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저, 정말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맞느냐?”
저런 엄청난 조력자가 있는 자가 그동안 천둥의 성에서 숨어 살았다는 사실이 바탈리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고스트 킹 때문인가 보지?”
“그자의 이름이 고스트 킹인가 보구나.”
“파라온은 마신의 지위까지 올랐던 최고의 전사였어. 사는 곳은 내가 차고 있는 팔찌 안이고.”
김필도는 오른손을 가리켰다.
정령의 방패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고스트 킹을 불러내는 데 전투기갑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전투기갑이 파라온이 있는 팔찌를 감싸버렸기 때문에 고스트 킹의 소환이 불가능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미리 불러내고 난 다음에 전투기갑을 걸치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널 잘못 알고 있었구나.”
“맞아. 너희들은 크게 잘못 알고 있었어. 아니 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하지만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앗!
김필도가 있던 자리에 깊은 자국이 남았다.
광속의 바람 라콰에 몸을 실은 김필도의 신형은 질풍처럼 바탈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차앗!”
바탈리는 검을 오른편으로 휘둘렀다. 자리를 떠난 김필도가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와 헬칸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앙!
“큭!”
둔탁한 소성과 함께 바탈리의 신형이 오른편으로 2미터 밀려났다.
휙!
김필도의 신형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따라붙었다.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그가 얻은 또 하나의 능력은 마법의 지속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전엔 한 번의 명령으로 한 번의 동작밖에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만두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마법을 펼친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
그가 처음과 같은 속도로 바탈리를 따라붙을 수 있는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콰앙!
“크윽!”
두 번째 부딪침에서는 더 큰 충격이 바탈리 내부를 뒤흔들었다. 이번에 바탈리가 물러난 거리는 5미터였다.
휘이익!
하지만 김필도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세 번째 충돌이 있었다.
“크윽!”
바탈리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내부가 찢겨 나가며 식도를 타고 피가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건 아냐.”
바탈리는 절망적인 얼굴로 검을 바라보았다.
피를 넘길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면 가장 먼저 검에 문제가 생겼어야 한다. 하지만 검은 멀쩡하다. 그런데도 마나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엄청난 충격파가 몸속을 헤집어 놓은 것이다. 난생처음 겪는 엄청난 기술이었다.
“전투기갑을 무력화시키는 기술 중의 하나인 대지의 마법이야.”
“대지의 마법이라고?”
“마른 땅에 물 주기 마법이라고도 해.”
다시 바탈리를 따라붙은 김필도는 힘차게 헬칸을 휘둘렀다.
콰앙!
“커억!”
바탈리의 입에서 피 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비 오는 날 산을 생각해 봐.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산은 형태가 변하지 않아. 하지만 물은 계속 땅속으로 스며들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땅이 물을 머금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산사태로 이어지고 산은 제 모습을 잃게 돼.”
“전투기갑이 산이란…….”
“맞아!”
휙!
콰앙!
“컥!”
붉은 덩어리 하나가 바탈리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속에는 잘려 나간 내장까지 섞여 있었다.
바탈리는 절망했다.
지금껏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넘기는 피에 내장이 섞여 있고, 다리에서는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크아아악!”
멀리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도 당했군.”
바탈리는 피식 웃었다. 조금 전 그것은 가주 하다크 미들헤임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조금 전 숲으로 들어간 마족이 분명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난 할 말이 없다.”
바탈리는 체념했다. 검을 들어 올릴 힘도 없을 뿐더러 설령 들어 올린다고 해도 대검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별거 아냐. 내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를 해친 자가 너희들인지 그게 궁금해서.”
바탈리의 눈에 반짝 광채가 어렸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빛이었다.
“나는 모른다!”
일단은 모른다고 해야 살아날 구멍이 보일 거라는 사실을 바탈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헬칸을 내리찍었다.
“아, 아니다. 네 외조부를 없앤 자는…….”
바탈리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스악!
하지만 그의 외침은 늦고 말았다.
“크아악!”
헬칸은 바탈리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너 아니더라도 내 질문에 대답해줄 놈들은 아주 많아.”
김필도는 바탈리의 몸통에 헬칸을 문질러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잠시 바탈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헬칸을 어깨에 걸치고 고스트 킹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고스트 킹 앞에는 옅은 금발 노인의 머리가 몸통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수고했어.”
-이자가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가?
고스트 킹은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김필도가 있던 곳에서 여기까지는 1킬로미터 정도 된다. 이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감각으로 알아내기는 불가능할 만큼 먼 거리다. 그런데 김필도는 마법사가 있다며 없애라고 했던 것이다.
그가 이곳에 있는 마법사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궁금했다.
“나무가 알려줬어.”
-나무와도 통하게 된 건가?
“그런 것 같아.”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능의 주인은 괴물이 돼 가고 있구나.
“아직 너 정돈 아니잖아.”
-그건 맞다, 주인.
“주인?”
-권능의 주인이란 말이 너무 길어서 잘랐다.
“쿡! 들어가, 인마.”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손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체로 변한 고스트 킹은 마신의 팔찌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김필도는 커다란 나무에 기대 앉아 일행을 기다렸다. 20분가량 기다렸을 때 리시아 일행이 다가왔다.
“이 사람 누구죠?”
김필도는 하다크 미들헤임의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올랜도 미들헤임의 아버지요.”
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설마 어둠의 상단의 가주인 하다크 미들헤임이 이곳에 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김필도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해야 했다.
“이제 어둠의 상단엔 누가 남았죠?”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하다크 미들헤임의 아버지인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이 남았어요.”
“어떤 잔데요?”
“10인 위원회 위원 중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 네 명을 4대 봉공이라고 하는데, 그 4대 봉공의 우두머리예요. 7클래스 마법사고요.”
“그러면 머잖아 그 영감도 보겠군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다혈질이지만 무모한 성격은 아니에요.”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란 말이군요.”
“아마도.”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작정 기다리진 않겠죠?”
“어쌔신을 보내든지 그가 보유한 정원사를 보낼 거예요.”
“그러면 나도 심심하진 않겠네요.”
김필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김필도를 바라보던 리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미소 속에 칼날보다 더 싸늘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살기였다.
제2장 믿을 수 없는 일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50여 기의 전투마가 빠른 속도로 어둠 속을 질주했다. 전투마 위에 있는 자들 대부분은 전투기갑을 걸친 기갑기사들이었다. 쫓기는 중인 듯 기갑 기사들은 말을 달리면서 뒤를 흘끔거렸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보다 더 묵직한 소리가 기사들 뒤편에서 울려 퍼졌다. 그건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무섭게 질주하는 이야크였다.
이야크의 수는 21마리였다. 이야크 위에는 마족의 전투기갑인 크레디온을 걸친 자들이 대검을 뽑아 든 채 앉아 있었다. 50여 기의 기사를 쫓아 내달리고 있는 이들은 북로군벌을 장악한 블러드 데빌단 대원들이었다.
앞에서 도망치는 자들은 올가 드보르칸 남작을 비롯한 드보르칸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대원들은 활을 쏴라!”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던 마족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블러드 데빌단 4조 조장인 케이안이었다.
케이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족들은 일제히 이야크 옆에 걸어두었던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슉! 슉슉슉! 슉슉!
사거리 1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화살이 어둠을 뚫고 쏘아져 갔다.
“화살입니다, 화살이 날아옵니다.”
뒤편에서 달리던 기갑 기사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돌아보지 말고 달려! 계속 달려!”
고함을 내지르는 올가 드보르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볼삭 영지를 출발할 때 인원은 기사 1천5백 명, 마법사 5백 명, 기시와 마법사의 가족까지 합치면 3천여 명에 달했다.
출발 후 5일 동안은 별일 없었다. 그런데 6일째 되던 날 적의 추격대가 따라붙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본대에는 기사들의 가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전투를 할 수는 없었다. 본대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적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1백 명의 기사가 자원을 했다. 놈들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50명의 기사가 죽고, 쫓아오는 자들이 인간이 아닌 마족이란 사실도 알았다.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되는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 본대를 떠나올 때 일 인당 두 필의 말을 챙겼고, 절반의 기사가 죽으면서 남긴 전투마를 이끌고 프라넬 대평원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이곳까지 오면서 각각 세 마리의 전투마를 버렸다. 이제 남은 전투마는 각각 한 마리씩.
얼마나 버텨줄는지…….
“그래도 2천9백 명의 목숨을 구했으니까.”
슈우욱! 슈우욱! 슈우욱!
푹! 푹푹푹! 푹푹!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 땅에 박히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캑!
그리고 전투마가 내지르는 비명도 들려왔다. 사거리가 1천 킬로미터나 나오는 마족의 화살이라고 하지만 전투기갑은 뚫지 못했다. 하지만 전투마에 맞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달려라! 돌아보지 마라!”
올가 드보르칸은 고함을 내지르며 채찍질을 했다.
지금으로썬 낙마하는 자를 데려가는 방법은 없었다. 전력으로 달리는 전투마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을 뿐더러, 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지체하는 순간 모두가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낙마하는 기사가 만일 살아 있다면 적당한 장소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추격대를 피해 본대로 찾아오기로 했다.
또다시 화살이 날아오고 서너 마리의 말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올가 드보르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달려라! 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그녀는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저 앞에 불빛입니다, 불빛이 있습니다!”
기갑 기사 한 명이 고함을 내질렀다.
올가 드보르칸은 고개를 들었다. 기갑 기사의 말처럼 저 멀리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말은 어때?”
올가 드보르칸은 소리쳐 물었다.
“한계에 달했습니다! 더 이상은 무립니다!”
절망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말이 쓰러지면 저기 불빛을 향해 달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우렁차게 소리쳤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기갑 기사들은 온 힘을 다해 말을 달렸다.
히히힝! 히히힝! 히히힝!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달리던 말들이 일제히 고꾸라졌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차앗!”
“타앗!”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기갑 기사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그들은 말 등을 박차고 날아올라 지면으로 내려섰다.
“달려!”
기사들은 전력을 다해 불빛을 향해 쏘아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