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이건 아닙니다, 가주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베른이었다.
그가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은 어쌔신들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어쌔신들을 없애고 나자 리시아가 걱정이 됐다. 그래서 성벽을 나와 주위를 살폈다.
예상대로 어쌔신들은 자신들만 노린 게 아니었다.
온천지대에 자라고 있던 커다란 나무 아래쪽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그 시체를 살피며 이동하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따라왔는데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아론 공자를 배신하면 남는 건 파멸밖에 없습니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주님.’
베른은 허리춤의 검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나 같으면 그 검 손잡이를 놓겠소.”
싸늘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막 몸을 돌리려던 베른은 움직이지 못했다. 지독한 살기가 온몸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 살기는 움직이는 순간 화살처럼 몸을 뚫을 것만 같았다.
‘놀랍군.’
베른은 경악했다.
사내가 누군지 모르지 않는다. 사내는 다름 아닌 디자이너 알마니다. 사실 알마니가 뛰어난 검사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강하진 않았다. 그런데 프라넬 평원으로 들어와 그리핀과 싸우고 난 후부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베른은 모든 감각을 알마니에게 집중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행히 알마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휴우!’
베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건 나와 가주님의 일이네, 알마니.”
“귀하는 제3자예요, 베른. 그리고 암흑 상단 가주의 호위인 걸로 알고 있고.”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는 말인가?”
“내가 걱정하는 건 대공 전하예요. 베른이 대공 전하께 불손한 마음을 먹으면 내 손에 죽어요.”
“자신 있는가?”
“프라넬 평원으로 들어설 때까지는 감히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각성이라도 한 겐가?”
“그래요, 아버지께서 아들의 행복을 위해 봉인하셨던 힘이 깨어나고 있어요. 그 힘은 당신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강해요.”
“나 또한 약자가 아니네, 알마니.”
“하지만 내 가위에 목이 잘릴 거예요.”
“감히!”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게 뭔지 아세요. 바로 하는 걸 방해하는 거예요. 일단은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알마니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으음!’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려버리는 알마니의 모습에 베른은 신음을 내뱉었다. 간단하게 몸을 돌리는 알마니의 행동에서 강자의 여유가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각성의 땅이라고 그렇소.”
그의 의문에 대한 답을 준 사람은 쿠다였다.
“각성의 땅?”
베른은 쿠다를 바라보았다.
제8장 High Risk & High Return
하다크 미들헤임은 호수에 눈을 맞췄다.
그가 2백 명의 다르를 이끌고 이곳에 도착한 것은 한 달 전이다. 오자마자 뉴 레이크 북쪽에 진영을 구축하고 정찰을 했다. 그 와중에 리시아 일행을 공격하던 그리핀이 몰살을 당하는 광경을 보았고, 고대의 성 부근에서는 어쌔신들의 시체 10여 구를 발견했다.
그리핀은 빅 소드 용병단 소속이고 어쌔신은 니드의 특급 어쌔신들이다.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참혹하게 당할 줄도 몰랐다. 리시아 일행은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전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대공의 검술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공이 그렇게 엄청난 검술을 쌓는 동안 그에 대한 보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대공 감시를 맡았던 자들은 어디서 무얼 했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돌아가 책임 추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대공의 처리보다 더 급한 건 10인 위원회 위원장인 아론의 약혼자 리시아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녀만 없애면 아론의 정실부인은 카샤가 될 터였다.
“올랜도를 살해한 그 계집을 먼저 없앤 다음 대공을 처리해도 늦지 않아.”
하다크 미들해임은 아들 올랜도 살해범으로 리시아를 지목한 상태였다.
“접니다, 가주님!”
그때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돌처럼 탄탄하게 생긴 이 사내는 어둠의 상단 소속의 다르를 훈련시키는 교관 바탈리였다. 바탈리는 이번에 출정한 최상급 다르 2백 명의 수장이었다.
“보고해라!”
“빅 소드 용병이 호수 남부의 죽음의 도시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죽음의 도시?”
하다크 미들헤임은 고개를 돌려 바탈리를 보았다. 죽음의 도시란 말이 귀에 익었던 것이다.
“수림으로 뒤덮여 있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의 도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
“무슨…….”
“죽음의 도시 말이다.”
“전 여기서 처음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난… 맞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하다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죽음의 도시란 말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문 대륙을 떠나 휴도니아로 들어온 고대인들은 뉴 호수 주변으로 정착했다. 그 고대인들 중에는 정령 전사의 후예들도 포함돼 있었다.
정령 전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두 드래곤을 끌어들이고 신마 전쟁을 촉발했던 인간들은 힘든 시기가 오자 다시 정령 전사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하루하루를 견디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제사장들은 연일 제를 올렸지만 그들의 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곳 생활에 실망한 자들 중 문 대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을 회귀파로 불렀다.
그 회귀파의 수뇌는 대부분 정령 전사의 후예들이었다. 이제 남은 건 회귀파와 정착파 간의 전쟁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 드워프, 엘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1만 년 동안 이어진 신마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들에게 또다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 종족은 호수 남쪽에 행칼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감옥을 세우고 문 대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회귀파들을 그 안으로 유인하여 문을 닫아버렸다.
죽음의 도시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곳이 바로 죽음의 도시 행칼이었다.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이 각처로 흩어지면서 죽음의 도시 행칼은 잊혔다. 그런데 죽음의 도시라고 부르는 숲이 있었다. 어쩌면 행칼을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은 어떻다더냐?”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미로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습니다.”
“빠져나오는 길이 아예 없진 않겠지?”
“달빛 길이라고 불리는 곳이 유일하답니다.”
“그렇구나.”
점점 그 숲이 행칼로 들어가는 입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달빛 길로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바탈리는 고개를 숙이고는 대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잠시 후 죽음의 상단 소속 다르 2백 명은 은밀하게 자리를 떴다. 부하들을 이동시킨 바탈리는 호위와 함께 돌아왔다.
“이동 중입니다, 가주님.”
그는 하다크 미들헤임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그만 가자.”
“나다!”
막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데 품속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다크 미들헤임의 아버지인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의 목소리였다.
하다크 미들헤임은 통신 마법구를 꺼냈다.
통신 마법구 표면에는 그의 아버지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통신 마법구는 원거리 통신을 할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하다크 미들헤임은 통신 마법구에 마나를 주입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곳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느냐?”
“아직 작전 전입니다. 용병들이 시작하고 난 후에 다르를 투입할 생각입니다.”
“그럼 이곳으로 올 수 없겠구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차원의 벽이 열렸다.”
“네?”
하다크 미들헤임은 순간 멍해졌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탓이었다.
“문 대륙과 이곳 휴도니아 대륙을 막고 있던 차원의 벽이 사라졌단 말이다.”
“그, 그게 서로 다른 차원이 아니었습니까?”
하다크 미들헤임은 깜짝 놀랐다.
“나도 이번에 알았다. 휴도니아 대륙과 문 대륙 사이는 바다라고 하더구나.”
“놀랍군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 휴도니아 대륙은 마족이나 천족 앞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는 뜻이다.”
“그들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들어올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벌써 천족과 마족의 흔적이 발견됐다.”
“정말입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것 같구나. 아무튼 거기 일을 마치는 대로 빨리 돌아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다크 미들헤임은 통신 마법구에서 마나를 제거했다.
“차원의 벽이라…….”
하다크 미들헤임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단 한 번도 차원의 벽이 열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문 대륙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단지 바다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대륙이 폭풍에 휩싸이겠군.”
바다 건너에 문 대륙이 있다는 사실은 대륙을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넣을 게 분명하다.
문 대륙과 휴도니아 대륙이 하나의 대륙이라는 건 곧 천족이 사는 샹스 대륙과 마족이 사는 루루시아 대륙도 같은 차원 안에 있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그들 대륙 또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문 대륙과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게 열려 있는 세상.
어떤 이들에게는 기회의 장이 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가진 걸 잃게 되는 수렁이 될 것이다.
“어쩌면 2차 신마 전쟁이 시작될지도. 하지만 이번엔 과거처럼 되진 않을 게야. 왜냐면, 우린 천족이나 마족 어느 쪽과도 손을 잡을 준비가 돼 있으니까.”
하다크 미들헤임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바탈리, 가자!”
하다크 미들헤임은 뒤편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 *
문 대륙과 휴도니아 대륙을 가로막고 있던 차원의 벽이 사라지고 바다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질겁한 사람은 또 있었다. 그는 바로 발탄 제국의 황제 크레믈 디칸 가이우스였다.
황제는 차원의 벽에 대한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세 공작과 다섯 후작을 불러들였다.
황실로 들어온 세 공작과 다섯 후작은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차원의 벽이 사라지고 바다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탓이었다.
그곳이 바다일 거라고 생각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문 대륙이 휴도니아 대륙과 같은 차원에 존재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없다고 해야 옳다.
그런데 북해라는 새로운 장소가 생겨난 것이다.
“말해보시오.”
황제는 드보르칸 후작을 보며 말했다.
드보르칸 후작이 다스리는 볼삭 지방이, 휴도니아 대륙의 북쪽 장벽으로 불리는, 고칸 산맥 북서쪽에 면해 있기 때문이었다.
“카랑 산 뒤편으로 하늘이 보이고 있습니다.”
카랑 산은 고칸 산맥 서쪽 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사라졌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전엔 카랑 산에 오르면 차원의 벽을 마주했었는데 지금은 수평선이 보입니다.”
“또 확인한 사람 있소?”
황제는 공작들과 후작을 둘러보았다.
“저도 확인했습니다, 폐하.”
이번에 대답한 사람은 고칸 산맥의 북동쪽, 라하 지역의 영주인 힐리아드 후작이었다.
“고칸 산맥 북쪽이 바다란 말이오?”
“우리 지역에서 확인한 바로는 고칸 산맥에서 바다까지 거리가 30킬로미터가량 됐습니다.”
“저는 문 대륙에 다녀온 자를 만났습니다, 폐하.”
힐리아드 후작의 말을 이은 사람은 헬모트 공작이었다.
“정말이오?”
폐하는 헬모트 공작을 보았다.
“가는 데 한 달 걸렸다고 합니다.”
“한 달이라…….”
황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뭔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버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