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제9장 행칼
파앗! 파앗!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지면을 찼다. 김필도와 쿠다의 뒤편으로 흙더미가 튀어 올랐다.
바람의 정령 기운을 이용한 듯 나아가는 속도는 쿠다가 김필도보다 더 빨랐다. 김필도보다 한발 먼저 검을 뽑은 쿠다는 빠르게 쏘아져 오는 김필도를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휘리릭!
김필도는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몸을 굴렸다.
스악!
쿠다의 검은 김필도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휙!
김필도는 브레이크 댄스를 추듯 두 다리를 엇갈리게 한 다음 빙글 돌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스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허리!’
김필도는 훌쩍 뛰어오르며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나아가던 쿠다의 검이 급하게 멈추더니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김필도는 또다시 몸을 굴렸다. 김필도는 이리저리 몸을 굴리면서도 조금씩 설풍을 향해 나아갔다.
“차앗!”
김필도에게 무기가 없는 동안에 끝장을 볼 셈인 듯 쿠다는 기합을 내지르며 공격했다. 어느 순간 쿠다의 검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아악!
바람을 동반한 쿠다의 검은 폭풍처럼 김필도의 전신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하지만 김필도는 간발의 차이로 쿠다의 검을 피했다.
전에 라이자칸으로부터 배웠던 육감 훈련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 부르는 육감을 최대한 끌어올리자 굳이 눈이 필요 없었다.
김필도는 대기의 흐름을 파악하여 쿠다의 검이 다기오기 전에 알아차리고는 대응을 했다. 이미 검이 이동하는 경로를 알고 있으면 피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빛살처럼 빠른 검이 아주 느리게 보일 지경이었다.
‘으음!’
그러자 쿠다는 당황했다.
아무리 라쿤의 능력을 끌어 올린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듯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상대는 검도 들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타앗!”
쿠다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강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옷은 바람을 머금은 돛처럼 팽팽하게 부풀었다.
드디어 숨겨두었던 바람의 힘을 끌어 올린 것이었다.
바람의 힘을 끌어 올리자 쿠다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검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김필도 역시 정신없이 움직였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뒤로 젖히고, 다리를 일자로 찢으며 풀썩 주저앉고, 재주를 넘었다. 그런데 그의 동작 역시 쿠다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빨라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전 마법 때문이었다.
김필도가 정신을 집중하자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있던 마법진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며 문신처럼 피부 표면으로 올라왔다.
김필도와 쿠다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오른편에 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왼편에서 엉켜 있고, 왼편으로 가 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오른편에서 싸웠다.
휘이이익!
쿠다의 몸에서 강풍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바람은 얼마나 강한지 뿌연 흙먼지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쿠다는 그 바람에 몸을 실었다.
“라쿤의 힘이군.”
바람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쿠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필도는 설풍과 단도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쿠다는 이번엔 김필도를 막지 않았다.
김필도는 설풍과 단도를 쥐었다. 설풍은 가슴 앞에 수직으로 세우고 단도는 왼편으로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라쿤 앞에서 눈을 감는단 말인가?”
쿠다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때로는 눈보다는 귀에 더 의존해야 하거든.”
“위험한 생각이오, 수신호위. 귀는 오히려 눈보다 더 좋지 않소.”
“그건 자네 생각이지.”
김필도는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가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차앙!
그의 단도에서 불꽃이 튀었다.
김필도는 단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한 힘을 막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오른편으로 2미터를 이동했다.
스악!
섬뜩한 기운이 명치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한 걸음 옮기며 왼손의 단도를 휘둘렀다.
차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쿠다의 검이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이번에도 역시 김필도는 단도를 타고 들어오는 힘을 거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지금부터 나도 공격하지.”
김필도는 왼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베른 곁으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다리에 끼웠던 무게 조절기를 최소로 맞췄다. 150킬로그램에 달했던 몸무게가 순식간에 75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속도라면 나도…….”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가 나아가는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10여 미터를 단숨에 나아가는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람 속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헉!”
다급한 경호성이 바람 속에서 흘러나왔다.
차앙!
김필도의 검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내리그었다. 한 손으로도 40킬로그램의 헬칸을 휘둘렀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가볍디가벼운 설풍을 휘두르고 있을 뿐 아니라 양손이다. 당연히 검에 실린 힘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차앙! 차앙! 차앙! 창! 창!
바람 속에서 계속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커억!”
이윽고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비명이 들려오고, 바람 속에서 피 냄새가 풍겨 나왔다.
검을 타고 들어온 마나의 충격파가 몸 내부를 강타하여, 모세혈관을 터뜨려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쿠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쿠다는 질겁했다.
지금 그는 정령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 올린 상태고, 바람 속에 숨었다. 그런데 김필도는 정확하게 위치를 찾아내 공격을 해오고 있다. 그렇다고 마법을 펼친 것 같지도 않다. 믿어지지 않은 광경이었다.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는 말 들어는 봤겠지?”
김필도는 공격을 퍼부으며 물었다.
“육감…….”
차앙!
“커억!”
“맞아. 육감이야.”
“단지 육감으로 날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바람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도 잊고 쿠다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아냐, 가능해.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건 내가 눈을 뜨고 있어서야. 만일 내가 눈을 감으면 이 싸움은 바로 끝나.”
“나는 믿을 수 없소!”
쿠다는 버럭 소리쳤다.
“보여줄게.”
김필도는 눈을 감았다.
척!
그리고 그의 설풍은 어느새 쿠다의 목에 닿아 있었다.
“이럴 수가…….”
쿠다는 경악한 얼굴로 그의 목에 닿아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검면을 타고 붉은 방울이 또르르 흘러 내려가고 있다. 검날이 이미 피부를 베었다는 의미였다.
“계속할까?”
쿠다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다. 검은 그 바람을 뚫고 정확하게 목에 와 닿은 것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턱!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가고 바람이 잦아졌다.
그러자 상황이 드러났다.
“말도 안 돼!”
숨죽이며 지켜보던 아베다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약속은?”
김필도는 설풍을 거둬들였다.
털썩!
쿠다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무릎걸음으로 김필도 발치까지 기어갔다.
“마스터!”
쿠다는 허리를 숙이고 두 팔을 쭉 뻗고 김필도의 신발에 입을 맞췄다.
“좋다, 쿠다. 너는 지금부터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가의 가신이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쿠다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넌!”
김필도는 아베다를 보았다.
“저, 저도 해야 하는 겁니까?”
“머리가 움직이면 꼬리가 따르는 건 당연한 거다, 아베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아베다는 김필도 앞으로 다가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쿠다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두 팔을 바닥에 대고 김필도 신발에 입을 맞췄다.
“절대 복종의 표시는 너희 둘에게만 받겠다. 나머지 라쿤에 대해서는 너희 둘이 알아서 처리해라.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가의 가신이 되기 싫다고 하는 자는 정령의 힘을 거둬들이고 추방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마스터!”
쿠다와 아베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좋아, 쿠다. 이제 리시아 양과 알마니의 증상에 대해 말해 봐.”
“신병입니다, 마스터.”
“신병?”
“일반인이 신을 받아들였을 때 나타나는 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리시아 양은 실레카가 깨어나면서 저렇게 된 거고, 알마니는 봉인이 풀리면서 저렇게 됐다는 거야?”
“원래 정령의 힘을 깨우는 건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합니다. 정령의 힘을 받아들인 후에도 최소한 50년 이상 몸속에 두면서 익숙해진 다음에 깨워야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족장님과 알마니는, 정령이 스스로 각성을 하다 보니 부작용이 생겨난 겁니다.”
“알마니의 말처럼 이곳이 각성의 땅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렇습니다.”
“각성의 땅이라는 건 어떤 의미지?”
“이곳 프라넬 대평원에서 느낀 점 없으십니까?”
“평원 전역에 혼돈의 기운이 미약하게 깔려 있는 것 같아.”
“혼돈이 생의 원천이면서 끝이라는 것도 아십니까?”
“천지창조가 혼돈에서 시작됐다고 들었어.”
“맞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은 혼돈이었고, 혼돈이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울러 혼돈은 세상을 무로 돌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돈(混沌)은 세상을 잉태만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단 한 곳 혼돈이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정령계?”
“그렇습니다. 정령계는 혼돈으로 들어차 있고, 혼돈은 정령을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혼돈의 기운이 리시아와 알마니가 지닌 정령과 정령의 기운을 활성화시켰다는 거네?”
“정령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리 혼돈의 기운에 노출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령의 기운을 가진 자들만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신병이라고 하는 거구나.”
“고대에는 신병을 않았던 자들이 대부분 제사장이 됐습니다.”
“고치는 방법은 있어?”
“정화 의식을 거행해야 합니다.”
“굿이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신 내림 때문에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됐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리시아와 알마니는 내림굿을 통해 정령의 기운을 자기네들 걸로 소화시키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아무 장소라도 되는 거야?”
“특별한 장소라야 합니다.”
“그런 장소가 있어.”
“네.”
“어딘데?”
“행칼입니다.”
“이곳에 있어?”
“이곳에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요.”
“아는 데까지만 가.”
“저기로 들어가면 됩니다.”
쿠다는 저면의 어두컴컴한 숲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