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제1장 바르칸
스아악! 쿵! 스아악! 쿵!
김필도 일행이 그 특이한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신성의 정소를 떠난 지 1시간 후, 리시아의 인도로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일행은 황당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 주위에는 수백 그루의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니 빼곡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새가 채 3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잎은 없지만 각 나무는 울창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가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가지들은 교묘하게 엇갈려, 거대한 벽을 형성했다.
“나무가 저렇게 자랄 수 있어요?”
알마니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불가능해요.”
리시아는 싸늘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뭐죠?”
스아악! 쿠웅! 스아악! 쿠웅!
“저건 나무들이 움직이는 소리예요.”
또다시 같은 소리가 들려오자 리시아가 말했다.
“나무가 움직여요?”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움직이는 나무. 아니 자아를 가진 나무에 대해서는 책에서 보았다. 그런 나무를 일컬어 트랜트 또는 엔트라고 부른다고 했다. 문제는 트랜트와 엔트는 살아 있는 나무인데 반해 이곳에 있는 나무는 전부가 화석이라는 것이다.
“원래 정령 전사가 죽으면 정령기는 그의 몸을 빠져나와 대기층으로 흩어지거나 새로운 대상을 찾아 정착하게 돼요. 그때 정령기를 받아들인 나무가 세월이 흐르면 트랜트나 엔트가 되고, 때로는 나무의 요정인 드라이어드가 되기도 해요.”
“그럼 저들은 어떻게 된 거죠?”
“이곳 행칼은 정령 전사는 물론이고 정령기까지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결계가 쳐져 있어요.”
“그 정령기들이 나무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나무는 정령 전사들보다 수백 년은 더 살아남았을 테니까, 그랬을 거예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리시아가 설명을 해주는 것은 바람의 정령왕 실레카의 지식이었다.
“정령기를 받아들인 나무는 엔트나 트랜트처럼 성장한다는 거군요.”
“맞아요.”
“저 녀석들도 인간처럼 혼돈의 마나로는 깨울 수 없나 보죠?”
“그런 것 같아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릴 막아선 이유는 뭐죠?”
“글쎄요.”
리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도 나무들이 왜 이곳으로 모여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해치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적의가 감지돼야 하는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스아악! 쿵! 스아악! 쿵!
김필도가 다가서자 그 정면에 있던 나무 몇 그루가 좌우측으로 물러나며 통로를 만들었다. 그 공간은 이야크가 지나갈 정도였다.
“뭐하자는 거냐?”
김필도는 나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십니다, 바르칸.
머릿속으로 사념이 흘러들었다.
-깨어난 건가?
김필도는 머릿속으로 물었다.
-우린 잠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 상태로 계속 살아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나?
-실레카 님께서 한 말이 대부분 맞습니다.
-정령 전사의 몸을 떠나 나무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나무로 들어간 후로 수백 년이 지나자 우린 조금씩 성장하였고, 나무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석 마법이 걸린 상태라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는 없었습니다.
-정지된 상태였단 말이구먼.
-그래서 처음엔 해칠 생각이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뭔가?
-대공께서 제20기 53대 바르칸임을 알게 됐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바르칸이 아니네.
-행칼에 걸린 화석 마법을 풀어주신 분은 제20기 53대 바르칸이라고 전대 바르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전대 바르칸이면 라헤나 그분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 자네들은 화석 마법에서 벗어나고 있는 건가?
-머잖아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겁니다.
-행칼은 꽃향기가 진동하는 장소가 되겠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가 될 겁니다.
-변화할 행칼의 모습이 궁금하군. 그런데 내가 행칼에 걸린 마법을 풀어준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냥 알게 됐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그렇구먼. 난 저들과 함께 나가고 싶네.
-길을 트겠습니다! 그리고 전 벨고릅니다, 바르칸.
-만나서 반가웠네, 벨고르.
휘이익!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스아악! 쿠웅! 스아악! 쿠웅! 스아악! 쿠웅!
뭔가가 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김필도 앞으로 수백 미터에 달하는 길이 나타났다. 나무들이 좌우측으로 물러나며 생겨난 통로였다.
“가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떻게 한 거죠?”
리시아는 블랙칸의 고삐를 잡고 김필도 곁으로 가며 물었다.
“길을 터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렇게 길을 만들어줬다는 거예요?”
“네.”
“말이 통해요?”
“아마도.”
“나도 통할까요?”
“걸어 보든지요.”
“나 리시아 히나시스예요.”
리시아는 나무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바람의 종족인가?
“네.”
리시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네, 리시아. 난 벨고르네.
“나도 반가워요.”
수많은 사념이 동시에 흘러들어오자 리시아는 활짝 웃었다.
-잘 가게.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인사를 하며 통로로 들어섰다.
그녀에 이어 알마니와 베른, 그리고 쿠다 일행이 나무가 만들어준 통로로 들어섰다.
일행은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나가는 길과 이어져 있는가?
김필도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바르칸.
벨고르의 사념 대로였다. 나무들이 만들어준 길 끝에 이르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낭떠러지 아래는 깊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나가는 건가 봐요.”
“그러게요. 정령기가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정령 전사의 몸에서 빠져나온 정령기들은 마나에 불과하다. 마나 상태인 정령기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다.
-다음에 봐, 벨고르.
손을 흔든 김필도는 리시아를 블랙칸에 태우고 따라 올랐다. 그리고 블랙칸을 탄 채 낭떠러지로 뛰어들었다. 이어 알마니와 베른이 탄 이야크와 쿠다, 아베다가 탄 이야크가 연이어 낭떠러지로 뛰어들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동자에서는 은빛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은발, 은빛 눈동자를 가진 이 미녀는 다름 아닌 제20기 52대 바르칸인 라헤나 드반드쉬였다.
김필도가 네 개의 신고를 쳐서 만들어낸 혼돈의 마나는 그들에게 걸려 있던 석화 마법을 해제해주었고, 결국엔 깨어났다.
김필도는 그들이 깨어나기 전에 지나치는 바람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라헤나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돌이 돼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뎠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다만 화석으로 변한 나무의 상태로, 최소한 수백 년은 지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헬칸의 후예일까요?”
투명하게 맑은 목소리가 라헤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 개의 신고를 전부 울리기 위해서는 철족의 실전 마법을 익혀야만 합니다, 바르칸.”
“이제 나는 바르칸이 아니에요, 다란. 지금은 헬칸의 후예인 그가 바르칸이에요.”
“라헤나 님은 영원히 저의 다르칸입니다.”
다란이라 불린 노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선 안 돼요.”
“그에겐 권능의 인장이 없습니다, 바르칸.”
“권능의 인장과는 상관없어요. 나는 행칼에 걸린 저주를 풀어주는 자를 차기 바르칸으로 삼겠다고 맹세했어요. 설사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그 맹세는 지켜져야 해요. 우린 그를 바르칸으로 모시고 다시 시작해야 해요. 지금부터 난 바르칸이 아니라 라헤나예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
하지만 다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란!”
라헤나는 간절한 얼굴로 다란의 이름을 불렀다.
“알겠습니다, 바르……, 아니 라헤나.”
“고마워요, 다란.”
“천만에요.”
“자! 이제 여긴 벨고르에게 맡기고 우린 바르칸을 따라가도록 해요.”
라헤나는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녀를 비롯한 105명의 정령 전사들은 김필도 일행이 뛰어들었던 낭떠러지 앞에 섰다.
“라헤나!”
다란은 라헤나를 불렀다.
“말하세요.”
라헤나는 고개를 돌려 다란을 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살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남은 수명 말인가요?”
“네.”
“그건 아무도 몰라요. 어쩌면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생각보다 오래 살 수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건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 거예요.”
라헤나는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다란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라헤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구먼.”
이윽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몸을 던졌다.
그에 이어 정령 전사 103명이 차례로 뛰어들었다.
아득한 세월 전에 살았고, 본인들의 나이조차 모르는 105명의 정령 전사들. 그들의 새로운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 * *
“혹시 놓친 거 아니냐?”
하다크는 바탈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를 비롯한 최상급 다르 2백 명이 이곳에 도착한 건 10일 전이고, 리시아 일행이 어둠의 숲으로 들어섰다는 보고를 받은 건 일주일 전이다. 일주일이면 모습을 드러내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닙니다, 가주님. 그들은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렇듯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달빛 길 말고는 죽음의 숲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면 도대체 어딜 갔단 말이냐?”
“왜 이렇게 늦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죽음의 숲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접니다, 교관님!”
그때 다르 한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교관님!”
“인원은?”
“여섯 명 그대롭니다.”
바탈리는 고개를 돌려 하다크 미들헤임을 보았다. 곧바로 공격을 시작할 건지, 아니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건지 지시를 받아야 했다.
“우린 최상급 다르다, 바탈리.”
“알겠습니다, 가주님.”
바로 시행하라는 명령이었다.
바탈리는 보고를 하러 온 사내와 함께 김필도 일행이 나타났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김필도 일행을 발견한 것은 5분 후였다. 부하의 보고대로 김필도 일행은 전과 마찬가지로 6명이었다.
“1조는 시작하라!”
잠시 김필도 일행을 바라보던 바탈리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어둠의 상단 다르 2백 명은 조당 20명씩 10개 조로 나뉘어 달빛 길에 배치된 상태였다.
바탈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르들은 일제히 어둠의 전투기갑 프라이온을 착용했다.
“멈춰!”
김필도는 그 자리에 멈춰 서며 일행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알마니와 쿠다는 이야크를 세웠다.
“디자이너, 어때?”
김필도는 알마니를 돌아보았다.
“각성하기 전 저와 비슷한 자들 같은데요?”
“최상급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이라고?”
“그래요, 대공 전하.”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