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31화 (131/225)

# 131

제3장 최고의 정찬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차원의 벽이 사라졌다는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휴도니아 대륙과 문 대륙 사이는 거대한 바다란 말이지?”

김필도는 확인하듯 물었다.

“네.”

올가 드보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족들이 나타났고?”

“아니에요, 마족은 쫓기면서 처음 봤어요.”

올가 드보르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천족과 손을 잡았고,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은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거네.”

“천족도 들어와 있는 거예요?”

“맞다, 남작.”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당분간 휴전 상태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

“그게 무슨 말이죠?”

“천족과 마족 사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돼야 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란 말이야.”

“그럼 우리 볼삭 영지는…….”

올가 드보르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공작이나 후작들 중 친한 사람 있어?”

“우리 볼삭 영지를 도와줄 귀족이 있는지 그걸 묻는 말인가요?”

“응.”

“귀족들이 친하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잖아요.”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죠.”

올가 드보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어떻게 할 거지?”

김필도는 아까 끓이다 만 청국장을 다시 모닥불 위로 올렸다.

“우선 아빠를 만나 봐야죠.”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나 보지?”

“남쪽으로 1백 킬로미터는 더 가야 해요.”

올가 드보르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본대는 제대로 왔는지 궁금해서요.”

“저 이야크를 가지고 가.”

김필도는 마족들이 타고 왔던 이야크를 가리켰다.

“그래도 돼요?”

“그래도 되냐는 건 무슨 소리지?”

“마족을 없앤 분은 대공 전하시잖아요.”

“이야크는 전리품이니까 내가 주인이란 말?”

“당연히 그렇죠.”

“그럼 빌려주는 걸로 하자고.”

“고마워요.”

올가 드보르칸은 고개를 숙였다.

“천만에.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지.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올가 드보르칸에 이어 뱅글러 자작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올가 드보르칸 일행은 이야크에 두 명씩 타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자, 우린 못한 식사를 계속해 볼까?”

김필도는 김을 내뿜고 있는 솥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청국장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욱!”

역한 냄새에 리시아를 비롯한 일행이 일제히 물러났다.

“그거 정말 먹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김필도는 청국장을 덜어 좌식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밥이 있어야 하는데…….”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청국장은 성공적으로 끓여진 것 같은데 함께 비벼 먹을 밥이 없었다.

“오늘은 빵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겠네.”

김필도는 빵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청국장 한 숟갈을 떠 넣었다.

“죽이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과거에 먹었던 그 맛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노랑머리 녀석들 속에서 이 정도만 해도 어디냐.”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마치 해외여행 중 한국 식당에서 먹는 김치찌개 같았다.

청국장을 먹는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그는 후후 불어 가며 한 대접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맛있어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시아가 물었다.

“나도 처음엔 냄새 때문에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괜찮아졌다는 거예요?”

“네. 그리고 이 녀석은 건강식이고 다이어트에도 좋아요. 몸의 면역력도 높여주고요.”

“그러니까 몸에 좋다 이거죠?”

리시아는 관심이 간다는 듯이 물었다.

“냄새는 좀 역하지만 주요 재료는 콩이잖아요.”

“치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원래 빵이 아니라 쌀로 지은 밥과 함께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어요.”

“조금만 줘 보세요.”

“먹어 보려고요?”

“한 숟가락만.”

“알았어요.”

김필도는 청국장 한 국자를 대접에 담아 내밀었다.

리시아는 냄새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치즈와 비슷한 냄새라고 생각하자 한결 나아졌다.

그녀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어?”

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뜻밖에도 아주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청국장엔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해요.”

“웬 철학?”

“먹어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음식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는 말과 비슷하다는 거죠?”

“그렇죠.”

“아무튼 특이해요. 조금 더 줘요.”

리시아는 대접을 내밀었다.

김필도는 무쇠솥 뚜껑을 열고 청국장을 담아 건네주었다.

“나도 한번 먹어 볼까요?”

보고 있던 알마니가 슬며시 일어나 그릇을 가지고 무쇠솥 앞으로 왔다.

“덜지 말고 그냥 떠먹어.”

김필도는 무쇠솥 안에 숟가락을 담갔다.

“엥?”

알마니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관점에서는 수프 냄비에 숟가락을 담근다는 건 예의가 없는 걸 떠나, 지극히 비위생적이다.

입에 넣었던 숟가락엔 침이 묻어 있을 테고, 그 숟가락을 국에 담그면 침은 국으로 섞여 들어갈 건 분명하다.

그건 곧 다른 사람의 침을 내가 먹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원래 식구는 이렇게 먹는 거야.”

“식구요?”

“이 청국장에 맛 말고 세 가지가 더 들어 있다는 거 모르지?”

“뭐가 들어 있는데요?”

“사랑, 평등,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

“네?”

“보통 이런 걸 찌개라고 하는데 엄마가 가족을 위해 끓이거든. 그리고 가족은 이 찌개 그릇에 전부 숟가락을 담그게 돼.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이 전부 같은 음식을 먹게 된다는 거야. 누구는 부드럽고 맛있는 부분을 먹고, 누구는 거칠고 딱딱한 부분을 먹는 그런 게 없어. 그게 곧 평등이잖아.”

“그럼 공동 운명체라는 건?”

“이 안에 독이 들었다고 생각해 봐.”

“전부 죽는다는 거군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는 청국장을 덜려던 접시를 내려놓고 솥 안에 숟가락을 담갔다. 알마니가 숟가락을 담그자, 쿠다와 아베다도 숟가락을 담갔다.

베른은 리시아를 보았다.

“담그고 싶어요?”

리시아는 베른을 보며 물었다.

“제 주공은 가주님이십니다.”

“그럼 내가 담가야 베른도 담근다는 거네?”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알았어.”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필도 옆으로 갔다. 그러고는 무쇠솥 안에 숟가락을 담갔다.

리시아에 이어 베른도 청국장에 숟가락을 담그자 일행은 먹기 시작했다. 냄새 때문에 찡그렸던 일행의 얼굴은 청국장이 입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활짝 펴졌다.

냄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청국장 특유의 고소함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전하, 이건 진짜 진짜 빤타스틱해요.”

알마니는 연신 국물을 떠 넣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역한 냄새를 풍기던 수프에 이런 엄청난 맛이 숨겨져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먹고 난 다음에 트림은 절대 하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물론이죠.”

알마니는 히죽 웃었다.

식사가 끝나자 아베다는 개울가로 설거지를 하러 가고 알마니는 카판을 내렸다. 잠시 후 일행에게 카판이 한잔씩 건네졌다.

“헬칸의 주인은 어떻게 죽었죠?”

리시아는 카판을 마시며 물었다.

“결투에서 패했어요.”

“혹시 그 결투의 승자가 휴도니아 대륙에 들어와 있어요?”

“네.”

“어떤 자죠?”

“칼베리언이라고 최상급 마족인데 마계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마족이에요.”

“종신형을 선고받을 정도면 큰 죄를 진 모양이네요?”

“칼베리언은 마족을 최고의 종족이라 여기고 최고의 종족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 자예요. 그래서 그가 마계10군단 부군단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능력이 떨어진 마족들에게 잉여 마족이란 꼬리표를 붙여서 살해를 했어요. 그런데 그 수가 10만 명이나 됐대요.”

“정말요?”

“네. 그런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그들의 살인 행각을 군단장이 눈치챘나 봐요. 그러자 그는 군단장마저 살해를 하게 돼요. 하지만 이번엔 다른 때와는 달리 증거를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나 봐요. 군단장 살해 죄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대요.”

“하극상은 사형 아닌가요?”

“군단장을 살해했다는 정황은 있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대요.”

“10만 명을 살해한 죄는?”

“그 또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대요.”

“잔인하고 치밀한 자네요.”

“원래 잔인한 자는 대부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해요.”

“그럼 칼베리언 그자는 마계10군단 군단장 두 명을 없앤 셈이네요?”

“히데우스 군단장도 그놈에게 당했으니까…….”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루시안 공자는 천족과 마족 양쪽 다 관계가 있군요. 그것도 좋지 않은 쪽으로.”

“그래서 겁나요?”

“내 일도 아닌데 겁날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내 옆에 있으면 많이 힘들 거예요.”

“정 견디기 힘들면 도망치면 되잖아요.”

“그렇게 해도 상관없으니까 편할 대로 하세요.”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앞으로의 상황을 묻는 거예요?”

“마족과 천족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루시안 공자 같은데 아니에요?”

“천족의 수장인 세이아칸 그놈 또한 칼베리언과 비슷한 성정의 소유자예요.”

“천족이 최고 종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맞아요, 천족에 대한 프라이드가 하늘까지 뻗어 있는 놈이에요.”

“그럼 천족과 마족이 싸울 수도 있겠네요?”

“그건 우리의 바람이죠.”

“루시안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들의 머리를 걸고 내기를 할지도 몰라요.”

“어떤 내기요?”

“많이 점령하는 쪽이 이기는 그런 내기 말이에요.”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최악이 되겠군요.”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겠죠.”

“루시안 공자는 상관없다는 건가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겠죠.”

“어떤 기회를 말하는 거죠?”

“뭐가 됐든지요. 그만 자죠.”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카판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야겠어요.”

“디자이너와 쿠다, 베른은 잠자리 준비하고 아베다는 설거지해 와.”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일행은 바쁘게 움직였다.

곧 벌판에 천막이 세워지고, 잠자리가 마련됐다.

아공간에서 난로를 꺼내 천막 한가운데에 놓고 암탄을 꺼내 불을 피웠다. 불길이 오르자 난로 안에 암탄을 절반가량 채워 넣고 절반 분량은 옆에 놓았다.

금세 불꽃이 오르면서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잠자리는 출입구에서 맨 오른편에 김필도가 눕고, 그 옆으로 리시아, 베른, 알마니, 쿠다, 아베다 순이었다. 첫 번째 불침번은 아베다였다.

“잘 자요.”

“주무세요.”

일행은 인사를 하고 잠을 청했다.

“꿈 있어요?”

김필도 쪽으로 돌아누운 리시아가 물었다.

“장래 희망 같은 걸 말하는 거예요?”

“네.”

“꿈같은 걸 꿀 정도로 여유롭게 살아 본 적이 없어요.”

“여유가 없다고 꿈마저 꾸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어렵게 사는 사람일수록 꿈은 더 크게 갖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말한 여유란 물질적인 여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를 말하는 거예요.”

“정신적인 여유라고요?”

“1년 또는 10년 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냥 하루하루를 미친 듯이 살았을 뿐이에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어느 순간 부두목이 돼 있더라고요.”

루시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김필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부두목이 뭐죠?”

“조직의 이 인자란 뜻이에요.”

“조직의 이 인자요?”

리시아는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서 한 달 또는 1년이 된대요. 아직은, 10년 또는 그 후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열심히 살겠다는 거예요?”

리시아는 조직의 이 인자가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네.”

김필도는 눈을 감았다.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거머쥐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은 준비를 하면서 기다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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