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끄응!”
별수 없었다. 베른은 어기적거리며 걸어가서 이야크에 올랐다.
“앞과 뒤 중에 선택하세요.”
알마니와 베른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뒤에 타면 루시안 공자 등만 보고 가야 하니까 답답할 테니까 앞에 탈게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향해 등을 보이고는 양팔을 쫙 폈다.
“태워달라고요?”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알았습니다, 마담.”
하인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김필도는 리시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운 다음 번쩍 들어 올려 블랙칸의 앞자리에 태웠다.
프릉!
김필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앞에 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블랙칸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뒤에 타면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 거니까 좀 봐줘, 750.”
리시아는 블랙칸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푸르릉!
블랙칸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자식, 미인을 태우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요.”
김필도는 손잡이를 잡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블랙칸에 오르자 알마니는 이야크를 몰았다.
김필도는 이곳으로 오기 전 구한 프라넬 대평원 지도를 꺼냈다. 여행자를 위한 지도였다.
프라넬 대평원의 북쪽에는 이고란드 산맥이 동서로 놓여 있고, 남쪽에는 힐베르크 산맥이 누워 있었다.
이고란드 산맥은 발탄 제국 최북단에 있는 고칸 산맥으로 이어지고, 힐베르크 산맥은 천둥의 성이 있는 루나 북쪽의 왈라크 산맥과 이어진다.
그리고 이고란드 산맥과 힐베르크 산맥의 빙하가 녹아 생성된 세리스 강이 평원 전역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그 강물이 모여들어 평원 중앙에 거대한 호수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호수의 이름이 뉴(New) 호수였다.
길은 3백 킬로미터 지점까지는 북쪽으로 나 있고, 그곳에서 뉴 호수까지는 남쪽으로, 뉴 호수에서 9백 킬로미터 지점까지는 북쪽으로 향하다가 1천2백 킬로미터 지점까지는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세세하게 따지면 엄청 복잡하겠지만 크게 보면 그랬다.
“공중 정원은 어떻게 한 거죠?”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엔진을 바꿨어요.”
“엔진을 바꿔요?”
“그 녀석을 떠 있게 하는 힘은 마정석이거든요.”
“마정석이면 하만티움?”
“내게 질 좋은 하만티움이 좀 있었거든요.”
“공중 정원 같은 거대한 덩치에 마나를 공급하려면 엄청난 순도를 자랑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하만티움을 가지고 있었어요?”
“문 대륙에 다녀왔잖아요.”
“그곳에서 구했다는 말이에요?”
“네.”
“그러면 지금은 투명 마법이 걸려 있겠네요?”
어둠의 벽 안쪽에 있던 모든 건물에 투명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묻는 말이었다.
“아마도.”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 정지해 있어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리시아 자신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공중 정원이 이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럴 거예요.”
“정말 정지해 있다고요?”
“그 큰 놈을 무슨 수로 움직이겠어요?”
“그렇긴 한데…….”
리시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뜨거웠던 밤이 떠올랐던 것이다.
몇 사내를 만났고, 많은 사랑을 나눴지만 그날처럼 완벽한 밤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밤 기억은 다른 모든 기억을 잡아먹고 화인처럼 머릿속과 몸에 새겨졌다.
이젠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밤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어쩌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에게 깊이 빠져들었는지도.
“무슨 생각하세요?”
“아, 아니에요. 그런데 저건 뭐죠?”
퍼뜩 정신을 차리자 하늘에 떠 있는 뭔가 보였다. 그것은 작은 점처럼 보였는데, 상당히 많은 수였다.
“뭐가요?”
“저거요.”
리시아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알마니!”
김필도는 앞에서 가고 있는 알마니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저게 뭐지?”
“저거… 이런 젠장!”
알마니는 당혹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뭐냐니까!”
“와이번, 아니 그리핀(Griffin)이에요.”
“와이번과 함께 2대 공중 몬스터라고 불리는 그 그리핀?”
“하늘의 하이에나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보다 활 쏠 줄 아세요?”
알마니는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아니?”
“활은 내가 쏠 줄 알아요. 오픈!”
리시아는 아공간을 열어서는 활과 화살을 꺼냈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보았다.
“자리를 바꾸자고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리핀은 앞에서 오는데 뒤편을 바라보면 공격이 불가능하잖아요.”
“지금은 앞에서 오지만 잠시 후면 뒤에서 쫓아오게 될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리시아가 몸을 일으켜 뒤편으로 앉았다. 전에 이카렌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 또한 뒤쪽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김필도는 가죽 끈으로 그와 리시아를 하나로 묶었다.
“익숙하네요?”
“전에 해본 적이 있거든요.”
“누구와요?”
“지금 리시아 양 자리엔 이카렌이라는 마족이 앉았어요.”
“이름만 들으면 여자 같네요.”
“여자 맞아요.”
“전에 말했던 마족 친구?”
“네.”
“루시안 공자와 저도 친구 사이죠?”
“어떤 의미의 질문이죠?”
“아직 연인이라고 하기엔 만난 기간이 너무 짧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럼 그 마족과도 잤어요?”
“풋!”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블랙칸의 고삐를 잡았다. 그리핀이 공격해 오는 걸 감지한 듯 블랙칸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왜 웃는 거죠?”
“그녀는 마계10군단 군단장이에요.”
“마계10군단 군단장이라고요?”
“마족 부하가 1천 명이나 있죠. 마계 신검의 하나인 발콘의 주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자잖아요.”
“그만 노닥거리고 가요, 대공 전하! 이럇!”
앞에 있던 알마니가 이야크의 고삐를 힘차게 휘둘렀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알마니와 쿠다가 탄 이야크가 전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달려가는 방향은 직선이 아니었다. 좌우로 갈라지며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리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그재그로 가야 해요.”
김필도의 의문을 눈치챈 리시아가 소리쳤다.
“임자 있는 여자예요.”
“네?”
“달려, 750!”
쿠워워워워워!
블랙칸은 광포하게 포효하며 앞발을 쳐들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그러고는 전방을 향해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제6장 누구냐 넌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세 마리의 이야크가 벌판을 질주했다.
이야크가 달려가는 뒤편에는 뿌연 흙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직선이 아닌 지그재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는 상당했다.
쇄애액! 쇄애액!
그런 이야크를 가공할 속도로 쫓는 몬스터가 있었다. 매가 먹이를 쫓듯 지상으로 쏘아져 가는 그것들은 사자 몸통에 독수리 머리를 가진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의 크기는 사자만 했다.
카아아아!
강렬한 울음이 그리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무서운 속도로 이야크를 향해 쏘아져 갔다.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위쪽에서 아래로 쏘아져 가는 놈도 있고, 수평으로 날아가는 놈도 있었다.
“차아!”
김필도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의 이야크 창이 허공에 수많은 점을 남겼다.
캑! 캑! 캑! 캑!
김필도를 향해 날아오던 그리핀 네 마리가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오른편으로 틀어요.”
리시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필도는 오른발을 당겼다. 그의 오른발 발목에는 블랙칸의 고삐가 묶여 있었다. 오른편 고삐가 당겨지자 블랙칸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블랙칸이 방향을 트는 순간 세 마리의 그리핀이 스치듯 블랙칸을 지나쳐 갔다.
바로 그때 리시아는 연거푸 시위를 당겼다.
세 대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그리핀 세 마리의 머리를 꿰뚫었다.
캑! 캑캑!
나직한 비명과 함께 날아가던 그리핀들이 뚝 떨어졌다.
“야생이라고 보세요?”
김필도는 왼발을 뒤로 당겨 왼편으로 방향을 틀며 소리쳐 물었다.
“그리핀요?”
리시아는 시위를 놓으며 되물었다.
“네.”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방향을 트는 거나, 조를 짜서 공격하는 걸 보면 보통 그리핀은 아닌 것 같아요.”
“야생이 아니라면 누군가 우릴 노리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우린 죽은 걸로 알려졌는데 누가 노린다는 거죠?”
“그러게요. 아무튼 프라넬 대평원을 건너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차앗!”
또다시 김필도의 이야크 창이 허공을 찌르자 그리핀 네 마리가 머리가 부서진 채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캑!
그때 뒤편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이야크 뒤에 묶인 채 쫓아오던 말 한 마리가 그리핀에 공격당해 목이 꺾여 죽은 것이었다.
죽은 말을 끌고 가게 된 블랙칸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열 마리가 날아와요, 루시안!”
리시아는 정신없이 활시위를 놓으며 소리쳤다.
“오픈(Open)!”
김필도는 급하게 세이프 벨트를 해제하고 리시아의 몸과 묶었던 가죽 끈을 풀었다.
툭!
그 사이에 말을 끌고 오던 고삐가 끊어졌다.
캑!
속도가 나려는 순간 또 다른 말 한 마리가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전 말이 죽었을 때와는 달랐다. 블랙칸도 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투마가 목이 꺾여 쓰러지자마자 전보다 더욱 강하게 지면을 찼다.
전투마와 블랙칸을 이어주던 고삐는 금세 끊어졌다.
하지만 이미 두 마리의 그리핀은 블랙칸의 엉덩이 바로 위쪽에 도달했다. 그리핀들은 10센티미터에 달하는 발톱을 앞세우며 가공할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핀의 목표는 블랙칸의 엉덩이와 리시아였다.
“루시안!”
“차앗!”
김필도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그때까지도 김필도는 무게 조절기를 이용해서 15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블랙칸도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150킬로그램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150킬로그램의 부하가 사라지자 블랙칸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물론 최고 속도로 달리던 중이라 그 차이는 미세했다. 그러나 그 미세한 차이가 그리핀의 발톱으로부터 블랙칸의 엉덩이와 리시아를 구했다.
리시아는 황급히 센카를 착용했다. 맨몸으로는 무차별하게 공격해 오는 그리핀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탓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김필도를 보았다.
슈캉!
김필도의 양쪽 허리춤에서 백색 광채가 쏘아져 나와 전면 공간에 차가운 광채를 남겼다.
스악!
차가운 소성에 이어 네 조각으로 분리된 그리핀 두 마리가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척!
김필도는 바닥으로 내려섰다.
파악!
김필도가 그 자리에서 서자 블랙칸 또한 우뚝 멈췄다.
“놈들이 물러가요, 대공 전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몸을 돌려 전면을 바라보았다. 알마니의 말처럼 그리핀들이 빠르게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김필도는 블랙칸 옆으로 걸어갔다.
“끝난 걸까요?”
김필도가 다가가자 리시아가 물었다.
“글쎄요. 몬스터가 먹잇감을 놔두고 물러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알마니 자네 생각은 어때?”
김필도는 이야크를 몰아 옆으로 다가온 알마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불러서 간 거예요.”
“훈련받은 그리핀이라는 거야?”
“지금은 모르겠지만 전엔 빅 소드(Big Sword)에서 그리핀을 키웠어요.”
“뭐 하는 자들인데?”
“3천 명의 용병을 거느린 제국 최강 용병 조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