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대륙 최강의 용병 조직이 우리를 노린다고?”
“지금으로 봐서는 그런 것 같아요.”
“용병 조직이라면 청부를 받아야 움직이는 자들이지?”
“네.”
“그렇다면 우리가 펠콘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청부가 이루어졌다는 거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우린 펠콘 성에서 죽은 걸로 돼 있잖아. 죽은 자를 청부하는 바보는 없을 거 아냐.”
“그러면 빅 소드 용병들은 대공 전하와 리시아 양이 죽은 걸 모르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우리가 오자 나타났다는 건가요?”
“아니면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데 며칠만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우리가 걸려든 걸 수도 있어.”
“조금만 더 늦게 나올 걸 그랬네요.”
알마니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그랬더라면 놈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잖아요.”
“재수 없는 건 우리가 아니라 빅 소드 놈들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루만, 아니 몇 시간만 빨리 철수를 했더라면 우릴 만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대공 전하 말씀은?”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빅 소드 놈들이 그 짝이라는 거야.”
김필도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완전 돌았네요.”
알마니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 빅 소드 소속 용병의 수가 3천 명가량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수의 용병을 거느린 조직의 표적이 됐다고 하였는데, 대공은 재수 없는 쪽은 빅 소드라고 한다.
김필도의 말에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람의 전사 쿠다와 아베다였다.
두 사람 중 특히 쿠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는 김필도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에 가게에서 검을 뽑으라며 큰소리를 쳤던 것도 대공이라는 신분을 믿은 허세라고 여겼다.
그런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김필도는 이미 최강의 검사였다. 더불어 검술보다 더 대단한 건 배짱이다.
저런 배짱은 대공이라는 신분을 믿고 나오는 만용이 아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용기다.
문득 그를 ‘폭풍의 전사’로 선택한 정령의 방패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다는 시선을 들어 김필도를 보았다.
김필도는 리시아 옆에서 걷고 있었다. 문득 김필도와 리시아가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다의 시선을 느낀 김필도가 고개를 돌렸다.
“왜?”
“아닙니다.”
쿠다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친 게 아니가 봐요, 루시안.”
그때 블랙칸 위에서 리시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시아 말대로였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도망쳤던 그리핀이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과 대형이 달랐다.
백여 마리의 그리핀은 하늘에 떠서 날아오는 중이고, 그와 비슷한 수의 그리핀은 걸어오는 중이다.
하늘과 땅, 양쪽에서 협공을 가할 모양이었다.
“땅은 내가 맡을게.”
김필도는 그 자리에 멈췄다.
“나도 함께해요.”
리시아는 이야크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아니에요, 리시아 양.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은 전부 하늘을 맡아주세요.”
“혼자서 괜찮겠어요?”
리시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 급하면 갑옷을 꺼내 입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정말 그거 가지고 있어요?”
문득 공중 정원에서 천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헬만이라고 하였던 천족은 헤를리온이 어떠한 위력을 지녔는지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참는다고 했었다. 그 말은 곧 김필도에게 헤를리온이 있다는 뜻이 된다.
“어찌 됐든 내가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역할 분담을 하자고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베른, 쿠다!”
고개를 끄덕인 리시아는 두 사람을 불렀다.
“네, 가주님!”
“하명하십시오, 대족장 님!”
베른과 쿠다는 동시에 소리치며 리시아를 보았다.
“중앙은 비우고 왼편으로 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이야크를 몰아 왼편으로 이동했다.
캬아아아!
바로 그때 전방에서 섬뜩한 외침이 들려왔다.
캬아아아!
캬아아아!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이어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 걸어오던 그리핀들이 속도를 내며 이편을 향해 쏘아져 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심하세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향해 소리치며 오른편으로 이야크를 몰아갔다.
“리시아 양도 조심하세요.”
김필도는 인사를 하고는 전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핀들은 베른 일행과 리시아를 쫓아 흩어지지 않고 처음 대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날아오는 녀석들 대부분은 리시아에게 집중돼 있다.
“리시아와 나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전부 여섯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건 목표가 그들이란 뜻이다.
“청부한 놈들은 10인 위원회고.”
김필도는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캬아아아! 캬아아아!
두두두두! 두두두두!
김필도가 도망치는 걸로 생각한 그리핀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내달렸다. 백여 마리의 그리핀 뒤편으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2백여 미터를 쉬지 않고 내달리던 김필도가 우뚝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는 리시아가 있는 곳을 가늠해보았다. 리시아 일행과 떨어진 거리는 1천 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이 정도면 영향을 주지 않겠네.”
그는 양손에 든 도를 지그시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그리핀들을 바라보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미넴의 ‘Kill you’였다.
'Kill you'의 강렬한 사운드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슈아악!
김필도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됐다.
그가 나아가는 속도는 달려오는 그리핀보다 더 빨랐다. 그는 달려가면서 두 도를 역수로 쥐었다.
캬아아아! 캬아아아!
두두두두! 두두두두!
‘Kill you’의 강렬한 사운드 속으로 그리핀의 울음소리와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나쁘지 않네.”
김필도의 입가에 방긋 미소가 맺혔다.
“차앗!”
그리핀 앞에 선 그는 양팔을 번갈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른손과 왼손에 쥔 도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커다랗게 곡선을 그렸다.
설풍이 있는 오른편에서 달려오던 그리핀은 잘려 나갔고, 단도가 있는 왼편으로 달려오던 그리핀은 몸통이 쩍쩍 갈라져 죽었다.
캑! 캑캑캑! 캑캑캑! 캑캑!
털썩! 털썩! 털썩! 털썩! 털썩!
그리핀이 내지르는 비명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잘려 나간 그리핀의 머리가 도미노처럼 허공으로 떠오르고, 붉은 액체가 허공을 붉게 물들인다. 그리고 죽은 그리핀이 쓰러지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척!
그리핀 중앙에 기다란 길을 만들고 빠져나온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그리핀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 그리핀들 또한 김필도를 향해 돌아서는 중이었다.
“크아아아!”
김필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를 번쩍 쳐들며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러고는 그리핀들을 향해 내달렸다.
광속의 바람 라콰가 펼쳐지고,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캬아아아! 캬아아아!
그리핀 역시 김필도와 다르지 않았다. 동료의 피에 잔뜩 흥분한 그리핀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차앗!”
김필도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설풍이 허공을 가리고, 단도가 뒤를 따랐다. 그리핀의 머리가 둥실 떠오르고, 쩍 갈라진 허리에서 내장이 우수수 쏟아진다. 찌르고, 베고, 찍고, 걷어 올리고. 설풍과 단도가 허공에 백색 광채를 남길 때마다 그리핀은 시체로 나뒹굴었다. 두 번의 칼질은 없었다. 그의 검법은 한 번에 살과 뼈를 자르는 일격필살이었다.
좌충우돌, 종횡무진.
“크아아아!”
김필도의 입에서 광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그리핀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하아아!”
광포한 외침을 내지른 사람은 또 있었다.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리시아였다.
그런데 리시아가 있는 위치는 블랙칸 위가 아니라 지상에서 30미터 높이의 상공이었다. 전투기갑 센카를 걸친 그녀는 데쓰 와이어에 몸을 맡긴 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데쓰 와이어의 한쪽 끝이 감겨 있는 곳은 그리핀의 목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리핀을 이용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핀들은 작은 동체의 리시아를 먹잇감 정도로 생각한 듯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리시아 곁으로 접근한 그리핀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10미터 앞에 이르면 어김없이 투명한 줄이 날아와 목에 감기고, 머리가 뚝 떨어졌다.
“헉!”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목을 잘라낸 리시아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가 있는 곳은 지상에서 40미터 높이였던 것이다.
한 마리 정도는 남겨둬야 했는데, 흥분한 나머지 전부 없애버린 것이었다. 아니 없앤 건 좋은데 아래로 내려가는 길마저 없애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아플 텐데.”
리시아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아무리 전투기갑을 걸쳤다고 해도 4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면 충격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눈을 감을까? 아니면 비명을 지를까? 아니면 그냥…….”
“뭐 해요?”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시아는 시선을 들었다. 저쪽 후미에서 김필도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김필도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날고 있는 기분이 어때요?”
“날고 있는 기분이라고요?”
“지금 날고 있는 거 아니에요?”
“네?”
리시아는 깜짝 놀라 자신을 보았다.
“……?”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아래로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허공에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그녀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매립형 목걸이 때문이 아닐까요?”
“바람의 심장?”
리시아는 가슴 사이를 바라보았다.
“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반쯤 묻혀 있던 바람의 심장은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짙은 초록색 광채를 뿌려대고 있었다.
“헉!”
문득 리시아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보석 한가운데 녹색 눈동자 하나가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실레카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사념이 흘러 들어왔다.
“맙소사.”
리시아는 넋을 지경이었다. 실레카는 다름 아닌 바람의 정령왕이었다.
-네가 지금 날 수 있는 건 내 힘 덕분이다.
-내가 당신의 힘을 사용한다고?
리시아는 물었다.
-지금 당신이라고 했느냐?
-난 헨 족의 족장이에요, 실레카.
-페어리가 아니고 헨 족이라고.
-페어리의 피를 이은 건 맞아요. 더불어 헨 족의 피를 잇기도 했어요.
-네가 페어리라면 나 실레카의 종이다!
휘이익!
리시아가 차고 있던 목걸이와 귀고리 반지에서 강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리시아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바람을 머금은 옷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난 당신의 종이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에요, 실레카.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페어리의 피를 이었지만 페어리가 아니라 인간이고요. 그리고 정령이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계약이라는 절차가 필요해요.
-나와 계약을 하고 싶다는 말이냐?
-계약은 내가 정한 게 아니고 자연이 정한 인과율의 하나예요. 그리고 난 당신과 계약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리시아는 매몰차게 말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내려가야겠다고 생각을 하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