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으음!”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벌써 세 번째 보는 이름이다.
‘차원의 벽’을 세웠던 마법사 드반드쉬였고, 10인 위원회 초대 위원장도 드반드쉬였고, 지금은 정령 전사와 관련이 있는 드반드쉬를 보고 있다.
“바르칸이 뭐지?”
김필도는 고개를 들고 쿠다를 보았다.
“4대 정령 전사의 수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 직책도 있었어?”
“원래 4대 정령왕들은 정령 전사를 양성하고, 그들 중 가장 뛰어나고 충성심이 강한 한 명에게 정령 전사 전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권을 주었습니다. 그를 바르칸이라고 하였고, 바르칸의 징표로는… 끄응!”
말끝을 흐리던 쿠다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래?”
“이제 생각났습니다.”
“뭐가 생각났다는 거야?”
“권능의 인장 말입니다.”
“권능의 인장?”
“권능의 인장은 다름 아닌 바르칸의 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르칸의 신분을 나타내는 반지가 권능의 인장이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라는 건…….”
“단순히 신분을 나타내는 물건이라면 정령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리가 없잖아.”
“신분을 나타내는 것 외에 다른 힘이 숨어 있을 거란 말입니까?”
“……?”
김필도는 쿠다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피루스에 집중했다. 질문을 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권능의 인장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우리 정령 전사를 유인했다.
이곳으로 들어온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정령 폭풍이었다. 바람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정령 폭풍과 물의 기운으로, 불의 기운으로, 대지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정령 폭풍이 1시간 간격으로 몰아쳤다.
정령 폭풍은 우리 정령 전사들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우리는 힘에 심취했다.
우리의 힘이 궁극에 달했을 때 행칼에 한 가지 소문이 돌았다. 우리를 최강의 전사로 만들어주었던 그 정령 폭풍이 우리를 파멸시킬 거라는 소문이었다.
나는 소문의 진상을 파헤쳤다.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최강의 전사가 됐던 우리의 몸이 조금씩 굳어간다는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를 최강으로 만들어 주었던 정령 폭풍이었다.
바람, 물, 불, 대지의 폭풍.
그것은 다름 아닌 세월이었다.
물은 봄, 불은 여름, 대지는 가을, 바람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하루에 여섯 번씩 겪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령 폭풍은 여전히 우리의 몸을 최강의 상태로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강자들만 자신들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들을 불러 모아 정령 폭풍이 미치지 않는 거주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여기 지하세계다.
하지만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몸이 굳어가면서 화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월의 마법이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신병을 치료했던 것처럼 몸이 화석으로 변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여기서 탈출하기만 하면 화석으로 변하는 걸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우리를 이곳으로 밀어 넣었던 자들은 치밀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네 정령왕들이 숨을 거둔 시기에 맞춰, 화석으로 변하는 마법을 치료하는 힘이 권능의 인장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정령왕들의 죽음으로 구심점을 잃은 정령 전사들은 권능의 인장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나둘 죽어갔다.
그리고 싸움에서 죽은 자들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자들마저도 화석으로 변해갔다.
결국 나는 잃었던 권능의 인장을 회수했다.
소문처럼 권능의 인장에는 화석 마법을 풀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론이고, 네 명의 수신호위, 그리고 백 명의 호위 중 권능의 인장에 깃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권능의 인장에 힘을 숨긴 방법은 고대의 마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방법은 우리 옆에 있었다.
철족이 만들어주었던 신고.
지금껏 그 신고는 동시에 두 개 이상 운 적이 없었다. 그 신고를 전부 울린다면 행칼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찾아낸 방법도 무용지물이었다.
철족의 힘을 가진 자는 문 대륙에 있을 뿐이다. 아니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그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 전부를 제거하기 위해 이곳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었다.
이제 남은 자들은 어린 전사 1천 명에 불과하다.
정령 폭풍은 약한 자들보다는 강한 전사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나와 수신호위, 그리고 백 명의 호법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정령 폭풍에 덜 노출된 덕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머잖아 화석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없지만 1천 명의 어린 전사를 살릴 방법은 있다.
그 또한 그들이 꾸몄다는 걸 알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 이제 나는 어린 전사들에게 권능의 인장 안에 숨겨진 힘을 풀어낼 수 있는 절대초인을 찾아 우리를 깨워달라는 부탁을 하고, 영면에 들 것이다.
하늘이시어.
부디 나 라헤나의 바람을 들어주소서.
제52대 바르칸의 유서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랬군.”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행칼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조금 전 겪었던 정령 폭풍. 그것은 인간, 엘프, 드워프가 정령 전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힘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함정을 만들기 위해 권능의 인장에 석화 마법을 풀 수 있는 진짜 힘을 심어두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석화 마법을 푸는 걸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바르칸, 라헤나를 비롯한 네 명의 수신호위와 1백 명의 호법은 자신들을 희생시켜 1천 명의 아이들을 내보냈다.
그 어린 전사들이 바로 바로 쿠다와 아베다, 그리고 알마니의 선조들일 터였다.
김필도는 다른 피루스를 집어 들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리시아와 알마니를 구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집중해서 피루스를 읽어나갔다.
피루스를 전부 읽는 덴 1시간가량 걸렸다.
하지만 신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현재 유일한 단서는 철족이 만들어주었다는 신고였다.
“쿠다, 자네가 알고 있는 걸 말해봐.”
결국 김필도는 쿠다를 보았다.
“행칼 어딘가에 신성의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성의 장소란 말이지?”
김필도는 다시 서가를 뒤져 신성의 장소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여기 있네.”
30분간 책장을 뒤지던 그가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
그가 꺼낸 석판에 신성의 장소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지도의 시작은 그들이 있는 광장이었다.
김필도 일행은 지도에 나와 있는 신성의 장소를 찾아 동굴 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신성의 장소를 숨기기 위해 그런 듯 길은 상당히 구불구불했다.
때로는 같은 길을 다시 걷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2시간을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시야가 확 트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환한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행칼의 외부를 채우고 있는 그 광채였다.
“피라미드네.”
김필도는 공간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구조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집트에 있는 그런 거대한 크기의 피라미드는 아니었다.
한 변의 폭과 높이가 20미터가량이었다.
그리고 피라미드 각 변 앞에는 높이 5미터가량인 소형 피라미드가 서 있고, 그 소형 피라미드 위에는 커다란 물체가 세워져 있었다.
마치 절에 볼 수 있는 북 같았다.
김필도는 중앙 피라미드에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피라미드 꼭대기는 한 변의 길이가 3미터 가량인 정사각형 공간이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의식을 거행하는 데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단이 서 있다. 그런데 단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단이 아니었다. 높이 1미터, 면의 길이는 2미터인 정사각형이었는데, 각 면에 새겨진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김필도는 각 면을 돌며 그림을 살폈다.
그러다가 각 면에 그려진 그림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4원소를 형상화했다는 걸 알아냈다. 즉 단의 각 면은 물, 불, 바람, 대지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 형상으로 움푹 파여 있는 윗면 역시 무수한 그림으로 들어차 있었는데, 단의 가장자리에는 아래쪽의 소형 피라미드 위에 서 있는 북과 같은 형태의 작은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 구조물 역시 물, 불, 바람, 대지를 형상화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위를 다 살핀 그는 아래로 내려와 소형 피라미드 위로 올라갔다.
높이만 해도 2미터에 달하는 그것은 북처럼 생긴 구조물이 아니라 정말 북이었다. 북의 한쪽 면은 대형 피라미드 위쪽을 겨냥하고 있는 망원경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위쪽에 있는 소형 북처럼 4원소를 형상화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북을 만든 재료가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북 옆에는 북채가 놓여 있었는데 길이는 2미터가량이었다.
김필도는 북채를 들고 옆에 섰다. 그러고는 북채를 번쩍 들어 올려 후려쳤다.
터엉!
그러나 김필도가 원하는 북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북은 신병을 치료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소리가 나지 않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화석으로 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김필도는 북채를 바라보았다.
4대 원소를 형상화한 그림이 새겨진 북채는 화석으로 변한 나무를 만졌을 때와는 촉감이 달랐다. 그건 곧 북채는 화석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가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4대 원소를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졌다면 북을 치는 힘 또한 4대 원소 중 하나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물이니까.”
김필도는 물의 속성 마법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힘차게 북채를 휘둘렀다.
둥!
딱히 어떤 소리라고 정의하기 힘든 특이한 소리가 북에서 흘러나왔다. 일상적으로 듣던 북소리 같기도 하고, 수천, 수만 년 동안 한자리에 서 있던 빙하가 갈라지면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것은 억겁의 세월이 내는 소리였다.
둥!
북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 번째 북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북소리가 들려온 곳은 단 옆에 있는 작은 북이었다. 큰 북에서 쏘아진 음파가 작은 북을 때려 두 번째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김필도는 다시 북채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힘차게 북을 쳤다.
이번엔 한 번이 아니었다. 튀어나온 북채를 다시 휘둘러 연속해서 북을 쳤다.
둥둥둥! 둥둥둥!
웅웅웅! 웅웅웅!
둥둥둥! 둥둥둥!
큰 소리가 먼저 들려오고, 북의 떨림이 소리로 변해 퍼져나가더니 마지막으로 작은 북소리가 들려왔다.
북소리와 북의 떨림 소리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신성의 장소를 가득 채웠다.
“이젠 방법은 찾았고, 어떤 순서로 치느냐 하는 건데.”
김필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무렇게나 친다고 리시아나 알마니가 깨어나는 게 아닐 터였다.
“일단 알마니로 시험을 하는 수밖에. 베른!”
김필도는 베른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저 위에 보면 사람을 눕힐 수 있는 단이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베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마니를 안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베른은 피라미드 위쪽 단에 알마니를 뉘었다. 그사이에 김필도는 소형 피라미드를 돌며 마나를 확인했다. 시계 방향으로 물, 불, 바람, 대지의 순으로 놓여 있었다.
“됐습니다, 대공 전하.”
다시 원래의 물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베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마니를 살펴봐.”
김필도는 베른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는 북채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물의 속성 마법을 끌어올리며 힘차게 쳤다.
두웅!
우우웅!
둥!
“크억!”
나직한 비명이 위에서 들려왔다.
김필도는 얼른 북에 손바닥을 대서는 떨림을 죽였다. 북 표면의 떨림이 급격하게 멈추며 소리가 잦아들었다.
“생각났습니다, 마스터!”
조금 전부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쿠다가 번쩍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말해봐!”
김필도는 쿠다를 돌아보았다.
“중화를 시켜야 합니다.”
“중화는 어떻게 하는데?”
“대지의 마나는 모든 마나를 포용해냅니다.”
“대지의 마나를 베이스로 하고 그 위에 물의 마나를 입히면 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전부 다 치면 어떻게 되는데?”
네 개의 신고를 울리면 행칼이 깨어난다고 하였던 피루스의 내용이 떠올라 물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았어.”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겨 대지를 나타내는 소형 피라미드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대지의 속성 마법을 끌어올리고, 북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