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16화 (116/225)

# 116

“말을 걸어와요?”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전에 쿠다의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시선이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네.”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는 실레카라고 하면서 제가 페어리라면 그의 종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종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고, 계약할 생각도 없다고 말해 뒀어요.”

“그러니까 뭐래요?”

“그 후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요.”

“그랬군요.”

김필도는 리시아 가슴 사이에 박힌 보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석에서는 실레카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쿠다 그 친구들을 족쳐봐야 할 것 같네요.”

“족쳐요?”

“우리에게 보석을 준 자잖아요.”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는 건가요?”

“없다면 거짓말이… 젠장!”

김필도는 욕설을 뱉어내고는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욱!

그의 등에서 뭔가 살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시아, 센카를 착용하세요.”

츄악!

김필도는 버럭 소리치고는 온천 위에 두었던 설풍과 단도를 쥐었다.

“흐름의 광풍 쿠라 라콰(Kura Laqwa)!”

슈캉! 슈캉!

슈아악!

설풍과 단도를 뽑아 든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단축했다.

슈악!

강한 바람이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크로스 보우에서 쏘아진 쿼럴이었다.

하지만 김필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온천을 떠나는 순간 눈을 감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감을 동원하여 조금 전 공격해 온 자들의 흔적을 더듬는 중이었다.

슉!

슥!

느낌이 오는 순간 단도를 휘둘렀다.

스악!

단도를 쥔 손끝으로 강한 느낌이 잡혀든다. 그리고 두 조각으로 잘려 나간 쿼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경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20미터 전방 나무 위!’

그는 내심 소리치며 속도를 냈다.

단숨에 나무 앞으로 온 그는 가지를 타고 뛰어올랐다.

스악!

백색 광채가 나무를 둥글게 감아 돌았다.

“컥!”

나직한 비명과 함께 복면을 한 자가 아래로 추락했다.

스아악!

바로 그때였다. 머리 위쪽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그물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파앗!

김필도는 나무를 박차고 아래로 쏘아져 갔다.

척!

“대지의 유연함, 노콴(Noqan) 다운(Down)!”

나직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가 내려섰던 곳이 마치 수직 동굴이 뚫려 있는 것처럼 쑥 꺼졌다.

턱!

그러자 김필도를 잡기 위해 떨어졌던 그물이 땅 위로 떨어졌다.

“혼돈의 바람, 라콰 카이(Laqwa Kai)!”

흙벽에 손바닥을 대고 소리치자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김필도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조금 전 어쌔신 한 명을 없앴던 나무 옆이었다.

그곳에도 어쌔신 한 명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번쩍!

김필도의 설풍이 새파란 광채를 남기며 허공을 갈랐다.

“크윽!”

나무와 동시에 허리가 잘려 나간 복면 사내는 나직하게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번쩍!

사내가 떨어지기 직전 이미 나무를 차며 장소를 이동한 김필도는 다른 사내의 허리를 잘라내고 있었다.

“헉!”

복면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고개를 숙여 김필도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1호가 당하고 그물을 던진 후 30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2호, 3호, 4호가 당하고 자신의 차례가 된 것이다. 사내는 급하게 검을 아래로 내렸다.

스악!

차앙!

하지만 김필도의 설풍은 5호의 검을 자르고 그대로 허리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커억!”

허리가 잘리기 직전, 5호가 본 마지막 광경은 온몸에 새긴 마법진 때문에 흑인처럼 보이는 김필도의 몸통이었다.

털썩!

두 조각으로 잘려 나간 복면 사내의 동체가 지면으로 떨어졌다.

척!

김필도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주위를 더듬었다. 단 한 사람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숨소리의 주인은 리시아였다.

스윽!

나직한 소성과 함께 리시아가 옆으로 나가왔다. 그녀는 센카를 착용하고, 데쓰 와이어를 든 채였다.

“아무도 없어요.”

리시아는 경이롭다는 듯이 김필도의 몸을 바라보았다.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강한 광채를 발하는 마법진들이 서서히 몸속으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루시안 공자가 빠르게 이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나요?”

리시아는 마법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김필도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자 리시아는 아래쪽의 나뭇가지를 향해 데쓰 와이어를 던져 몸을 날렸다.

척! 척!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으로 내려섰다.

“다, 당신 화살 맞았군요?”

우연히 김필도의 등을 보았던 리시아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김필도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 크로스 보우의 화살인 쿼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금세 괜찮아질 거예요.”

“포션 부어줄게요.”

그녀는 아공간을 열고 포션을 꺼냈다.

바로 뽑지 않고 포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건 쿼럴의 촉 때문이다. 보통 쿼럴의 촉은 아래쪽이 넓고 위쪽이 좁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뚫고 들어갈 때보다 뽑아낼 때가 더 고통스럽다. 뽑아내다가 자칫 잘못하면 신경을 잘라낼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일단 온천으로 돌아가요.”

김필도는 온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엎드려보세요.”

김필도가 엎드리는 사이에 리시아는 센카를 해제했다.

그녀는 김필도 위로 올라가 쿼럴이 파고든 지점에 포션을 부었다. 포선이 들어가자 상처로부터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서서히 쿼럴이 빠져나왔다.

이윽고 쿼럴이 완전하게 빠져나오자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다행이에요.”

리시아는 안도의 숨을 쉬며 김필도의 등에 엎드렸다. 특급 포션인 듯 쿼럴이 10센티미터 이상 파고들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몸 돌릴게요.”

“그럴래요?”

리시아는 양팔로 몸을 지탱하여 김필도가 몸을 돌리기 쉽게 해주었다. 그리고 김필도가 똑바로 눕자 다시 엎드렸다.

“고마워요.”

김필도는 리시아의 등을 쓸었다.

“그런데 왜 전투기갑을 착용하지 않는 거죠?”

문득 지금까지 김필도가 전투기갑을 착용한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원래 싸움을 할 땐 내가 가진 걸 전부 보여주면 안 되거든요.”

“비장의 수 한 가지는 숨겨둔다는 거예요?”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먹여줄 수 있고,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누구와 싸우는데요?”

“펠콘 성에서 만났던 천족도 있고, 리시아 양 덕분에 알게 된 10인 위원회도 있고, 문 대륙에서 내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던 의문의 살인자도 있고, 지금 당장은 나타나지 않은 가상의 적도 있겠죠.”

“그럼 전 그들에게 너무 많은 걸 보여준 셈이 됐네요?”

“그들이라면 10인 위원회?”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아 양은 그들과 전쟁을 치를 일이 없잖아요.”

“나는 싫은데 자꾸만 시비를 걸어오니까 그렇죠.”

“조금 전 그자들은 어쌔신이겠죠?”

“그럴 거예요.”

“용병에 이어 어쌔신까지 나타났네요?”

“절 만나지 않았으면 루시안 공자는 엮일 일이 없었을 건데, 미안해요.”

“누군가 그러는데 인연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대요.”

“저랑 만난 걸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큰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악연 아니고?”

“이렇게 예쁜 여자와 알게 된 걸 악연이라고 하면 천벌을 받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다니까요.”

“좋아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뭘 말하는 거죠?”

“제가 미들헤임 가문의 표적이 된 이유를 말씀드리겠다는 거예요.”

“그런 것 때문에 리시아 양과 함께 가는 게 아니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하다크 미들헤임의 딸인 카샤가 임신을 했어요.”

“카샤란 아가씨는 아직 결혼 전인가 보죠?”

“맞아요.”

“아이 아버지는 아론?”

“약혼을 할 때 다른 여자와 자는 건 물론이고 두 번째나 세 번째 부인을 맞아들이는 것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다만 단 한 가지, 먼저 말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그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어요.”

“그것 때문에 가문을 나온 거예요?”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그럼?”

“어느 날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바쁜 일이 있어 몇 달 동안 아론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지도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일을 끝마치고 전보다 더 아론에게 잘했다. 스스로에게 아론을 사랑한다고 세뇌를 하면서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를 더 이상 마음속에 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집을 나온 건 그가 배신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임신시켰는데도 전혀 질투가 나지 않는 거예요. 더 황당한 건 그럴 수도 있겠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예요. 그런 내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너무나 이기적인 제 모습에 혐오감이 일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집을 나온 거였어요.”

“지금은 어때요?”

“뭐가요?”

“가출한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그러니까 잘했냐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후회하느냐는 질문?”

“네.”

“루시안 공자는 어떤 대답을 듣기를 원하죠?”

리시아는 몸을 위로 끌어올리더니 김필도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가출해서 가장 큰일은 나를 만난 거니까, 가출하길 잘했다는 말을 듣기를 바라죠.”

“그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요?”

“왜요?”

“루시안 공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니까요.”

“수컷의 의무를 다하란 말?”

“수컷의 의무가 아니라 본능에 충실하라는 말이에요.”

“후회할 거예요.”

“뭘 후회한다는 거죠?”

“과거의 남자에 대해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 걸 가지고 트집 잡는 사내는 이걸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도 있다던데 들어봤나 모르겠어요.”

“아무리 대범한 척해도 기분 나쁜 건 나쁜 거라고 하던데요?”

“루시안 공자도 그래요?”

“아직 연인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건 알 수가 없네요.”

“만약 연인이 된다면?”

“트집 잡을지도 몰라요. 왜냐면 전 속 좁은 남자거든요.”

“그럼 지금부터 속이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줘야겠네요.”

리시아는 유혹하듯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녀는 입을 맞추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김필도의 모든 것을 지켜보려는 듯 눈을 뜬 채로 입을 맞췄다.

“어디 아파요?”

김필도는 입을 떼며 물었다.

리시아의 체온이 상당히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조금 전에 들어갔던 온천과 비슷했다.

“왜요?”

“몸이 뜨거운 것 같아서요.”

“지금은 몸이 펄펄 끓어야 정상 아닌가요?”

리시아는 다시 입을 맞췄다.

‘그렇긴 한데…….’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밀물처럼 밀려오는 느낌에 달궈진 솥뚜껑 위로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리시아 또한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