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25화 (125/225)

# 125

둥둥둥둥! 둥둥둥둥! 둥둥둥둥!

총 열두 번의 북을 치고 이동 마법을 펼쳐 곧바로 물의 소형 피라미드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북을 치고, 불의 소형피라미드로 옮기고, 그곳에 불을 친 다음 다시 바람의 소형피라미드로 옮겼다.

네 개의 큰 북과 네 개의 작은 북이 쏟아내는 소리와 북이 울리면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섞여 들어가면서 신성의 장소는 소리로 들어찼다.

그 소리는 신성의 장소는 물론이고 행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김필도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고, 북소리는 수조를 채우는 물처럼 행칼을 채워나갔다.

“혼돈?”

알마니를 바라보던 베른이 신음을 내뱉었다.

알마니는 단 중앙에 파인 홈에 완전하게 잠긴 채였다. 그런 그의 몸 위쪽으로 검붉은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말로만 들었던 혼돈의 마나였다.

혼돈의 마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알마니의 몸속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30분가량이 흘렀을까. 알마니가 혼돈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30분이 흘렀다.

번쩍!

알마니의 눈이 떠졌다.

“깨어났습니다, 대공 전하!”

베른은 아래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때 김필도는 대지의 마나를 쏟아내는 북 앞에 서 있었다. 김필도는 북을 치기 위해 들어 올렸던 북채를 내렸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단순히 마나의 힘으로 치는 게 아니라 정신력까지 동원해야 가장 좋은 소리가 나오고 좋은 소리는 강한 혼돈의 마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알마니는 베른을 보며 물었다.

“그건 나중에 말해줌세. 그보다 몸은 어떤가?”

베른은 되물었다.

“컨디션 굿이에요.”

“다행이구먼. 옷 입게.”

베른은 가지고 왔던 옷을 내밀었다.

“심각한 일이 일어난 모양이네요?”

알마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옷을 걸쳤다. 옷을 걸치고 베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는데 김필도가 천으로 싼 리시아를 안고 올라오고 있었다.

“리시아 양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알마니는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신병이래.”

“신병이면 정령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그 병을 말하는 거예요?”

“알아?”

“아버지로부터 들었어요.”

“응!”

“신병을 고칠 수 있는 곳은 행칼밖에 없다고 했는데…….”

“여기가 행칼이야.”

“정말이에요?”

“우선은 몸부터 살펴.”

그렇게 말하고 맨 꼭대기에 올라선 그는 단 가운데 사람 모습으로 파인 곳에 리시아를 집어넣고, 천을 벗겼다. 땀은 멈췄지만 리시아의 상태는 여전히 같았다.

그는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리시아는 바람의 정령왕 실레카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물리력을 이용한 싸움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싸우는 싸움이라 리시아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녀는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이제 그만 포기해라. 비록 네 육체는 사라지겠지만 너는 나를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럴 순 없어, 실레카. 이건 내 육체야. 넌 내가 태어나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내가 살아오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어. 네가 내 육체를 차지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어.

리시아는 차갑게 소리쳤다.

-그럼 결국 우리 둘 다 손해다, 계집.

-차라리 그게 나아, 이 염치없는 계집아! 넌 아무것도 아니야. 절대 내 삶에 끼어들 수 없어.

-어리석은 것. 그나마 영혼의 흔적만이라도 남겨주려 했거늘.

실레카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아!’

리시아는 절망했다.

사실 그녀가 가사 상태에 빠진 것은 실레카와의 싸움 때문이었다. 정신력을 동원한 싸움이 격해지면서 육체를 움직이는 기초적인 힘마저도 전부 끌어다 썼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실레카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실레카의 힘이 강해진 이유가 행칼에 부는 정령 폭풍 때문이란 사실을 그녀는 물론이고 실레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리시아의 영혼이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었다.

-너도 마찬가지다, 실레카. 날 소멸시키게 되면 너는 불완전한 정령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아마 불완전한 최초의 정령왕이 되겠지.

-고치면 된다, 계집! 이제 끝이다. 각오하라!

실레카는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두웅!

바로 그때였다.

영혼을 때리는 거대한 충격파가 리시아의 귀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헉!

실레카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단순히 영혼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에는 대지의 마나가 내포돼 있어 살기를 누그러뜨려버렸다.

-어떤 놈이냐?

둥둥둥둥! 둥둥둥둥! 둥둥둥둥!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곧이어 4대 원소의 기운을 머금은 소리가 무차별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서, 설마 이 소리는? 호, 혼돈!

실레카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각각의 기운을 내포한 소리는 무서운 기세로 섞여들면서 전혀 다른 새로운 기운으로 바뀌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정령의 자궁이라 할 수 있는 혼돈이었다.

자궁 안에 있는 태아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아니 엄마의 도움이 없다면 살 수가 없다.

-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실레카는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혼돈을 만들어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제, 제발 부탁이야. 멈추게 해줘!

하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레카는 리시아의 영혼을 보았다.

-내가 이겼군요, 실레카.

리시아는 차갑게 말했다.

-설마 네 개의 신고를 전부 울릴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실레카는 순순히 시인했다.

처음 만들어지는 혼돈의 마나는 태초의 상태를 말하고 정령에게 태초의 상태란 어린 정령을 의미한다.

즉 실레카를 어린 정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혼돈의 마나인 것이다. 그녀가 다시 성인 정령이 되려면 수천 년의 세월과 수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속박이 된 상태라면 다르다. 속박자의 의지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속박자가 있다면 설령 혼돈의 마나에 갇히더라도 어린 정령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속박자란 다름 아닌 계약자다.

실레카가 이 난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리시아와 계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어린 정령이 된다는 말인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우린 한 몸속에 있다는 걸 잊었어요?

-그렇구나

실레카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약을 해주면 뭘 주실 거죠?

-나와 계약을 해주겠단 말이냐?

실레카는 의아한 얼굴로 리시아를 보았다.

-나는 인연을 믿기 때문이에요.

-인연?

-실레카와 내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수억, 아니 수십억 분의 1의 확률도 안 되겠지.

-그런 확률을 뚫고 만났는데, 이렇게 끝낸다는 건 인연에 대한 모독이잖아요.

-그래서 계약을 해주겠다고?

-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넌 육체를 잃을 수도 있다.

-실레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순진하구나.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는 사람도 있는걸요.

-루시안 말이냐?

-네. 하지만 전 계약을 하게 되면 나는 실레카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루시안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죠.

-좋다, 계약하자. 그리고 네 육체는 걱정할 필요 없다.

-고마워요, 실레카.

리시아는 빙긋 웃었다.

리시아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10분 후였다.

“깨어났어요, 루시안.”

리시아는 낮게 말했다.

뚝!

그러자 행칼을 가득 채웠던 혼돈의 북소리가 한 번에 그쳤다. 북소리의 여운은 상당히 오래갔다.

김필도는 급하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괜찮아요?”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김필도는 리시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리시아의 얼굴과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리시아는 김필도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금 리시아 양은 알몸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저 아래쪽에는 베른을 비롯한 늑대 네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있고요.”

“루시안 공자가 가려주고 있잖아요.”

리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다시 살아나게 해준 김필도에게 너무 고마워서였다.

“배 안 고파요?”

“배요?”

“리시아 양은 가사 상태에 빠진 2주 동안 물 말고는 먹은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2주 동안이나 가사 상태에 빠졌어요?”

“네.”

꼬르륵!

김필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시아의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난 밥심으로 사는데.”

“그러니까 어서 옷 입고 나가요. 여긴 있을 곳이 못 되는 아주 빌어먹을 곳이에요.”

김필도는 가져왔던 옷을 건넸다.

“알았어요.”

리시아는 빠르게 옷을 입었다.

옷을 입은 리시아와 함께 계단을 내려간 김필도는 곧바로 일행과 함께 신성의 장소를 나섰다.

신성의 장소는 또 다른 공터와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도 역시 화석이 있었는데, 다른 곳과는 달랐다. 안쪽의 다섯 명을 중심으로 백여 명이 원을 그리며 둘러앉은 채였는데,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뭔가를 기원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은 바르칸인 라헤나 드반드쉬와 수신호위 네 명, 그리고 백 명의 호법이었다.

김필도는 안쪽의 네 사람 앞에 있는 이를 보았다. 이름에서 대충 짐작을 했지만 라헤나는 여자였다.

“미인박명이라더니.”

라헤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아니었군요.”

네 개의 신고가 울리면 행칼이 깨어난다고 하여 일말의 기대를 했다. 그런데 저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화석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기는 길 아는 사람?”

김필도는 일행을 보며 물었다. 이곳에 오면 나기는 길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로 가면 돼요.”

김필도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리시아였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정면이었다.

“실레카가 아는 모양이죠?”

김필도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김필도 일행은 실레카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둑!

김필도 일행이 자리를 뜬 후, 나직한 소리가 화석들이 있는 곳에서 흘러나왔다.

툭! 툭!

이번에는 두 번이었다.

후우-!

그리고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화석들 사이에 흘러나왔다.

그것은 죽음의 도시 행칼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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