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어디 가세요?”
“아직 씻지 않았다는 사실이 막 떠올랐거든요.”
김필도는 성벽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안 공자.”
리시아는 멀어지는 김필도를 불렀다.
“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딸을 위해 하만티움 테이블을 남긴 사람이 누구죠?”
“그분은 내 검과 이름이 같아요.”
“헬칸(Hell Kan).”
리시아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식사를 하다 말고 알마니가 물었다.
“그 테이블을 만든 이가 헬칸이란 말이야.”
김필도는 턱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헬칸이 누군데요?”
알마니는 헬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아니 인간들 중 헬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 대륙과 전 종족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부족의 부족장 이름이야.”
대답은 김필도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헬 부족의 부족장이 헬칸이라는 거예요?”
“그들은 원래 철족이라 불렸어. 철족은 대장간 종족이었고. 그들은 다섯 종족의 생필품을 만들어 공급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기를 만들어주기 시작한 거야. 그 무기 중에는 전투기갑도 있어.”
“전투기갑을 만든 자들이 철족이란 말이에요?”
“물론 전투기갑을 설계한 자들은 다섯 종족이야. 하지만 제작을 위해서는 설계도를 넘겨야 하잖아.”
“철족은 다섯 종족의 전투기갑을 전부 습득할 수 있었겠군요.”
“맞아. 그런데 전투기갑을 비롯한 마법 무구는 지금까지 해왔던 단순한 방식으로는 만들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마법을 익히게 돼. 하지만 그들의 마법은 보통 마법과는 달라. 보통 마법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펼치지만, 그들의 마법은 효율적으로 작업을 하기 위해 창안됐기 때문에, 전부가 근거리에서 펼쳐야 해. 쇠를 녹이고, 망치질을 하고, 하만티움을 녹이는 일련의 과정에 마법이 동원돼.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축적된 노하우는 체계를 가진 마법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실전 마법이야.”
“일반 마법과 실전 마법의 차이는 거리에 있단 말인가요?”
“가장 큰 차이가 그래.”
“그런데 철족이 어쩌다 헬이 된 거죠?”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리시아였다. 고대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녔지만 헬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체계를 갖춘 실전 마법과 다섯 종류의 전투기갑을 제작했던 노하우가 합쳐지면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어떤 문젠데요?”
“신갑이라고 부르는 헤를리온이 탄생한 거예요.”
“아!”
리시아는 탄성을 내뱉었다. 신기, 또는 신갑이라고 부르는 헤를리온. 그 전투기갑이 그렇게 탄생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럼 그 헤를리온 때문에?”
리시아는 김필도를 보았다.
“맞아요. 철족이 헤를리온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다섯 종족은 전쟁의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헤를리온을 탈취하기 위해 철족을 공격하게 돼요. 천족, 마족, 인간, 드워프, 엘프 전사가 동원된 최초의 합동 작전이었지.”
“…어떻게 됐는데요?”
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철족 20만 명이 죽고 헬칸은 심장을 찔려 죽었어요.”
“하지만 헤를리온은 찾지 못했겠지요?”
“맞아요. 그리고 1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가요?”
“심장이 찔려 죽었다던 헬칸과 헬이라고 부르는 5천 명의 결사대가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그들은 가는 곳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겨두지 않고 몰살을 시킨 거예요. 다섯 종족은 그들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헬칸과 헬이 강한 것도 있었지만 1만 년 동안 전쟁을 치른 다섯 종족이 너무 약해져 있었어요. 결국 다섯 종족은…….”
“문 대륙에서 탈출을 시작했군요.”
“맞아요. 대대적인 엑소더스였죠. 그들은 탈출 시간을 벌어줄 결사대를 헬칸과 헬에게 보내고 탈출을 했어요. 리모스에는 당시 최강의 검사 열 명과 마지막 결사대 1천 명이 남았고요. 그들은 먼저 보냈던 결사대가 철족을 막아주길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지만 결사대마저도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어요. 결국 철족의 족장 헬칸과 그의 아내이자 몬스터의 왕인 하이 오드 카라는 리모스 앞에 나타났어요. 이번에는 1천 명의 결사대가 둘을 막으러 나갔죠.”
“그들도 당했군요.”
“아무도 그 둘을 막지 못했어요. 리모스에 남았던 열 명의 절대 검사도 죽고, 문 대륙에서 두 발로 걷는 생명체는 모습을 감추게 돼요.”
“그렇게 된 거였군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비로소 다섯 종족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게 다섯 종족은 헬칸과 헬이 쫓아올까 봐 벽을 세우고 차원의 벽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을 지었다는 거예요.”
“차원의 벽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리시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김필도의 말에서 문 대륙과 이곳이 서로 다른 차원이 아니라는 뉘앙스가 묻어 나왔다.
“문 대륙에도 블루 문, 레드 문, 다크 문이 뜨고 마지막 세 달은 세 개의 달이 전부 뜬다는 걸 아세요?”
“듣기는 했지만… 맙소사!”
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서로 다른 차원이라면 동일한 기간 동안 동일한 달이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같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건 같은 차원 안에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차원의 벽은 차원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양 대륙을 막는 장벽일 뿐이에요.”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런 사실이 왜 알려지지 않았던 거죠?”
알마니는 걸음을 옮기는 김필도를 보며 소리쳤다.
“누구도 기억하기 싫은 치욕의 역사니까. 다섯 종족은 치욕을 기록하기보다는 숨기는 걸 택했어.”
“철족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는 거예요?”
“그들의 흔적은 문 대륙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기억하는 자들도 거의 없고. 그런 면에서 보면 다섯 종족은 성공한 거야.”
“대공 전하와 헬칸은 어떤 사이죠?”
하지만 알마니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알마니는 리시아를 보았다. 그녀는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철족은 수천 년 정도가 아니라 수만 년 전에 존재했던 종족이에요.”
“대공 전하는 문 대륙에서 고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알게 됐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잘 먹었어요.”
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닥불 옆에서 식사를 하던 베른과 쿠다가 동시에 일어났다. 베른은 암흑 상단 가주를 보호할 생각으로, 쿠다는 대족장을 보호할 생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식사들 해요.”
리시아는 두 사람을 말렸다.
“가주님!”
“대족장님!”
“나는 암흑 상단의 상단주고, 바람의 종족 대족장이고 센카 족의 최강 무기인 센카의 주인이고, 데쓰 와이어의 주인이에요. 피곤할 텐데 쉬도록 하세요.”
리시아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베른과 쿠다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두 분은 걱정이 지나치신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엔 리시아 님을 능가하는 검사는 발탄 제국에서 한 명밖에 없어요.”
“그 사람이 누군가?”
베른이 물었다.
“바로 대공 전하세요.”
“자넨 대공을 너무 높게 보는 것 같구먼.”
“나도 베른과 같은 생각이네.”
쿠다가 맞장구를 쳤다.
“두 분이 대공 전하께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알아요.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알마니는 베른과 쿠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떤 부탁을 하고 싶은가?”
“혹시 대공 전하께 불손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지금 그만둬 좋으면 좋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두 사람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어요. 특히 나이를 먹은 사람의 눈은 절대 거짓말을 못 해요. 그런데 대공 전하를 바라보는 두 분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어려 있어요. 간혹 경멸의 표정도 보이고요. 존경하는 건 바라지 않을게요. 그냥 지켜만 봐주세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쿠다는 차가운 눈으로 알마니를 보았다.
“그럼…….”
알마니는 쿠다를 쏘아보았다.
“헉!”
쿠다는 앉은 자세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알마니의 눈동자 속에서 활활 타는 불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불꽃을 보는 순간 온몸이 타는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그가 아는 한 허공을 건너뛰고 열기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한 종족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불의 정령 전사인 세다크였다.
“재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알마니는 차갑게 말했다.
“세다크!”
쿠다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불의 정령 전사의 한 종족인 세다크는 정령 전사들 중 가장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늘 가장 먼저 제거를 당했다. 문 대륙에서 다두 드래곤과 전쟁 때도 그랬고, 대륙전쟁 때도 그랬다. 그래서 5천 년 전 완전히 소멸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후예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로 세다큰가?”
“카판 한 잔 하시겠어요?”
알마니는 활짝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싸늘했던 분위기가 대번에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으음!’
쿠다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변수다. 원래 일정은 정령왕이 깨어나고 리시아의 몸을 절반가량 장악하면 곧바로 강림 의식을 거행할 참이었다. 그런데 세다크의 후예가 등장하여 경고를 한 것이다.
각성 의식은 일반인은 방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정령 전사라면 얼마든지 훼방을 놓을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정령왕을 잃게 된다.
계획의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조용히 함께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죠?”
알마니는 재차 물었다.
“아니네. 한잔하고 싶네.”
“맞아요, 쿠다. 원래 속이 탈 땐 냉수가 아니라 짙은 향이 풍기는 카판을 마셔줘야 해요. 설탕 없이 할 거죠?”
알마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한편.
김필도는 성벽에서 북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부근에서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가 있는 주변은 수증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그곳은 전부가 온천 지대였다.
“불티나!”
김필도는 손바닥을 펴고 불꽃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횃불 크기의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불빛을 이리저리 비추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저기가 좋겠네.”
폭이 2미터 남짓한 타원형의 온천을 발견하고는 싱긋 웃었다.
그가 그 온천을 택한 것은 가장자리에 쌓여 있는 돌 때문이었다. 누군가 쌓은 흔적이 있다는 건 애용했다는 뜻이고,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설풍과 단도를 나란히 풀어놓고 옷을 벗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유황 냄새가 섞인 온천수의 온도는 상당히 높았다. 다리만 담근 채 한참 동안을 앉아 있던 그는 이윽고 몸을 쑥 담갔다.
“유황온천을 개발하면 대박인데.”
벗어놓은 옷을 옆 온천으로 던져 넣고 온몸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머리를 감고 얼굴을 닦고 있는데 인기척이 났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리시아가 건너편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베른에게 들키면 어쩌려고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주는 베른이 아니고 저잖아요.”
리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옷을 벗었다. 곧 알몸으로 변한 리시아는 온천 안으로 발을 담갔다.
“여기에 정령왕이 살고 있나 봐요.”
리시아는 가슴 사이에 절반가량 박혀 있는 목걸이의 보석을 가리켰다.
“변화가 있었어요?”
“말을 걸어왔어요.”
그녀가 김필도를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실레카 때문이었다. 비록 계약을 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몸속에 박힌 목걸이 안에 정령왕이 살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