3미터의 키를 가진 최상급 마족이었다. 일반 마족조차 보지 못했던 그가 최상급 마족을 보게 된 것이었다.
“네가 이코스트라는 벌레냐?”
칼베리언은 이코스트 백작을 바라보았다.
“나는 벌레가 아니고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이오.”
“너는 복종과 대항 둘 중 하나만 택하면 된다, 벌레.”
“복종의 대가는 뭐요?”
이코스트 백작은 상대가 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무작정 덤빌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성향을 파악해낼 수 있는 인생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그가 곧바로 복종의 대가를 물은 건 칼베리언의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살아오면서 많은 눈동자를 접했다. 하지만 칼베리언의 눈동자처럼 차갑고 싸늘한 눈동자는 보지 못했다. 아니 차갑고 싸늘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눈동자를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기 외에 타인은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활짝 웃으면서 목을 자를 수 있는 악마의 눈동자였다.
대항 자체가 무의미한 자였다.
“네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겠다.”
“그 대가로 내가 치러야 할 건 뭐요?”
“마음껏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 전쟁만 일으켜주면 된다.”
“인간을 다 죽이면 황제는 누굴 다스린단 말이오?”
“나는 네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했지 황제를 만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다.”
“하면?”
“이번 전쟁이 끝나면 왕국을 유지할 정도의 인간만 남게 될 게다.”
“그,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시오?”
이코스트 백작은 부르르 떨며 물었다.
“천족과 마족이 전면전을 치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번에 대답을 한 자는 켈러였다.
“처,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치른단 말이오?”
이코스트 백작은 경악했다.
그는 단순히 마족들이 유희를 즐기기 위해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너는 서로군벌의 하다르만 그놈이 발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다르만 백작의 뒤에 천족이 있단 말이구려.”
“그렇다, 백작. 이제 결정을 해라. 우린 네가 복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복종하지 않으면 널 죽이고 동로군벌의 페더러 디바스칸을 찾아가면 된다.”
“좋습니다.”
이코스트 백작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휴도니아 대륙에서 천족과 마족이 전면전을 치르게 되면 인간 또한 끼어들 수밖에 없다. 아니 천족이나 마족 중 한 곳과 손을 잡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저들의 첫 방문지가 이곳이란 사실은 재앙이 아니라 행운일 수도 있다.
“앞으로 네가 주인으로 모실 이분은 칼베리언 님이시다.”
“……인사드립니다, 주인님!”
이코스트 백작은 주인이란 말에 약간 멈칫했지만 이내 두 팔과 얼굴을 바닥에 대고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좋아, 이코스트. 지금부턴 너는 나 칼베리언의 대리인이다. 당장 병력을 집결시키도록 해라.”
칼베리언은 이코스트 백작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이코스트 또한 잉여 몬스터의 한 마리다. 하지만 아직은 써먹을 데가 있으니, 지금은 살려줘야 할 터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3백 명이 머물 숙소가 필요하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이코스트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베리언 일행의 숙소가 마련된 것은 2시간 후였다.
그들의 숙소는 고칸 성 오른편에 있는 6층짜리 고성(古城)이었다. 수천 년 전에 지어져 많이 쇠락하긴 했지만 출입문을 비롯하여 천장과 가구들이 덩치가 큰 마족들이 생활하기에 적당했다.
부하들이 숙소를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던 칼베리언은 켈러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칼베리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다크 문이 하늘 가운데 떠 있었다. 이어 시선을 내렸다. 다크 문 때문에 시계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방금 생각난 건데…….”
칼베리언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군단장님.”
“벌레를 밟아 없애는 것보다 노예로 부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 켈러 네 생각은 어떠냐?”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단장님. 문 대륙보다는 이곳 기후가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네.”
“그래도 6천만 명이면 너무 많지.”
“절반 정도만 있으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칼베리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휴도니아 대륙의 지붕.
대륙에서 가장 척박한 곳. 몬스터가 가장 많은 곳. 낮이면 가장 더운 곳. 밤이면 가장 추운 곳. 인간이 살 수 없는 유일한 곳.
프라넬 대평원을 지칭하는 말들은 언급한 것 외에도 무수히 많다. 프라넬 대평원은 그만큼 척박한 곳이었다.
그런 말들이 생겨난 것은 프라넬 대평원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발탄 제국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고, 동서 1천2백 킬로미터, 남북 750킬로미터의 광활한 땅이지만 해발고도는 무려 3천 미터.
인간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
물론 굳이 살고자 한다면 못 살 것도 없지만,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와, 한밤의 혹한, 그리고 이곳 환경에 적응하여 더욱 강인해진 몬스터의 위협을 감수하고, 정착할 간 큰 인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에게는 버려진 땅이 됐다. 인간들이 찾지 않는 땅의 주인은 당연 몬스터가 될 수밖에 없고,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몬스터들의 천국으로 불리게 됐다.
프라넬 대평원의 서쪽 끝.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여섯 명과 이야크 세 마리, 그리고 말 세 마리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김필도 일행이었다.
공중 정원을 나선 김필도 일행은 하다르만 백작 몰래 펠콘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여행을 하였고, 이윽고 휴도니아 대륙의 지붕이라는 프라넬 대평원에 도착한 것이었다.
“길이 여기밖에 없단 말이지?”
김필도는 알마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남쪽이나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기는 한데 한 달에서 두 달은 더 여행할 각오를 해야 해요.”
“이 길로 가는 게 낫다는 거네?”
“상인들도 이곳을 통해 가요.”
“상인들이 횡단하기엔 너무 위험하지 않나?”
“최소한 이곳에는 산적은 없거든요.”
“역으로 말하면 프라넬 대평원은 산적조차도 꺼리는 험한 곳이라는 말?”
“그런 셈이에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에 고대 도시가 있다는 건 무슨 소리지?”
어디서 봤는지 모르지만 프라넬 대평원을 떠올리자 문득 생각이 났다.
“평원 곳곳에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전 잘 몰라요.”
“문 대륙을 떠나온 자들이 맨 처음 정착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어요.”
김필도의 질문에 답을 준 사람은 리시아였다.
“좋은 곳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왜 여기죠?”
“제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잖아요. 아무튼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만 해도 이렇게까지 척박한 곳은 아니었나 봐요.”
“처음엔 좋았는데 점점 나빠졌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리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고대의 도시가 있다는 건 맞군요.”
“수천 년 전 유물인데 있어봐야 알아보기나 하겠어요?”
“그러게요. 그런데 리시아 양도 여긴 처음이에요?”
“네.”
“알마니, 안내해.”
“여기서부터는 이야크만 타고 가야 해요.”
알마니는 말을 이야크 뒤에 묶으며 말했다.
“말은 힘든가 보지?”
“사람을 태우고 가면 얼마 가지 못해서 쓰러지고 말 거든요.”
“그럼 블랙칸 뒤에 타.”
김필도는 블랙칸 뒷자리를 가리켰다.
“거긴 주인이 따로 있는데 제가 앉으면 안 되잖아요. 난 베른과 함께 저 이야크에 탈게요.”
알마니는 리시아의 이야크를 가리켰다.
“나는 자네와 탈 생각이 없네.”
베른은 차가운 눈으로 알마니를 쏘아보았다.
그는 알마니가 자꾸만 김필도와 리시아를 엮으려고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리시아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수록 예뻐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시아 얼굴이 예뻐지는 이유가 김필도 때문인 것 같아서 자꾸만 불안했다.
“나도 뒤에 사내새끼가 타는 게 겁나 싫은데 잘됐네요. 베른은 걸어가세요.”
알마니는 싱긋 웃으며 리시아의 이야크에 올랐다.
‘빌어먹을 놈!’
베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타고 싶으면 뒤에 타세요.”
알마니는 뒷자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