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헤이스트(Haste)!”
올가 드보르칸은 헤이스트 마법을 펼치며 기갑 기사들과 보조를 맞췄다. 하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속도는 말보다 훨씬 느렸다. 뒤쫓아 오던 마족들과 점점 가까워졌다.
1킬로미터에 달했던 거리가 금세 7백 미터로 줄어들고, 7백 미터는 곧 5백 미터로 줄어들었다.
“활 중지!”
케이안은 버럭 소리쳤다. 전투기갑을 걸치고 있어 먹히지도 않는데 굳이 화살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전투마가 없어졌으니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원들은 사냥 대형을 변경하라!”
케이안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이야크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반원을 그렸다. 그 상태로 블러드 데빌단은 올가 드보르칸 일행을 쫓아 내달렸다.
“누굴까요?”
알마니는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올가 드보르칸 일행이 보았던 불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필도 일행의 모닥불이었다.
“말 시키지 마.”
김필도는 모닥불 위쪽 삼발이의 쇠사슬에 걸린 무쇠 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이렇듯 무쇠 솥에 집중하는 이유는 휴도니아 대륙 최초로 대망의 청국장을 끓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국장의 기본 재료는 펠콘의 사장에서 구입했던 콩 페이스트였다.
“죽인다!”
김필도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혔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제법 청국장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이제 송송 썬 파와 매운 고추만 집어넣으면 청국장은 완성될 것이다.
“빨리 좀 되라.”
김필도는 초초한 얼굴로 손바닥을 비볐다.
“대공 전하!”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김필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레?”
40여 명의 기갑 기사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들의 선두에는 함께 문 대륙을 다녀왔던 올가 드보르칸이 있었다.
김필도는 의아한 얼굴로 올가 드보르칸을 비롯한 기갑 기사들을 보았다. 그가 알기론 드보르칸 후작령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쪽에 있다. 그런데 올가 드보르칸을 비롯한 기갑 기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건 곧 쫓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누가 기갑 기사 50명과 마법사가 포함된 일행을 쫓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바로 그때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크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아네요?”
리시아는 놀랍다는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문 대륙에 있을 때 지겹게 들었거든요.”
그때 올가 드보르칸 일행이 모닥불 가로 다가왔다.
“남작이 여긴 웬일인가?”
김필도는 올가 드보르칸을 바라보며 물었다.
“쫓기는 중이에요.”
“이야크를 타고 있는 자들인가?”
“네.”
“기갑 기사 50명과 6클래스 마법사가 포함된 일행을 쫓는 자가 어떤 자인지 궁금하군.”
두두두두! 두두두두!
김필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이야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김필도는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야크에 타고 있는 자들은 검은 전투기갑을 걸친 마족들이었다. 올가 일행을 잡았다고 생각한 듯 마족들은 이야크를 천천히 몰았다.
“휴도니아 대륙에서 마족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려 올가 드보르칸을 보았다.
“죄송해요, 전하.”
올가 드보르칸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김필도가 그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문 대륙에서 돌아와 아직 집에도 가지 못한 사람을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미안한 건 아는가?”
“바로 떠날게요.”
올가 드보르칸은 뒤편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기사는 드보르칸 기사단 단장 벌컨 쿨토 뱅글러 자작이었다.
“알겠습니다, 소공녀님.”
벌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편의 기갑 기사들을 보았다.
“자네들이 떠나면 우리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김필도는 블랙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건…….”
올가 드보르칸은 할 말이 없었다. 김필도 일행의 생사를 결정짓는 건 그녀가 아니라 마족들이다.
‘당신들은 상관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아예 오지를 말았어야 했네, 남작.”
“죄송해요, 대공 전하.”
올가 드보르칸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남작은 내게 크게 빚졌다는 것만 알면 되네.”
김필도는 블랙칸에 올랐다.
“저도 가야 해요?”
올가 드보르칸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리시아가 김필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청국장 냄새 싫어요?”
“저거요?”
리시아는 김을 뿜어내고 있는 무쇠 솥을 가리켰다.
“네.”
“글쎄요. 그게…….”
리시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쇠 솥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맡기 힘들 정도로 그 냄새가 독특했다. 하지만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냄새가 역해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리를 뜨고 싶을 뿐이었다.
“냄새는 조금 독특해도 맛은 좋아요. 그리고 알마니 자넨 저들에게 카판이나 대접해드려.”
“알았어요, 대공 전하!”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판 내릴 준비를 했다. 그 사이에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이야크 창 라콰를 꺼내 조립하여 안장 오른편에 장착하고 헬칸을 꺼내 왼편의 검을 끼우는 부분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그의 다리와 헬칸의 무게 조절기를 최대로 올렸다. 그러자 그와 헬칸의 무게가 190킬로그램으로 늘어났다.
프릉!
갑자기 무게가 두 배 이상 늘어나자 블랙칸은 깜짝 놀라 투레질을 했다.
“괜찮아.”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을 쓰다듬으며 마족들 앞으로 몰아갔다.
김필도가 블랙칸을 몰고 다가오자 마족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들은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고 늘어선 상태였다. 인간들 중 누군가가 도망치면 곧바로 튀어 나가 격살할 수 있는 진형이었다.
마족들은 김필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간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네.”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블랙칸을 멈췄다.
그가 멈춘 곳은 마족과 1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서서 김필도는 마족들을 가만히 살폈다.
사실 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알기론 마족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올 이유가 없다. 만일 마계에서 휴도니아 대륙의 침략 계획을 세웠다면, 마계10군단의 군단장과 부군단장이었던 히데우스나 이카렌이 몰랐을 리가 없을 테고, 그들은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그건 곧 마계의 휴도니아 대륙의 침략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거나, 저들이 마계에서 출병한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마계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면 문 대륙에서 활동하던 블러드 데빌단밖에 없을 터였다.
“활동 영역을 휴도니아 대륙으로 넓혔나 보지?”
김필도는 슬쩍 떠보았다.
“무슨 소리냐, 벌레.”
지휘관의 성격에 따라 부대원들의 성향이 바뀐다고 하는 말은 맞았다. 물론 마족들은 원래부터 인간을 무시했다. 하지만 벌레로 칭할 정도로 경멸하진 않았다.
그런데 칼베리언이 단장이 되고, 마족과 천족 외에는 벌레 취급을 하자 대원들 또한 타 종족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성격으로 변해 갔다. 케이안 또한 어느 순간 인간들이 하찮은 자들로 보였다.
“문 대륙에서 활약하던 블러드 데빌단 아냐?”
“응?”
케이안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김필도가 블러드 데빌단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머리가 좀 도는 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바보였네.”
김필도는 방긋 웃었다.
예상대로 놈들은 블러드 데빌단이었다.
“누굴 두고 하는 말이냐.”
“너희 단장 크로 말이야.”
김필도가 아는 블러드 데빌단은 3백여 명이다.
비록 개개인의 실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휴도니아 대륙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전력은 아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올가 드보르칸 일행을 쫓게 됐는지 모르지만 후작령을 없앤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크로는 우리 단장이 아니다.”
“단장이 바뀌었다는 말?”
“그러네.”
“누구로 바뀐 거지?”
“그건 네가 알 거 없다.”
“블러드 데빌단을 욕심낼 만한 자는 칼베리언 그놈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맞아?”
당장 떠오르는 얼굴이 그자밖에 없었다.
“……!”
케이안은 말없이 김필도를 보았다.
“맞는 모양이네.”
대답이 없자 김필도는 방긋 웃었다.
“할 말 다 한 거냐?”
김필도를 바라보는 케이안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직은 궁금한 게 많아. 하지만 굳이 너희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저 뒤에 있는 남작으로부터 들으면 되니까.”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왼편에 걸어두었던 대검을 들어 올렸다.
“라……컨?”
케이안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족들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인간인 김필도가 마족의 검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라컨은 마족이 그들의 검을 부르는 말로, 생명이란 뜻의 고대어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김필도는 헬칸을 어깨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그 검은 어디서 훔쳤느냐?”
10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케이안은 헬칸이 명검이란 사실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에게도 없는 명검을 김필도가 가지고 있자 욕심이 생겼다.
“욕심이 나는 모양이지?”
김필도는 헬칸으로 케이안을 겨냥했다.
“응?”
케이안은 깜짝 놀랐다. 마족의 풍습 중 검으로 누군가를 지목하면서 겨냥한다는 건 곧 결투를 신청한다는 의미다.
김필도가 알고 그랬는지 그것까진 알 수가 없지만 케이안은 결투 신청을 받은 셈이 됐다.
“할 거야?”
“검으로 상대방을 겨냥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물론 알지.”
“그럼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도 알겠구나.”
“내 머리 위에 이 헬칸을 얹을게.”
“그, 그게 헬칸이란 말이냐?”
놀랄 일의 연속이다.
헬칸은 마계 3대 신검의 하나일 뿐 아니라 마계10군단 전대 군단장이자 칼베리언에게 죽임을 당한 히데우스의 검이었던 것이다.
그날 칼베리언에게 패한 히데우스는 부하에게 골든 브리지를 부수라고 명령을 내려, 부서진 다리의 잔해와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물론 히데우스의 손에는 헬칸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헬칸을 지닌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투할 마음이 생겨?”
“너는 래딕커와 결투를 하느냐?”
이내 정신을 차린 케이안은 비아냥대듯 물었다.
헬칸이 신검이긴 하지만 가지고 돌아가 봐야 켈러 일행에게 빼앗길 게 분명하다.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
“래딕커?”
“몬스터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몬스터라는 말?”
“아직도 그걸 알지 못하는 걸 보면 넌 지독히도 머리가 나쁜 하급 몬스터인 모양이구나.”
“하하하! 하하하하!”
김필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마족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러드 데빌단이 사회 부적격자들의 집합이란 사실을 깜빡했다.
뚝!
김필도는 웃음을 그쳤다.
그러고는 케이안을 비롯한 마족들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니들 전부 뒈졌어, 개새끼들! 달려 750!”
김필도는 블랙칸의 고삐를 강하게 후려쳤다.
파앗!
두두두두! 두두두두!
말과 마찬가지로 블랙칸은 가속도가 붙지 않아도 초반부터 전력 질주가 가능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
블랙칸은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블랙칸이 달려오자 마족들은 좌우로 물러났다. 블랙칸은 그들 사이를 지나쳐 벌판으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2백여 미터를 달려간 김필도는 블랙칸을 돌렸다. 그러고는 블랙칸의 두 고삐를 오른쪽과 왼쪽 등자 뒤쪽에 묶었다. 그곳에 묶으면 굳이 발목에 묶지 않아도 등자의 위치를 이용해서 이야크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놓으면 블랙칸의 등에서 몸을 날릴 때 아주 편했다.
고삐 묶는 작업이 끝나자 심장에 오른손을 얹고, 헤를리온을 소환했다.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액체 금속이 온몸을 뒤덮고 곧 전투기갑을 걸친 모습이 됐다.
“죽여라!”
김필도를 바라보던 케이안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