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뭐예요, 그게?”
아래로 내려온 리시아는 김필도를 보았다.
그의 온몸은 그리핀의 피로 범벅이었다. 피가 묻지 않은 유일한 곳은 두 자루의 도를 틀어쥐었던 손바닥과 두 눈이었다.
“녀석들이 선지를 많이 가지고 있더라고요.”
“선지가 뭔데요?”
“피 말입니다. 그런데…….”
김필도는 리시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중에 말해드릴게요.”
리시아는 양팔을 활짝 펴며 김필도에게 등을 보였다.
블랙칸에 타고 싶다는 뜻이었다.
“알았습니다.”
김필도는 리시아의 허리를 잡고 위로 던져 올렸다. 그러고는 그도 블랙칸에 올랐다.
“알마니!”
“말씀하세요, 대공 전하.”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두 시간 정도 가면 노천탕이 있어요.”
“노천탕?”
“지도에는 온천이라고 돼 있네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알았어요.”
“이럇!”
알마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른은 고삐를 휘둘렀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곧 알마니와 베른이 탄 이야크가 달려 나갔다.
“쿠다, 따라와!”
김필도는 쿠다를 향해 소리치고는 알마니와 베른이 탄 이야크를 쫓아 달렸다.
“네 생각은 어떠냐?”
쿠다는 빠르게 달려가는 블랙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베다에게 물었다.
“그분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아베다가 말한 그분이란 바람의 정령왕 실레카였다.
“힘을 느꼈느냐?”
“지금 상황에서 실레카 님은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베다는 말을 끊고 쿠다를 바라보았다.
“소멸시켜야 하겠지?”
“아직은 아닙니다. 실레카 님이 좀 더 많은 부분을 장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뭐 해!”
그때 멀리서 김필도의 외침이 들려왔다.
“가자.”
“그러죠.”
쿠다와 아베다는 이야크에 올라 김필도 일행을 쫓아 달렸다.
“저자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수신호위의 임무는 실레카 님이 완전한 각성을 이룰 때까지 본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 임무가 끝나면 당연히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문제는 수호방패가 그자의 몸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는 거지요.”
“그게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실레카 님이 완전한 각성을 이루면 제거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럇!”
쿠다는 강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쿠억!
두두두두! 두두두두!
이야크는 낮게 울음을 토해내고는 질풍처럼 내달렸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이야크를 탄 채 야트막한 구릉 위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두 사람이었다. 2미터에 육박하는 두 사람의 어깨에는 두 핸드 소드의 손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회색 늑대 할케인과 검은 표범 이볼트란 자로, 할케인은 빅 소드의 부단장이고 이볼트는 할케인의 부관이었다.
“저 광경이 믿어지느냐?”
할케인은 그리핀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벌판을 가리켰다.
“그리핀 3백 마리를 없애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볼트는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핀 3백 마리와 용병 1천 명이 출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내전을 치르고 있는 다센 공국으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단장 할케인이 멈춘 곳은 이곳 프라넬 대평원이었다.
하도 궁금해서 부단장에게 없애야 할 자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청부 금액에 맞춰 출병을 했을 뿐이다.’
부단장인 할케인이 해준 말이었다.
그 말은 곧 그리핀 3백 마리와 1천 명의 용병은 강한 어떤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청부한 측이 그 정도를 요구하며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라는 의미였다.
즉 청부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출병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전에 목표물을 보았다.
목표물은 사람 여섯 명, 이야크 세 마리, 말 세 마리였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런 자들을 없애기 위해 그리핀 3백 마리와 1천 명의 용병이 출병한 걸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리핀 3백 마리의 몰살이라는 믿어지지 않은 결과로 나타났다.
특히 그리핀 백여 마리를 혼자서 없앤 자의 검술과 허공을 날아다니며 그리핀의 목을 잘라낸 여자의 기술은 소름 끼치다 못해 두려움마저 일 정도였다.
그제야 청부자들이 왜 그렇게 엄청난 금액을 지불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굽니까?”
이볼트는 할케인을 보며 물었다.
“검 두 자루를 든 사내를 말하는 거냐?”
“네.”
이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다.”
“……?”
이볼트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
차원 수리공의 수장이 돼 문 대륙에 다녀온 것 때문에 요즘 들어 간혹 거론되는 이름이긴 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부모를 잘 둔 덕에, 아니 외조부를 잘 둔 덕분에 대공이 된 무늬만 귀족이라는 게 전부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기사단도 없고, 하인도 없고, 검술도 없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더 많은 그가 청부 대상이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리핀 3백 마리 중 150마리 정도가 그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아니 경악할 일이다.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
놀라긴 할케인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사흘 전에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단장은 사흘가량을 더 있으라고 하였다. 청부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쉽게 말하면 빅 소드는 제 할 일을 했으니까 돈을 돌려줄 수 없다는 말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오늘까지 사흘을 보냈고, 내일은 철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과 그의 일행이 프라넬 대평원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3백 마리의 그리핀이 몰살을 당했다.
“본부에 보고해라!”
“뭐라고 보고합니까?”
“보고는 늘 사실이어야 한다. 주관이 가미돼서도 안 되고 과장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보고해라. 저 광경도 보여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보고는 뉴 레이크에서 하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부단장님.”
이볼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이야크에서 내렸다.
“도대체…….”
할케인은 김필도 일행을 삼킨 벌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누구냐, 넌?”
할케인은 두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얼마 전 보았던 광경이 아직 눈에 선하다. 피를 뒤집어쓴 채로 그리핀을 향해 돌진하던 그 모습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광경보다 충격적이었다. 아니 아름다웠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발탄이 재림하여 적을 향해 달린다면 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너는 죽는다.”
할케인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제7장 각성의 땅
일행이 노천탕에 도착했을 땐 주위는 이미 어둠에 점령당한 후였다. 하늘에 달이 떠 있긴 했지만, 다크 문이라 흑백 사진 속의 달처럼 형태만 흐릿했을 뿐 세상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상단이 세운 건 아닌 것 같은데…….”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물어져가는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엔 꽤 큰 성이었던 모양이다. 중간 중간 무너진 성벽의 폭은 무려 6미터에 달한다.
성벽의 폭이 6미터라는 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외부의 적이 6미터 폭의 성벽을 세워야 할 만큼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성의 주인이 그런 규모의 성벽을 세울 정도로 강한 권력을 지녔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주위에 노천 온천이 있다면 권력자에게는 최상의 자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두 가지 다일지도 모르겠네.”
강한 적과 강한 권력을 지닌 자가 이곳의 주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대의 성인데 상단의 쉼터가 된 것 같아요.”
리시아는 성벽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흙으로 쌓아 만든 화덕 10여 개가 성벽에 면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많은 수가 한꺼번에 쉬었다는 증거였다.
“난 물을 찾아볼게.”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고 주위를 살폈다.
우물은 화덕이 있는 곳에서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는 우물이었다. 우물 옆에는 여물통 형태의 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야크를 비롯한 말에게 물을 먹이는 물통이었다.
블랙칸에서 내린 그는 우물물을 퍼 올려 물통에 부어주었다. 목이 한참 말랐던 듯 블랙칸은 물통으로 다가가 물을 마셨다.
“제가 할게요.”
이야크를 몰고 온 알마니가 김필도의 손에서 물통을 빼앗았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불 피우고 저녁이나 준비해.”
“저녁은 베른과 쿠다가 준비하고 있어요.”
“할 줄 안대?”
“아니까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알마니는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물통에 부었다.
“맛없으면 네가 책임질래?”
“저도 식순이에서 해방되고 싶어요, 대공 전하. 그래도 한때 크로 대원이었다고요.”
“이야크에게 물과 건초를 주는 대공도 있는데 밥 좀 하는 거 가지고 그렇게 생색내고 싶어?”
“난 디자이너라고요,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뭔지 모르세요?”
“최고의 디자이넌 줄 알아.”
“알면…….”
“그러니까 가서 밥 해.”
“끙!”
알마니는 김필도를 노려보더니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가 가고 나자 김필도는 물을 길어 물통에 부어준 후 이야크들이 물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행 근처의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매놓고 아공간에서 건초를 꺼내 녀석들 앞에 놓아주었다.
푸릉!
향긋한 건초 냄새에 기분이 좋아진 듯 블랙칸은 낮게 웃었다.
“많이 먹어.”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을 가볍게 쓰다듬어주고는 자리로 갔다.
“메뉴는 뭐야?”
김필도는 모닥불 가로 앉으며 물었다.
“쇠고기 등심 스튜와 빵 그리고 공중 정원에서 가져온 술이에요.”
“밥은?”
“밥이 뭔데요?”
“내가 안 가르쳐줬어?”
“제가 대공 전하로부터 배운 건 역한 냄새 나는 찌개, 더럽게 매운 찌개, 고춧가루하고 돼지고기를 넣고 삶은 거지같은 찌개밖에 없네요.”
“정말 그것밖에 안 가르쳐줬어?”
“네.”
“창고 안에 쌀 있어?”
“밀가루는 잔뜩 들어 있지만 쌀은 없어요.”
“그럼 다음 시장에 갔을 때 쌀 한 가마만 사놔.”
“한 가마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죠?”
“40킬로그램이야.”
“알았어요. 자요.”
알마니는 스튜를 덜어 빵과 함께 김필도에게 건넸다.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좌식 테이블을 꺼내고 스튜가 담긴 그릇과 빵을 놓았다.
“그건 뭐죠?”
다른 사람의 스튜를 담던 알마니가 김필도가 꺼내 놓은 좌식 테이블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야영을 한다고 해도 밥은 인간답게 먹고 싶어.”
김필도는 스푼으로 스튜를 떠 입으로 가져갔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좌식 테이블을 꺼낸 이유가 아니라 좌식 테이블의 재료가 뭐냐는 거예요.”
“알마니 자네가 생각하는 그거야.”
“그러니까 그 테이블이 하만티움이란 말이에요?”
“순도는 90퍼센트 이상일걸?”
“캑!”
알마니는 국자를 떨어뜨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비단 알마니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순도 90퍼센트가 넘는 하만티움이란 말에 질겁했다. 화폐로 사용되는 금보다 더 비싼 금속으로 식탁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원래 그렇게 부자였어요?”
알마니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가진 게 돈뿐이야.”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식사를 했다.
“어떤 놈은 돈만 빼고 나머진 다 있는데 대공 전하는 그 반대네요?”
“아무것도 없는데 돈이라도 많아야지.”
“제 그릇도 놔도 되죠?”
알마니로부터 받은 스튜 그릇을 놓으며 리시아가 물었다.
“벌써 놨으면서 뭘 물어요.”
“풋! 그런데 하만티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 더 맛있어요?”
“맛은 알마니가 결정하는 거지 테이블이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걸로 테이블을 만들까요?”
리시아는 김필도가 테이블을 문 대륙에서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만티움이 남아돌거나, 돈이 아주 많거나, 권력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겠죠.”
“과시용이란 말인가요?”
“하지만 이건 과시용이 아니에요.”
“그럼?”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부모가 있었어요. 이제 몇 년 후면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아내가 덜컥 임신을 해버린 거예요. 문제는 부부의 죽음을 늦출 수가 없다는 거고, 자식을 길러줄 이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부부는 마법 공간을 만들기로 해요. 그들이 있던 곳의 한 달을 외부 세계의 1년으로 세팅한 거죠. 그런 다음 태어난 딸이 사용할 가구를 만들기 시작해요.”
“그럼 이 테이블은 그 딸을 위해 만들었다는 건가요?”
“불행히도 그 딸은 수천 년의 수명을 지녔거든요.”
“수천 년 동안 원래 상태를 유지하는 가구를 만들려면 재료는 하만티움밖에 없다는 거군요.”
“맞아요.”
김필도는 부지런히 식사를 했다.
스튜 한 그릇과 빵을 먹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