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제10장 죽은 도시의 숨소리
“휴우!”
절대적인 믿음만이 마법을 불러온다는 말을 믿고, 김필도를 믿었다. 하지만 내려서자마자 가장 먼저 나온 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정말 행칼로 들어가는 통로였구나.”
쿠다는 경이로운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행칼은 정령의 길에서 흘러나왔던 그런 광채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방을 가득 채운 빛의 원천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대기 자체가 발광을 하고 있어.”
가장 먼저 뛰어내렸던 김필도가 중얼거렸다.
외부의 대기가 무색무미라면 이곳 대기는 푸른색을 띠고 있다. 물론 외부 세계처럼 냄새와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세계군요.”
두 번째로 뛰어내렸던 베른이 말했다.
“맞아. 여긴 완전히 죽은 세계야.”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고, 족히 백여 미터는 될 법한 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지만 생명의 흔적은 감지되지 않는다. 보통 나무가 있으면 새나 벌레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다. 완전하게 죽어, 숨 쉬는 자들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는 특이한 곳이었다.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았다.
리시아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는 같지만 비 오듯 흘러내리던 땀은 멈춘 후였다.
“앞장설 거야?”
김필도는 쿠다를 돌아보았다.
“저도 처음입니다.”
쿠다는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느낌 같은 거 없어?”
“오감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네도 그래?”
“네.”
“일단 가자고.”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았다.
일행은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행칼이 어떤 곳인지 알아?”
“인간, 드워프, 엘프가 정령 전사를 없애기 위해 만든 감옥입니다.”
“감옥이라고?”
“이곳 생활이 너무 힘들자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자들이 생겨났답니다.”
“그들의 정령 전사였다는 거야?”
“정령 전사들뿐만 아니라 인간, 드워프, 엘프 중에도 돌아가자고 하는 자들이 상당히 많았었는데…….”
“본보기가 된 모양이네?”
“인간, 드워프, 엘프는 원래 함께 살았는데,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흩어졌다고 하더군요.”
“드워프와 엘프는 자신들 또한 정령 전사들처럼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인간 곁을 떠난 거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령 전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프라넬 대평원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프라넬 대평원에는 정령의 기운이 거의 없는 혼돈의 상태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정령의 기운이 충만한 곳이라야 하는 거 아닌가?”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히 정령의 기운에 민감한 체질은 아니지만 물, 불, 바람, 땅의 4원소를 기본으로 하는 마법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정령의 기운을 알아차릴 정도는 된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정령의 기운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쿠다 역시 선대로부터 들은 게 전부라 이곳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고는 선조들 중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와 신병을 치료했다는 것뿐이었다.
“일단 누군가 머물렀다는 흔적을 먼저 찾아야겠네?”
김필도는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꺾었다.
“……?”
김필도는 엄지와 검지로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다. 나뭇가지는 새끼손가락 두께다.
그 정도면 가볍게 꺾어져야 하는데 나뭇가지는 쇠로 만들어진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필도는 힘을 주었다.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나고.
까앙!
마치 쇠가 부러질 때 나오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나뭇가지가 꺾였다.
“뭐야, 이거?”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나뭇가지를 보았다. 놀랍게도 이파리까지 달려 있는 나무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화석이었다.
쏴아악! 쏴아악! 쏴아악!
“응?”
느닷없이 바람 소리 비슷한 소리가 왼편에서 들려왔다.
김필도는 쿠다를 보았다.
“정령 폭풍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쿠다는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폭풍을 만들어내는 힘이 정령이란 말입니다.”
“그럼 저건 바람의 정령이 만들어낸 폭풍이라는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피해야 합니다.”
“어디로?”
“반대편으로 가야죠.”
“젠장! 달려! 750!”
김필도는 고삐를 힘껏 휘둘렀다.
쿠억!
두두두두! 두두두두!
블랙칸은 낫게 울음을 터뜨리더니 오른편으로 쏘아져 갔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베른이 탄 이야크와 쿠다와 아베다가 탄 이야크가 블랙칸을 따라 내달렸다.
쏴아악! 쏴아악! 쏴아악! 쏴아악!
정령 폭풍이 내는 소리는 주위를 삼키며 엄청난 속도로 나아갔다.
“말도 안 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던 김필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치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가 날아오는 것처럼 뒤쪽 하늘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바람의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무들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날아가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거대한 힘인데, 손가락보다 얇은 나뭇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화석 상태라서 흔들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정령 폭풍은 주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특이한 힘이었다.
“씨발! 달려!”
김필도는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차라리 모든 걸 부수는 게 낫지,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쫓아오는 거대한 힘은 더 섬뜩했다.
세 마리의 이야크는 미친 듯이 내달렸다.
10분 정도를 달렸을 때 일행 앞에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나타났다. 폭이 50미터 정도고 높이는 30미터가량 되는 바위 아래쪽에는 이야크 두 마리가 지날 정도의 길이 나 있었다.
“따라와!”
김필도는 지체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길은 아래로 경사가 져 있었다. 경사는 상당히 가팔랐다. 하지만 일행은 멈추지 않았다.
토치 마법을 펼쳐 불꽃을 만들어 전방을 비추며 빠르게 내달렸다. 5분가량을 달렸을 때였다.
비탈길이 끝나더니 널따란 공터가 나타났다.
“750 멈춰!”
김필도는 블랙칸을 세웠다.
“워!”
“워!”
이어 베른과 쿠다가 이야크를 세웠다.
김필도는 블랙칸에 탄 채로 공터를 둘러보았다.
“드디어 흔적을 찾았네.”
김필도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원형 공터는 지름이 20미터가량 됐는데, 벽에 횃불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 횃불도 화석이었다.
“으음!”
뒤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려오자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쿠다의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왜 그래?”
김필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힘이 넘칩니다.”
“정령 폭풍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긴 감옥이 아니라 정령 전사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기연의 장소입니다.”
쿠다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일 전에 김필도와 싸웠을 때 지금 상태였다면 결코 패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쿠다는 도발적인 눈으로 김필도를 보았다.
조폭으로 산전수전 다 겪고 조직의 이인자까지 오른 김필도가 쿠다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엥기고 싶은 모양이지?”
김필도는 차가운 눈으로 쿠다를 보았다.
“아닙니다.”
쿠다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쿠다는 한번 싸워보라고 부추겼다.
“나와 싸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하지만…….”
김필도는 블랙칸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공터 한편에 나 있는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살려주는 건 한 번이면 족해.”
부르르!
쿠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김필도의 말에 어려 있는 살기 때문이었다. 세 가지 마법 조합이 가능해지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자, 탄생의 원천이자 파멸의 힘인 혼돈의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혼돈의 기운에 살기가 실리자 파멸의 힘으로 변했고, 쿠다는 일상적인 두려움이 아닌 영혼만이 감지하는 원초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었다. 그가 격렬하게 몸을 떤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는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쿠다는 동굴 길로 들어가는 김필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동굴 길은 상당히 길게 이어져 있었다. 김필도의 손바닥에서 나오는 토치 불꽃을 이용해서 10여 분가량 갔을 때 일행은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 역시 나무와 횃불처럼 화석 상태였다. 혹시 이곳에 대한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위를 살폈지만 시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필도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20분 후 또 다른 공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공터는 처음에 보았던 공터와는 달랐다. 수많은 화석들이 뒤엉켜 있었다.
김필도는 토치 불꽃을 키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광장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석으로 변한 자들은 단순히 엉켜 있는 게 아니었다. 목이 잘린 자가 있고, 검에 찔린 자가 있고, 상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자도 있었다.
공터는 바로 싸움터였다.
“저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김필도는 광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딱히 누구를 지정하거나 대답을 듣기 위해 한 질문이 아니라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내뱉은 말일 뿐이었다.
“네 부륩니다.”
엉켜 있는 자들을 살피던 베른이 말했다.
“네 부류?”
“비슷하게 보이지만 입고 있는 옷이 조금씩 다릅니다.”
김필도는 화석으로 변한 자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베른의 말대로였다. 입고 있는 옷들은 조금씩 달랐다. 일상복인데 서로 다른 게 아니라 특정 조직을 나타내는 유니폼처럼 보였다.
“정령 전사들일까?”
김필도는 쿠다를 돌아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바람의 정령 전사 라쿤, 불의 정령 전사 세다크, 물의 정령 전사 쿠딕, 땅의 정령 전사 노르카가 있습니다.”
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힘을 합쳐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쉽지 않을 텐데 저들은 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고 있을까?”
“글쎄요, 그건…….”
“쿠다 자네처럼 힘이 강해지기 시작하니까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을 해서 싸웠던 걸까?”
“……!”
쿠다는 말없이 김필도는 보았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그는 지금도 계속 강해지는 중이었다.
“아니면 저렇게라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걸가?”
“모르겠습니다.”
쿠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 뭔가 적혀 있습니다, 대공 전하.”
오른편에서 베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블랙칸의 고삐를 놓고 베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김필도는 베른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돌 위에 검으로 새긴 듯한 그것은 고대어였다.
“저는 모르는 글입니다.”
“고대어야.”
“무슨 뜻입니까?”
“권능의 인장과 정령왕의 유물은 라쿤의 수신호위가 가지고 갔다라고 돼 있네.”
글은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글이 가리키고 있는 자는 지금은 김필도, 즉 과거 정령 전사의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모릅니다.”
쿠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자가 남긴 글로만 판단하면 권능의 인장이라는 것과 정령왕의 유물을 놓고 네 전사들이 싸운 것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권능의 인장이 뭔지는 알아?”
“모릅니다.”
“하면 정령왕의 유물은?”
“아마 제가 대족장님께 드린 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의 유물 같은 걸 말하는 거라는 거지?”
“네.”
“일단 가보자고.”
김필도는 토치 불꽃의 크기를 줄인 후 광장 한편에 나 있는 통로를 따라 걸었다. 통로 곳곳에서도 많은 화석이 발견됐다.
쿵!
다시 10여 분가량을 걸었을 때 일행의 귓전으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이곳 행칼은 방금과 같은 인위적인 소리가 들려올 수 없는 모든 것이 죽은, 아니 정지한 세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았다.
스아악! 쿵! 스아악! 쿵!
“무슨 소린지 아는 사람?”
또다시 특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김필도는 물었다. 하지만 베른, 쿠다, 아베다는 고개를 저었다.
“골 때리는 곳이네. 아무튼 서두르자고.”
김필도의 걸음이 빨라졌다. 알 수 없는 느낌이 밀려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30분가량을 걸었을 때 두 번째 공터가 나타났다. 그 공터 안 역시 많은 화석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단순한 공터가 아니었다.
벽면을 따라 책장이 놓여 있고, 책장 안에는 책 형태의 물건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토치 불꽃을 키운 김필도는 벽면으로 다가가 책 형태의 물건을 뽑아 들었다.
“석판이네.”
앞면과 뒷면에는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전부가 고대어였다.
김필도는 석판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내용은 정착민들의 역사였다.
석판을 끼워 놓은 그는 다른 석판을 뽑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정착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아니라 리시아와 알마니의 생사였다.
“응?”
석판을 뽑아 내용을 확인하던 김필도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가 멈춰 선 곳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호박색의 얇은 판이 나란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리모스에서 보았던, 하만티움으로 만들어진 종이 피루스였다.
#-정령 전사 제20기 52대 바르칸인 라헤나 드반드쉬가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