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19화 (119/225)

# 119

“전쟁 전이고 아직 점령된 상태가 아니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네. 하지만 드보르칸 후작가를 위해 손을 쓰기엔 이미 늦었네. 이제 남은 건 두 백작을 볼삭 지역의 주인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우리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전쟁을 하느냐 하는 거네. 나는 경들이 하자는 대로 하겠네.”

황제의 시선이 헬모트 공작에게로 향했다.

“제국을 전쟁으로 몰아넣기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폐하.”

“이콰라 공작은 어떻소?”

“저도 헬모트 공작의 말에 동의합니다, 폐하. 차원의 벽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전쟁을 해서라도 상황을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천족과 마족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 됐습니다. 전쟁은 불가합니다.”

“노르탄 공작도 같은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황제는 후작들을 보았다.

“세 공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후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야 드보르칸 후작을 백번 돕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질 못했다. 공작들의 말처럼 전쟁을 치르기엔 상황이 너무 미묘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황제는 다시 물었다.

“우선은 고칸, 볼삭, 펠콘과 접경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켜야 할 줄 압니다, 폐하.”

“헬모트 공작 말이 맞습니다, 폐하.”

이콰라 공작이 헬모트 공작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볼삭 지역과 영경을 맞대고 있는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고칸 성 남부는 황군과 헬모트 공작이 맡고, 동부는 힐리아드 후작과 트란도르 후작이, 볼삭 남쪽과 펠콘 동쪽은 이콰라 공작과 노르탄 공작이 맡고, 펠콘 남쪽은 크로디아 후작과 헥사이어 후작이 맡기로 하는 거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주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차 한 잔 가져…, 아니다 됐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회의실을 나가 2층으로 향했다.

“폐하!”

휴게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핫라인을 담당하는 기사가 다가왔다.

“소식이 왔느냐?”

“그렇습니다.”

“가자.”

황제는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통신 마법구가 보관된 통신실로 들어갔다. 통신실 안쪽 바닥은 전체가 지도였다. 지도 위에는 마법구가 달린 기둥 1백여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아래쪽 끝은 대륙의 주요 도시에 꽂혀 있었다.

마법 지팡이처럼 생긴 그것은 대륙의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황실에서 심어놓은 정보원이 활동하는 곳과 연락을 주고받는 통신 장치였다.

황제가 간 곳은 가장 안쪽이었다.

그곳에는 다른 마법구의 두 배 크기의 통신 마법구가 얹힌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통신 마법구는 이미 활성화 상태였다.

황제는 통신 마법구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했다. 잠시 후 통신 마법구 표면에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노인은 다름 아닌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이었다.

“오랜만이오, 황제.”

먼저 인사를 한 사람은 헤이먼이었다.

“우린 세 달 전에 본 것 같소이다만.”

황제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나는 황제가 반가운데 황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구려.”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잖소.”

“우린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권고를 할 뿐이오, 황제.”

“하지만 그 권고를 어기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하잖소.”

“황제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소.”

“아직 귀하들의 권고를 어긴 적이 없으니까 그렇겠지요.”

“어기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끌고 있잖소.”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소, 가주.”

“우리 말을 들었더라면 서로군벌의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이 반란을 일으키진 않았을 거 아니오.”

“반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서로군벌과 북로군벌에서 병력을 일으킨 사실을 아직 모르시오?”

“작은 가문을 다스리는 가주는 그런 일이 생소하겠지만 제국을 다스리는 내게 영지전은 아주 익숙한 일이라오.”

“70만 대군이 전쟁을 시작했는데 영지전으로 치부한단 말이오?”

“치부하는 게 아니라 백작들이 일으킨 영지전이오. 나는 들어오는 세금만 변하지 않는다면 영지의 주인이 누가 되든지 신경 쓰지 않소.”

“그래서 우리 권고를 무시하겠다는 말인가?”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통신 마법구 표면으로 금발에 은빛 눈동자의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는 10인 위원회 위원장 아론이었다.

“오랜만이오, 위원장.”

“가이우스 자네 조부는 올챙이였다는 걸 아는가?”

아론은 차갑게 말했다.

“조부는 올챙이였고, 아버지는 개구리였을지 모르지만 난 황제요, 위원장. 그리고 위원장도 20년 전엔 올챙이였다고 알고 있소.”

“많이 컸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10인 위원회는 제국의 원로일 뿐이오. 그 이상을 원하는 건 월권일 뿐 아니라 내정 간섭이오. 난 그걸 용납할 수 없는 것뿐이오.”

“우릴 행동하게 하지 말게, 가이우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마시오.”

“세 가지를 권고하겠네. 첫째,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10인 위원회 이름으로 제거할 것. 둘째, 동로군벌과 서로군벌의 반란을 제압할 것. 셋째 천족이나 마족과는 절대 손을 잡지 말 것. 사실 세 번째 권고 사항은 노파심에서 한 말일 뿐이니까 염두에 둘 필요 없네. 첫 번째와 두 번째 권고 사항만 지키면 되네. 다섯 달을 주겠네. 그 안에 흡족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정원사들은 활동을 시작하게 될 거네.”

“나도 권고하겠네. 혹시 내 황궁에 정원사를 심었다면 바로 철수시키게.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 곁에 있는 크로가 날갯짓을 시작하며 날아오르게 될 거네.”

지금껏 반공대로 일관하던 황제는 아론처럼 반하대를 했다.

“우리 곁에 크로를 심었다고 말하고 싶은가?”

“아이작 가문에서 크로라는 단체를 왜 만들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구먼.”

“그거 재미있는 말이군.”

태연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아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맛봤다.

크로라는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백 년 전 바이칼 크로 아이작 황제 때다. 바이칼 황제는 역대 황제 중 가장 약하고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그가 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0인 위원회 때문이다. 바이칼의 아버지인 델포는 최고의 장악력을 가졌고, 황제의 힘이 강해지면 늘 그랬던 것처럼 10인 위원회에 대항했다. 그 결과 정원사들에 의해 부인과 함께 처형됐다.

델포 황제의 죽음으로 12살 때 황제에 오른 바이칼 크로 아이작은 모든 부분에서 약했고, 늘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가 크로라는 사조직을 만든 건 어쩌면 당연했다.

10인 위원회 측 또한 바이칼이 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조직을 만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로 안에 많은 정원사들을 집어넣어,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인물을 감시해왔다.

그런데 가이우스는 10인 위원회 속에 크로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재미있는 말이 아니라 섬뜩한 말일 거네. 크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으면 권능의 인장에 대해 공부를 해보게.”

가이우스 황제는 비릿한 조소를 남기고는 통신 마법구에서 마나를 제거했다.

통신 마법구를 바라보는 아론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제와 직접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모든 대화는 헤이먼이 했고, 그는 보고만 받았다.

사실 오늘도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헤이먼과 황제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황제가 너무 건방을 떠는 것 같아서 경고를 할 겸 끼어들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됐을 뿐 아니라 조롱까지 당한 것이다.

“권능의 인장을 아시오?”

아론은 헤이먼을 보며 물었다.

“나도 처음 듣습니다, 회주.”

“알아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회주.”

“지금 당장!”

“네.”

헤이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감히!”

아론은 테이블 위를 사정없이 쓸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죽이겠다, 가이우스!”

전면을 바라보며 아론은 차갑게 소리쳤다.

* * *

“이걸로 해결하자!”

김필도는 허리춤에서 설풍과 단도를 뽑아 땅바닥에 꽂았다. 그가 바라보는 사람은 라쿤 제1전사 쿠다였다.

“무슨 말이오?”

쿠다는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저들 말이야.”

김필도는 블랙칸을 가리켰다.

블랙칸 등에는 들것이 고정돼 있고, 들것 위에는 리시아가 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런데 리시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가만히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땀은 얼굴에서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들것 아래쪽에서는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온몸에서 흐르는 땀이었다.

김필도는 리시아가 흘리는 땀을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물로 온몸을 닦아보기도 하고, 체온을 내리기 위해 물의 속성 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땀은 멈추지 않았다.

며칠 전 온천에서 그녀의 몸이 유난히 뜨겁다고 느꼈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듯했다.

문제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비교적 멀쩡했던 알마니마저도 리시아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쓰러지고 만 것이다.

“쿠다 자넨 리시아 양과 알마니가 저런 이유를 알고 있어. 난 그걸 알고 싶어.”

“난 모르오.”

쿠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자네와 아베다는 알아. 다만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야. 꽃아.”

“뭘 꽂으란 말이오.”

“내 검 옆에 쿠다 자네 검을 꽂으라는 거야.”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10미터를 물러나서는 검을 향해 달려가는 거야.”

“쉽게 말하면 결투군요.”

“그런 셈이야.”

“결투는 뭔가를 바랄 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쿠다 자네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대고 내 신발에 입을 맞추길 바라.”

“부하가 되란 말입니까?”

“지금도 내 부하인 걸로 아는데, 아냐?”

“그럼 수신호위께서 원하시는 건 뭡니까?”

“내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목을 그어버리는 종.”

“완전한 복종을 원하신단 말씀이군요.”

“맞아.”

“그럼 제가 얻는 건 뭡니까?”

“자넨 리시아 양과 내게 원하는 게 있지 않아?”

“있다면 그걸 주실 생각입니까?”

“기꺼이 줄게.”

“목숨이라도 상관없습니까?”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베른은 김필도를 불렀다. 전까지 베른은 김필도를 루시안 자네라고 불렀다. 하지만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리시아와 잠을 잔 이상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저 친구가 아니면 리시아 양과 알마니는 죽어. 지금은 이걸 걸고 모험을 할 수밖에 없어.”

김필도는 제 머리를 툭 쳤다.

“쿠다는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패할 거라고?”

“저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싸우려는 거야?”

“네?”

“쿠다만 이기면 앞으로 베른은 내 앞에서 눈깔 깔아야 하잖아.”

김필도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쿠다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쿠다는 입을 열었다.

“베른 말처럼 난 내 전부를 다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김필도를 바라보는 쿠다의 얼굴은 경직돼 있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조건의 결투다. 하지만 패했을 경우에 바람의 정령왕 실레카 님의 재림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지극히 위험한 도박이다. 반면에 성공하면 실레카 님은 완벽한 상태로 재림할 수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베다를 보았다.

그때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자네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해. 폭풍 전사 백 명이 몰려온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수좌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베다는 쿠다를 보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쿠다는 말끝을 흐렸다.

“말씀하십시오, 수좌.”

“승리한다는 장담은 못 하지만 패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쿠다 또한 김필도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본인의 검술에 대한 자부심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그것은 검사의 자존심이 아니라 라쿤 제1전사의 자존심이었다.

“전 수좌를 믿습니다.”

아베다는 확신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베른은 아베다의 어깨를 꽉 잡았다가 놓은 다음 몸을 돌렸다.

김필도가 설풍을 꽂아 놓은 자리 앞에 도착한 쿠다는 그의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보았다.

“현명한 선택을 한 거야.”

“약속할 수 있습니까?”

쿠다는 확인하듯 물었다.

“리시아 양을 깨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네뿐인 걸로 아는데 아닌가?”

“그렇군요.”

쿠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필도의 도 옆으로 그의 검을 꽂았다.

“10미터를 물러나면 돼.”

“알겠습니다.”

쿠다는 거리를 재면서 뒤편으로 물러났다. 대충 10미터를 헤아린 그는 그 자리에 멈췄다.

“시작 신호는 베른이 해.”

“알겠습니다.”

베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뽑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휙!

베른의 검이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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