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32화 (132/225)

# 132

다음 날 일행은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당연 김필도의 거처인 천둥의 성이었다.

더 이상 앞을 막는 자들이 없어, 이제는 정말로 여행다운 여행을 했다. 고대에 많은 세 종족이 살았던 곳답게 평원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칼베리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봤을 터인데 김필도로서는 여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유적을 구경한다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낮에는 달리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기를 십여 일.

드디어 프라넬 대평원의 동쪽 끝 프라넬 콜로세움에 도착했다. 프라넬 콜로세움에서 프라넬 대평원 동쪽 초입에 있는 길드의 도시 아비라까지는 하루거리다.

“저기 프라넬 콜로세움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출발해야 해요.”

5백 미터 전방에 우뚝 솟은 절벽이 보이자 알마니가 말했다.

“저기가 프라넬 콜로세움이야?”

“네. 동쪽 입구와 북쪽 출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전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콜로세움이라고 불려요.”

“바람을 피하기엔 적당한 장소겠네.”

“프라넬 대평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행의 신 파넬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기도 해요.”

“씻을 곳도 있을까?”

“집과는 많이 다르지만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건물도 있고, 우물도 있어요.”

“가자!”

김필도는 블랙칸의 고삐를 휘둘렀다.

곧 블랙칸과 두 마리의 이야크는 프라넬 콜로세움을 향해 달렸다.

뿌우! 뿌우! 뿌우!

바로 그때였다. 프라넬 콜로세움의 절벽 위쪽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보았다. 기사 대여섯 명이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필도는 속도를 늦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알마니를 보며 물었다.

“길은 여기 말고 없어?”

“다른 곳은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법사가 아니면 내려가기 힘들어요.”

“그럼 저기로 가는 수밖에 없겠네.”

김필도는 다시 속도를 냈다. 잠시 후 여섯 명을 태운 이야크 세 마리는 프라넬 콜로세움으로 들어섰다.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전방을 살폈다.

“드보르칸 후작령 기사들이네요.”

앞서 가던 알마니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프라넬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는데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올가 드보르칸과 드보르칸 기사단 단장이라고 하였던 뱅글러 자작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대공 전하.”

“어서 오십시오, 전하.”

두 사람은 김필도를 향해 인사를 했다.

“본대가 무사했던 모양이구먼.”

“다행히 별다른 피해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나마 다행이구먼.”

“불행 중 다행이죠.”

올가 드보르칸은 말을 돌렸다. 김필도 일행은 올가 드보르칸과 뱅글러 자작을 따라 프라넬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갔다. 알마니의 말처럼 프라넬 콜로세움에는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신전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저 정도 규모면 이삼백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전 주변으로는 녹색 천막 2백여 동이 쳐져 있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머무는 숙소인 모양이었다.

“저 신전에는 기사와 마법사들 가족이 머물고 있고, 천막엔 기사와 마법사가 머물고 있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올가 드보르칸은 설명을 해주었다.

“전부 몇 명이라고 했지?”

“기사는 1천5백 명이고, 마법사는 5백 명, 가족이 1천 명가량이에요.”

“3천 명이 머물기엔 신전도 좁고, 천막의 수도 부족한 것 같구먼.”

“정착할 곳을 구하기 전까지는 불편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구먼. 그보다 우물은 어디 있지?”

“신전 왼편에요.”

“디자이너!”

김필도는 알마니를 불렀다.

“네! 대공 전하.”

“우물에서 적당한 거리에 야영 준비해.”

“알았어요.”

알마니는 이야크를 몰아갔다.

곧 적당한 자리를 발견한 듯 이야크에서 내려 야영 준비를 했다.

“식사는 우리가 준비해드릴게요.”

알마니 일행을 바라보던 올가 드보르칸이 말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어떻게 밥을 얻어먹겠나. 우린 신경 쓰지 말게. 아무튼 반겨줘서 고맙네.”

김필도는 이야크를 몰아 알마니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알마니와 베른은 천막을 친 다음 불을 피우는 중이었다. 불길이 일어나자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삼발이와 그릇 등을 꺼내 늘어놓았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공간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뒤적이던 알마니가 김필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디자이너, 자네 먹고 싶은 걸로 해.”

“저 먹고 싶은 걸로 하라고요?”

“응!”

“정말요?”

“그렇다니까.”

“그럼 오늘은 굶는 게…….”

“숨 쉬는 게 귀찮아?”

김필도는 알마니를 째려보았다.

“삼겹살 제육볶음으로 할게요.”

알마니는 아공간 한편 고기를 모아둔 곳에서 돼지고기를 꺼냈다. 삼겹살이니 제육볶음이니 하는 건 김필도로부터 배운 것들이었다.

돼지고기를 꺼내 놓고, 역시 김필도로부터 받은 고춧가루를 꺼내 물에 이겨 한편에 놓았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하죠?”

“까먹었어?”

“이런 요리법은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예요?”

“자취 생활 20년이면 저절로 터득하게 돼. 이리 줘.”

김필도는 그 자리에 앉았다.

“말을 하세요. 제가 할게요.”

“오늘은 내가 할게.”

김필도는 물통에서 물을 부어 손을 씻은 다음 본격적으로 제육볶음 준비를 했다. 돼지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술을 조금 붓고, 물에 이겨 놓은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과 후추, 소금을 넣고, 양념이 골고루 스며들도록 주걱으로 비볐다.

그런 다음 당근, 양파, 파, 고추를 썰어 커다란 대접에 담아두었다.

“밥은 어떤 걸로 할래?”

김필도는 알마니를 보며 물었다.

“파스타로 하죠, 뭐.”

“가서 쌀 있나 물어보고 와.”

“신세 안 진다면서요.”

“밀가루하고 교환하면 되잖아.”

“기필코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싶은가 봐요?”

“쌀밥이 아니라 누룽지가 더 먹고 싶어서 그래.”

“누룽지요?”

“일단 다녀 와.”

“알았어요.”

알마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보르칸 후작 진영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쌀 한 포대를 얻어 왔다.

“거봐, 있잖아.”

김필도는 환하게 웃었다.

“밀가루를 세 포대나 줬다고요.”

“세 포대?”

“식량이 많이 부족한가 봐요.”

“식량을 많이 가져오지 못한 모양이지?”

“그랬대요.”

“그래도 기사가 1천5백 명이고, 마법사가 5백 명인데 누군가가 도움의 손을 내밀겠지.”

김필도는 밥 지을 준비를 했다.

씻어 불린 쌀이 담긴 무쇠솥을 삼각대의 쇠사슬에 건 후 모닥불과 적당히 떨어뜨려 놓았다.

“씻고 오세요.”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리시아를 보며 말했다.

“제가 도와줄 건 없어요?”

“음식 할 줄 아는 거 있어요?”

“아뇨.”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손 깨끗하게 씻고 와서 숟가락 놓는 거나 거들어주세요.”

“고기 손질은 자신 있는데.”

“어떤 손질을 말하는 거죠?”

“껍데기에 붙은 털을 깎아낸다거나, 다른 살코기는 건들지 않고 기름만 발라내는 일이나, 뼈와 살을 분리하는 일 같은 건 아주 잘해요.”

“그거 암살 수법 아니에요?”

“암살 수법은 아니고 고문 수법이에요.”

“숟가락이나 놓으세요.”

“손부터 씻고요.”

리시아는 머쓱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같이 가요.”

김필도는 얼른 리시아를 따라붙었다.

목욕은 하지 못한다고 해도 세수는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저렇게 놔두고 와도 돼요?”

“밥이 되려면 20분은 있어야 하니까 시간은 충분해요.”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우물로 향했다.

“거의 피난민 수준이네요.”

주위를 바라보는 리시아의 얼굴엔 안쓰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빨래는 아무렇게나 널려 있고, 오가는 사람들 얼굴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쟁 때잖아요.”

김필도는 낮게 혀를 찼다.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했지만 저 많은 인원이 정착할 곳이 있기나 할는지.

공연히 측은했다.

“저기가 우물인가 봐요.”

두 사람은 곧 우물가로 가서는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세수를 했다.

“타월 있어요?”

“물론 있죠.”

김필도는 꺼내 놓은 타월을 리시아에게 내밀었다.

“더 있나요?”

“적셔 가려고요?”

“네.”

“물을 떠줄 테니까 천막 안에서 목욕하세요.”

“그래도 될까요?”

“남들의 불행을 보며 웃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내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함께 애도해줄 수는 없잖아요.”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요.”

두 사람은 천막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그때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김필도와 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뿌연 먼지와 함께 50여 기 말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기마대의 선두에 있는 자는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는데, 푸른 바탕에 흰색의 동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콰라 공작 가문 기사들이에요.”

깃발을 본 리시아가 낮게 말했다.

“그렇군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걷고 있는 곳은 말이나 이야크가 오가는 길 가장자리였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이콰라 공작가 기사들은 빠르게 다가왔다. 기사들은 2열 종대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워!”

기사들 선두에 있던 한 명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자는 물론이고 뒤따르던 기사들도 일제히 멈췄다.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게 한 은발 사내는 차원 수리공으로 문 대륙에 다녀온 바이칼 이콰라였다.

그리고 바이칼 이콰라 옆에 있는 자는 발탄 제국 3대 공작의 한 명인 이콰라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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