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34화 (134/225)

# 134

“그렇게 되는 거예요?”

“고대에 어떤 황제는 신하들로부터 인사를 받을 때 양팔을 강하게 털도록 했어. 혹시 소매 속에 무기 같은 걸 숨기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지. 인사를 할 때도 다르지 않았어. 무릎을 꿇고 두 팔과 머리를 바닥에 대는 인사를 했는데 그때 양팔은 가급적 넓게 벌리도록 지시를 했어.”

“그 역시 암살에 대한 대비란 말인가요?”

“설사 무기를 숨기고 들어왔다고 해도 팔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암살은 쉽지 않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팔을 늘어뜨리는 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뜻하고, 즉 복종의 표시라는 거군요.”

“맞아.”

“알겠어요, 전하. 앞으로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할게요.”

알마니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술을 따르다 말고 뻘짓을 했구먼. 미안하네, 뱅글러 자작. 술을 따르다가 다른 짓을 하는 건 큰 결롄데.”

“아닙니다, 대공 전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천둥의 성을 정비하실 생각이십니까?”

뱅글러 자작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하들이 좀 들어올 것 같아서 말이네.”

김필도는 쿠다를 보았다.

폭풍의 전사 라쿤의 행방에 대해 묻는 질문이었다.

“현재 아비라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연락 가능해?”

“가능합니다.”

“라쿤의 능력을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명령만 내리십시오, 마스터.”

“내가 필요한 건 빅 소드 용병단 단장과 수뇌들이야.”

“머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살아 있는 상태를 원하십니까?”

“어떤 놈이 날 청부했는지 궁금해.”

“당장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용병들도 유인해 와야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쿠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목욕을 마친 리시아가 밖으로 나왔다.

“저도 부하들을 좀 데리고 있는데요?”

그녀는 김필도 오른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전쟁은 끝났어요?”

“네.”

“어떻게 됐는데요?”

“반란군의 수뇌였던 톰벨 벨린져 히라베우스를 생포했대요.”

“쯧!”

김필도는 짧게 혀를 찼다.

결국 톰벨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왜요?”

“톰벨 벨린져 히라베우스와 문 대륙에서 함께 여행을 했거든요.”

“신세를 졌어요?”

“신세를 졌다기보다는 문 대륙에 대해 많은 걸 배웠어요.”

“그럼 신세를 진 게 맞네요. 실력은 어때요?”

“베른과 비슷하거나 약간 떨어질 거예요.”

“그럼 상당히 강한 자네요?”

“전투기갑을 얻기 위해 문 대륙을 헤매고 다녔던 것 같은데 얻지 못했나 봐요.”

“구해 오라고 할까요?”

“그게 가능해요?”

“아직 내 명령을 따르는 자가 남아 있다면 가능할 거예요.”

“그게…….”

김필도는 베른을 돌아보았다.

암흑 상단은 최소 1천여 명 이상의 다르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곳 가주인 리시아는 그녀를 따를 다르가 몇 명이나 될지 장담을 못 한다고 한다. 그건 곧 부하들이 가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상당수가 아론 공자를 주공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만 있었단 말이야?”

“두 분, 결혼을 약속한 터라…….”

“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해도 그렇지. 재산을 전부 넘겨주는…… 아니네, 녀석들이 알아서 긴 거네.”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일부러 넘겨준 게 아니라 암흑 상단 소속 다르들은 출세를 위해 주인인 리시아를 배신하고 10인 위원회 회주인 아론에게 붙은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두 분의 결혼이 무효가 되면 암흑 상단은 둘로 쪼개지게 될 겁니다.”

“자네는 암흑 상단이 쪼개지는 걸 바라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리시아 양을 위해서야, 아니면 자네를 위해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론에게 잘 보이면 출세할 수 있잖아.”

“그건 절 모욕하는 겁니다, 대공.”

베른은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저 친구는 아직 떠날 생각이 없나 보네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정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리시아 양 명령을 받고 오는 녀석들은 받아들이고 오지 않는 녀석들은 버린다는 거예요?”

“내가 싫다고 하는 녀석들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들이 있는 곳에서 여기까진 얼마나 걸리죠? 전력으로 달렸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요.”

“전투기갑을 착용한 상태에서 전력을 다해 달린다고 해도 한 달은 걸릴 거예요.”

“한 달 후 아비라 어때요?”

“그들도 아비라로 불러들이게요?”

“우리가 니드라는 놈들의 공격을 받았죠, 아마?”

“그들을 없애게요?”

“베른!”

김필도는 베른을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암흑 상단엔 가주의 머리를 노린 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없어?”

“있습니다.”

“어떤 거지?”

“청부하는 자는 물론이고, 청부를 받은 어쌔신 조직까지 완전하게 몰살시킵니다.”

“자네 가주가 프라넬 대평원에서 공격을 받은 게 3주 전 아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건 근무 태만이잖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보름 줄게.”

“네?”

“보름 안에 니드(Need) 단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보름 안에는…….”

“몸통은 보고 싶지 않아, 베른. 머리만 가져오면 돼.”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당장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헨(Hen)도 전부 불러.”

“그들도 부르란 말입니까?”

베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리시아를 보았다.

헨(Hen)은 암흑 상단 최강 다르로, 약혼자인 아론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비밀 조직이었던 것이다.

“대륙은 곧 전쟁에 휩싸일 거야. 그곳에 있으면 공연히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높아.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은신해 있는 게 훨씬 나아.”

“하지만 갈 곳이…….”

“천둥의 서의 최대 수용 인원은 10만 명이야, 베른.”

“그들을 천둥의 성으로 불러들일 참입니까?”

“루시안 공자께서 허락하면.”

리시아는 김필도를 보았다.

“나야 대환영이죠.”

“들었지?”

“알겠습니다, 가주님.”

베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되지?”

김필도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뱅글러 자작을 보았다.

“그, 그럼 저분이 암흑 상단의 상단주였습니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덩치 작은 소녀가 설마 대륙 3상의 한 곳인 암흑 상단의 상단주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행 중이네. 그보다 왜 그렇게 다 죽어 가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그건…….”

뱅글러 자작은 말끝을 흐렸다.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술이 필요해서 온 것 같으니까 술이나 마시게.”

김필도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뱅글러 자작은 두 손으로 술잔을 쥐고 공손하게 내밀었다. 술잔이 채워지자 뱅글러 자작은 단숨에 비웠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뱅글러 자작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곤란할 것 같던데 굳이…….”

“아닙니다. 어차피 부하들에게도 전부 알려야 할 내용입니다.”

뱅글러 자작은 조금 전 드보르칸 후작과 이콰라 공작 간에 오갔던 내용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이콰라 공작은 드보르칸 후작께 가신 자리를 제안했다는 거네?”

“물론 볼삭 영지를 탈환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 말을 믿어?”

“믿는다면 영주님께서 이콰라 공작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겠지요.”

“거절하니까 이콰라 공작령에서 15일 안에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리고, 만일 그 기간 내에 나가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단 거군.”

“그렇습니다.”

“자네들 생각은 어때?”

“어떤 생각 말입니까?”

“드보르칸 후작을 버리고 이콰라 공작 밑으로 들어갈 의향은 있느냐고.”

“그건 불가합니다, 대공 전하.”

“불가하다는 건 자작 자네 생각일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은 공동 운명쳅니다. 영주님을 배신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하는가?”

“그렇습니다.”

뱅글러 자작은 확신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이콰라 공작이 싸움을 걸어오면 그땐 어떻게 할 텐가?”

“싸워야지요.”

“자네들은 2천 명이고, 이콰라 공작이 거느린 병력은 수십만 명인데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저를 비롯한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 대원들은 전부가 기삽니다, 대공 전하. 목숨을 버렸으면 버렸지, 비겁한 타협은 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전부 죽겠다는 거네.”

김필도는 다시 술잔을 채워주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뱅글러 자작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럼 이건 어떤가?”

김필도는 술병을 앞에 내려놓고 잔을 들었다. 그러자 뱅글러 자작은 술잔을 내려놓고 얼른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술병을 잡고 김필도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말씀하십시오, 대공 전하.”

“역으로 치는 거네.”

“역으로 친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뱅글러 자작은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벨라를 부숴버리는 거, 아니 점령하는 건 어떠냐는 말이네.”

“저, 점령이라고요?”

뱅글러 자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벨라는 다름 아닌 헬싱턴의 영도. 즉 이콰라 공작령의 모든 것이 있는 도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김필도의 술잔이 넘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지 못했다.

“술이 넘치네, 자작!”

김필도는 술병 입구를 붙잡았다. 하지만 뱅글러 자작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비단 뱅글러 자작뿐만이 아니었다. 듣고 있던 리시아, 알마니, 쿠다, 아베다와 천막 안에 있던 베른까지 기절할 듯 놀랐다.

벨라의 점령.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의견이었다.

그런 그들의 귓전에 김필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죽을 결심을 했다고 하기에 하는 말이야. 살아남을 방도가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공 전하.”

뱅글러 자작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는 북쪽 절벽 위에 가 있었다. 그곳에는 드보르칸 후작과 올가 드보르칸이 앉아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접니다, 영주님!”

“어세 오게. 다크 문이 아주 좋네.”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목소리가 드보르칸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영주님.”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가?”

“있습니다, 영주님.”

“어떤 소식인지 궁금하구먼.”

“그건 벨라 점령입니다.”

“……!”

드보르칸 후작은 일순 멍해졌다. 뱅글러 자작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사정은 올가 드보르칸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뱅글러 자작을 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죠?”

그녀는 물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라면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 역으로 치고 들어가자는 겁니다. 제 의견은 아니고 대공 전하의 생각입니다.”

“대공께서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이번엔 드보르칸 후작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가 보세.”

드보르칸 후작은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한 듯 그의 걸음걸이는 상당히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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