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22화 (122/225)

# 122

“차앗!”

“휴후!”

이볼트의 기합이 들려오자 할케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더 공격을 받았다면 위험할 뻔했는데 적절한 순간에 이볼트가 도움을 준 것이었다.

할케인은 기회를 노리며 김필도를 따랐다. 김필도는 파상적인 공격으로 이볼트를 몰이치고 있었다.

‘저거다!’

할케인의 눈에서 빛이 났다. 이볼트 뒤편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이었다. 대검으로도 자를 수 없는 엄청난 두께였다.

대공의 대검을 나무에 잡아둘 수만 있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할케인은 이볼트에게 수신호를 했다.

할케인의 신호를 받은 이볼트는 물러나면서 주위를 살폈다. 뒤편에 거대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할케인이 수신호로 한 말도 이해가 갔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앗!”

그는 기합을 내지르며 김필도를 유인했다.

그리고 등에 나무가 닿자, 일부러 허리 쪽에 허점을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김필도는 헬칸을 이볼트의 허리를 향해 쓸어갔다.

이볼트는 빠르게 20센티미터가량을 이동했다. 20센티미터는 상대를 속이기에 가장 적당한 거리였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볼트는 왼편 허리 앞으로 검을 세웠다. 나무를 가르며 들어올 헬칸을 막기 위한 동작이기 때문에 무게 중심 또한 왼편으로 잔뜩 쏠려 있었다.

휙!

빠르게 쓸어오던 헬칸이 중간에 멈췄다.

그러고는 무자비하게 이볼트의 명치를 향해 찔러가는 것이었다.

“헉!”

이볼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그는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왼편으로 쏠려 있던 무게중심 때문에 한 템포 놓치고 말았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헬칸이 이볼트의 명치로 파고들어 갔다. 순식간에 이볼트의 몸을 관통한 헬칸은 뒤편 나무로 박혀 들어갔다.

“커억!”

이볼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김필도 뒤편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할케인을 보았다. 그가 조금만 힘을 보탰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할케인은 이볼트를 볼 겨를이 없었다. 그의 모든 정신은 김필도의 헬칸에 집중돼 있었다.

‘박혔다!’

“차앗!”

헬칸이 나무에 박힌 걸 확인한 순간 강하게 고함을 내지르며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할케인의 얼굴엔 승리의 기색이 역력했다.

나무에 박힌 헬칸을 뽑는 시간이면 한 번의 공격을 하고 남는 시간이고, 제대로 된 한 번의 공격은 곧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김필도 앞에 선 그는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지금껏 김필도가 그랬던 것처럼 장작처럼 쪼개버릴 참이었다.

“끝이다, 루시안…….”

스릉!

푸욱!

양손에 힘을 주어 검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화끈한 느낌이 목에서 느껴졌다.

할케인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는 여전히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였다.

할케인은 시선을 내렸다.

상당히 완만한 곡선을 이룬 날을 지닌 특이한 검이 턱 아래쪽에 있었다.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검면을 타고 핏방울이 또르르 흘러 내려갔다.

“이건?”

그는 시선을 들었다.

김필도의 오른손은 여전히 이볼트와 나무를 파고 들어간 헬칸의 손잡이를 쥔 채고, 왼손은 단도의 손잡이를 역수로 그러쥔 채였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려 할케인을 보았다.

“괜찮은 무기지?”

김필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그러고는 오른팔과 왼팔을 동시에 끌어당겼다.

나무와 할케인의 복부에 박혔던 두 무기가 뽑혀 나오고 오른 다리를 축으로 김필도의 신형이 한 바퀴 회전했다. 수평으로 뉘어진 헬칸은 할케인의 목을 잘라내고, 왼손의 단도는 이볼트의 목을 갈랐다.

“커억!”

“크윽!”

처절한 비명과 함께 두 개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철컥!

할케인과 이볼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김필도는 단도를 도집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툭! 툭!

다섯 걸음가량 걸었을 때 비로소 두 개의 목이 떨어졌다.

“엄청나네.”

김필도에게서 20미터 떨어진 후방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야크 세 마리를 끌고 김필도를 따르던 아베다였다.

전쟁의 신 발탄.

그가 김필도가 용병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떠올린 단어였다. 김필도는 부상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학살을 감행했다.

“서둘러!”

김필도는 낮게 말하고는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북쪽으로 5백 미터가량을 이동했을 때 쿠다를 만났다.

“끝났어?”

“네.”

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끝났습니다.”

그때 왼편에서 전투기갑을 걸친 베른이 걸어왔다.

“수고했어. 이젠 어디로 가야 하지?”

“저걸 보십시오.”

쿠다는 바닥을 가리켰다.

김필도와 베른은 시선을 돌렸다.

“뭐지?”

김필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쿠다가 가리킨 곳에는 마치 땅속에 빛을 반사시키는 뭔가를 묻어놓은 것처럼 옅은 파란색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1, 2월의 달인 블루 문의 빛이 비추는 것 같았다.

“정령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정령의 길?”

“행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길이면 길이지 길이라고 들었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건 가보시면 압니다.”

“앞장 서.”

“알겠습니다.”

쿠다는 앞으로 나갔다.

정령의 길을 따라 한 시간쯤 걸었을 때였다. 정령의 길이 뚝 끊기고 일행 앞에 검은 어둠에 휩싸인 협곡이 나타났다.

“프라넬 대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어둠의 틈’입니다.”

“가보면 안다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

김필도는 협곡을 바라보았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어둠의 틈이라는 이름은 정말 잘 지은 것 같았다. 캄캄한 어둠에 휩싸인 협곡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건너편까지는 얼마나 되지?”

“좁은 곳은 3백 미터, 넓은 곳은 5백 미터가량 됩니다.”

“저 다리는 뭐야?”

김필도는 중간에 끊어진 다리를 가리켰다.

정령이 길이 있는 곳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오른편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는 줄과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다리가 건너편 협곡까지 이어져 있고, 왼편에는 중간에 뚝 끊어진 다리가 세워져 있었다.

“중간에 끊어졌다고 해서 끊어진 다리라고 불립니다.”

“쓸모없는 다리라고?”

“네.”

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기다려봐.”

김필도는 혼자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다리를 보고 있자니 문득 리모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골든 브리지가 떠올랐다.

남아 있는 다리 부분은 백 미터가량이었다.

“역시!”

끊어진 부분에 당도한 김필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곳에는 골든 브리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전부 이쪽으로 와!”

김필도는 일행을 불렀다.

잠시 후 쿠다와 베른, 아베다가 이야크를 몰고 김필도 곁으로 다가왔다.

“행칼은 저 아래쪽에 있어.”

김필도는 다리 아래를 가리켰다.

“협곡 바닥에 있단 말입니까?”

쿠다가 물었다.

“협곡의 아래쪽에 있는지, 아니면 절벽 중간에 있는지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입구는 여기야.”

“행칼이 어디에 있는지 그건 모르지만 입구는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게 입구를 가리키는 말이야.”

김필도는 다리 오른편 난간에 새겨진 글귀를 가리켰다.

‘절대적인 믿음은 마법을 불러온다!’

일행은 의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리모스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이것과 같은 다리가 놓여 있고, 저것과 똑같은 글이 새겨져 있어.”

“리모스라면… 문 대륙의 사라진 땅을 말하는 겁니까?”

베른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블랙칸에 오르며 일행에게 말했다.

“저 아래쪽 어둠 속에는 반드시 행칼이 있다는 사실 그 한 가지만 믿으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가자, 750!”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을 툭 쳤다.

쿠억!

블랙칸은 낮게 울음을 터뜨리더니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마, 마스터!”

“대, 대공 전하!”

쿠다와 베른은 질겁한 얼굴로 김필도를 불렀다. 하지만 김필도는 금세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미치겠네.”

베른은 쿠다를 보았다.

“마스터는 정말로 리모스에 다녀오신 거요?”

쿠다는 물었다.

“문 대륙 이야기는 많이 듣긴 했지만 리모스에 대한 건 오늘 처음이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거고. 가주님과는 친분이 아주 돈독하다는 거요.”

“저 안에 행칼이 있다는 말이구려.”

“그럴 가능성이 백 퍼센트요. 나 먼저 가겠소. 가자!”

베른은 이야크 고삐를 휘둘렀다.

휙!

베른이 탄 이야크 또한 미련 없이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네 생각은 어떠냐?”

쿠다는 옆에 있는 아베다에게 물었다.

“만일 행칼이 드러난 장소에 있었다면 지금쯤 관광지로 변해 있을 겁니다.”

“마법으로 숨겨져 있는 건 당연하단 말이냐?”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럼 그분을 믿어야 하겠구나.”

“지금은 믿고 따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좋다, 그렇게 해보자.”

“좋은 생각이십니다.”

베른과 아베다는 이야크에 올랐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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