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오랜만이오, 대공.”
바이칼 이콰라는 먼저 알은체를 했다. 전에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김필도를 바라보는 바이칼 이콰라의 얼굴엔 조소가 어려 있었다.
김필도는 바이칼 이콰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던 폴포리 이몬 이콰라요, 대공.”
바이칼 이콰라 옆에 있던 이콰라 공작은 고개를 까닥 숙여 목례를 했다.
“나 루시안이네, 공작.”
김필도는 이콰라 공작을 빤히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바이칼 이콰라 옆을 지나쳐 갔다.
그런 김필도를 보며 바이칼 이콰라가 이죽거렸다.
“죽었다고 소문이 났던데, 명이 길구려.”
걸음을 옮기던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한마디 충고할까?”
김필도는 바이칼 이콰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게 충고할 주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이번엔 반말이었다.
“이콰라 공작, 자네 생각은 어때. 내가 자네 아들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할 말을 잃는다고 했던가. 지금 이콰라 공작처럼.
그는 김필도가 반말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 나보고 그런 거요?”
이콰라 공작은 김필도를 노려보았다.
“아들놈이 상전인 대공에게 반말을 하는 건 감미롭게 들리고 대공이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공작에게 반말을 하는 건 거슬리나 보지?”
“나는 제국에 세 명밖에 없는 공작이네, 대공.”
“나는 제국에 한 명밖에 없는 대공이야, 공작.”
“쿡!”
이콰라 공작은 김필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얼굴엔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바이칼!”
이콰라 공작은 아들을 불렀다.
“네, 아버지.”
“다음부터는 사람도 가려가면서 말을 걸도록 해라. 독기를 품은 개는 물론이고, 골이 잔뜩 난 소도 피하고, 정상적인 사람에게만 말을 걸도록 하란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만 가자.”
이콰라 공작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미친개나 소는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칼 이콰라는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러고는 말을 몰아갔다.
“클클클!”
“킬킬킬!”
“쿡쿡쿡!”
두 사람 뒤편에 있던 기사들은 조소를 흘리며 김필도를 지나쳐 갔다.
“졸지에 미친개와 소가 됐네요.”
김필도는 멀어지는 이콰라 공작과 기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필도의 눈동자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자식 머리가 좋네요.”
“누구요?”
“이콰라 공작 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상대가 진짜 열 받는지 그걸 아는 자예요.”
“열 많이 받았어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김필도는 알마니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발이 눈 위를 걷는 것처럼 땅속으로 푹푹 파고들어 갔다.
“아이고, 밥 다 탄다.”
천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타는 냄새가 약간 났다.
급하게 불가로 달려간 김필도는 쇠사슬을 당겨 무쇠솥을 모닥불에서 떼어 놓았다. 그러고는 양념이 스며들어 간 돼지고기를 무쇠 프라이팬인 스킬릿에 넣고 볶았다. 고기가 적당하게 익자 썰어두었던 채소를 넣고 조금 더 볶다가 마무리했다.
“디자이너, 밥 퍼!”
“알았어요.”
알마니는 무쇠솥을 내려놓고 밥을 퍼 담았다.
잠시 후 알마니 일행의 입에서 탄성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김필도 또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쌀밥에 제육볶음 하나가 전부였지만 차원을 넘어와 먹는 최고의 정찬이었다.
제4장 그들이 아닌 내가 문제야
“나는 볼삭 영지의 영주였고, 10개 영지를 거느리고 있었소, 공작.”
말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드보르칸 후작의 얼굴엔 굴욕감이 가득했다.
그가 이처럼 치욕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콰라 공작의 제안 때문이었다. 이콰라 공작은 그에게 이콰라 공작가의 가신으로 들어오라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나도 잘 알고 있고,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아오. 하지만 내가 다스리고 있는 헬싱턴에는 25개의 영지가 있고, 영지의 상당 부분이 그들의 수중에서 나온 돈으로 운영되고 있소. 즉 그들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드보르칸 후작에게 영지를 마련해줄 수 없다는 거요. 하지만 가솔로 들어오면 달라지오. 후작에게 영지를 내줄 명분이 생길 뿐 아니라 영주들 또한 아무 말 하지 않을 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물론 영원히 가솔로 있으라는 말은 아니오. 후작이 볼삭 영지를 되찾을 때까지만 함께 있어달라는 거요.”
와락!
드보르칸 후작은 몸을 떨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저들은, 아니 황제는 볼삭 영지로 쳐들어온 하다르만 백작과 이코스트 백작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 없다.
전쟁보다는 두 백작의 승리를 인정하고 화해를 택한 게 분명하다. 하긴 들어오는 세금만 같다면 황제 입장에서는 누가 주인이든 상관없을 테니.
드보르칸 후작은 차가운 눈으로 이콰라 공작을 바라보았다.
“제국에 영지는 많소, 공작.”
“다른 곳으로 가겠단 말이오?”
이콰라 공작의 얼굴에 슬쩍 조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드보르칸 후작을 비롯한 3천 명이 이곳 프라넬 콜로세움에 머물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건 나흘 전이다.
하지만 일부러 와 보지 않았다. 식량이 거의 바닥났을 거란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이틀 전부터 드보르칸 후작의 부하들이 식량을 구하러 다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식량을 팔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3천 명 부하의 굶주림. 그것보다 더 큰 약점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부하들을 데리고 프라넬 대평원으로 왔다.
입구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드보르칸 기사단 기사들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엔 절망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드보르칸 후작이 제 주제도 모르고 다른 영지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두 공작과 네 후작이 날 도와주겠다고 한 말을 벌써 잊으셨소?”
“다른 영지까지 어떻게 갈 생각이오?”
“아무리 이콰라 공작령 휘하라고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까지 막을 권리는 없소이다!”
드보르칸 후작은 격앙된 얼굴로 소리쳤다.
“내 땅을 지나가는 걸 막겠다는 게 아니오, 후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3천 명이나 되는 부하들에게 뭘 먹일 거냔 말이오.”
“설마…….”
드보르칸 후작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나는 이미 각 영지에 전시 동원령을 발동한 상태요, 후작.”
전시 동원령을 발동했다는 건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사고파는 행위를 할 때는 공작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식량을 팔 수 없다는 거요?”
“팔 수 없는 게 아니라 팔 만큼 충분한 식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소이다.”
“잔인하구려.”
“후작이 우리 이콰라 공작가의 가신으로 들어오면 모든 게 해결되오.”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겐 못하겠소, 공작.”
드보르칸 후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은 냉정한 거요. 후작의 자존심 때문에 3천 명의 부하를 굶겨 죽이는 누를 범하지 마시오.”
“손님 나가신다!”
드보르칸 후작은 밖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천막 문을 벌컥 열었다.
“후작이 우리 가문의 가신이 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소. 다음에 협상을 할 때는 후작을 제외한 기사와 마법사만 받아줄 거요. 후작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거요.”
이콰라 공작은 차갑게 말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상 그가 급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드보르칸 후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회할 거요, 공작.”
드보르칸 후작은 짓씹듯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내 제안을 거부한 오늘 결정을 후작은 두고두고 후회할 거요. 그리고 15일 안에 내 영지에서 나가주시오. 나가지 않을 경우엔 침략자로 간주할 것이오.”
이콰라 공작은 차갑게 말하며 천막을 나갔다.
15일은 이곳에서 남쪽의 왈라크 산맥까지 직선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즉 한눈을 팔지 않고 밤낮으로 걸었을 때 걸리는 시간이었다.
“오늘 일 결코 잊지 않겠소, 공작.”
드보르칸 후작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쿡! 돌아간다!”
조소가 어린 웃음소리에 이어 이콰라 공작의 아들 바이칼 이콰라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개자식!”
드보르칸 후작의 입에서 진득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아빠!”
“영주님!”
그때 올가 드보르칸과 뱅글러 자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천막 뒤편에 있었던 두 사람은 드보르칸 후작과 이콰라 공작 사이에 오갔던 대화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
“앉아라. 자네도 앉고.”
드보르칸 후작은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은 드보르칸 후작 건너편에 앉았다.
“들었느냐?”
드보르칸 후작은 물었다.
“네!”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드보르칸 후작은 딸 올가 드보르칸을 보았다.
“그게…….”
올가 드보르칸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들은 식량이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5일가량 버틸 정도는 남아 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이콰라 공작은 15일 안에 헬싱턴을 떠나지 않으면 공격을 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조금 전 상황으로 간주컨대 15일 안에 떠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하였던 이콰라 공작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공격할 것처럼 보였다.
“생각을 해 보아라.”
드보르칸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가 드보르칸도 덩달아 일어났다.
“만일 방법이 없으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요?”
“3천 명을 굶겨 죽일 순 없지 않느냐?”
“그럼?”
“이콰라 그자가 그러지 않았느냐. 드보르칸이란 성을 쓴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받아주겠다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주님!”
듣고 있던 뱅글러 자작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게. 난 바람 좀 쐬고 오겠네.”
“같이 가요.”
올가 드보르칸은 아버지를 쫓아갔다.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저지를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
혼자 남은 뱅글러 자작은 천막을 나섰다.
그 역시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앞이 막힌 막다른 골목이 아닌, 뒤쪽까지 완전하게 막힌 공간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술 한잔 하겠는가?”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뱅글러 자작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부른 사람은 김필도였다. 그는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마친 김필도 일행은 술로 여독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저희들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영주님께서 경황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뱅글러 자작은 먼저 드보르칸 후작이 인사를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자작 놈마저 반말을 찍찍 해대는 대공인데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러나.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게. 그리고 내가 놈들을 죽인 건 자네들을 도우려고 한 게 아니고 그 순간 야마가 빡 돌아서, 아니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뿐이네. 한잔 받게.”
김필도는 뱅글러 자작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술병을 잡고 술을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뱅글러 자작은 황급히 두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대공이 두 손으로 술을 따르는데, 자작이 한 손으로 받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가 두 손으로 술잔을 잡자, 김필도는 한 손을 내렸다.
“이게 주도라는 거야.”
김필도는 술을 따르며 말했다.
“주도가 뭐죠?”
보고 있던 알마니가 물었다.
“술자리 예절.”
“그런 것도 있어요?”
“내가 두 손으로 따르고 뱅글러 자작이 한 손으로 술잔을 받는 게 어울려, 아니면 지금 모습이 어울려?”
“지금 모습이 훨씬 어울리는데요?”
“예절이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대공 전하가 주시는 술잔을 받을 땐 두 손으로 받으라는 거죠?”
“천둥 율법 제1조 상명하복(上命下服)이야.”
“천둥 율법은 알겠는데 상명하복은 뭐죠?”
“상급자는 명령하고 하급자는 복종하다는 뜻이야. 하급자는 상급자를 대할 때 허리를 90도로 꺾고, 양팔을 상급자가 볼 수 있도록 늘어뜨려야 해.”
“이렇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알마니는 김필도가 말한 대로 자세를 취했다. 영락없는 조폭식 인사였다.
“잘하네.”
오랜만에 보는 조폭식 인사에 김필도는 방긋 웃었다.
“바보 같아요.”
“바보 같은 게 아냐. 그건 곧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