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얼마 후 드보르칸 후작과 올가 드보르칸, 그리고 뱅글러 자작은 김필도 일행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처음 뵙습니다, 대공 전하. 딸애와 기사를 구해주셨는데 감사의 말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드보르칸 후작은 김필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럴 경황이 없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앉게.”
김필도는 앞자리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드보르칸 후작은 김필도 앞에 앉았다. 맨바닥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앉자 뒤쪽으로 올가 드보르칸과 뱅글러 자작이 앉았다.
“한잔하겠소? 공중 정원에 있던 오래된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건데 7백여 년 된 것치고는 술맛이 아주 괜찮다네.”
김필도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7백 년이나 됐단 말입니까?”
“리반 프리우스 황제께서 남긴 거네.”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은 공중 정원의 비밀을 캐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중 정원을 만든 리반 프리우스 황제가 그곳에 뭔가를 남겼을 거라는 말은 전설처럼 내려왔다. 하다르만 가문은 공중 정원의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수많은 마법사와 기사를 동원했지만 실패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공은 7백 년 묵은 술이라고 한다. 그건 곧 공중 정원의 비밀이 풀렸다는 뜻이었다.
“이케이 하다르만은 이방인 아닌가. 한잔하게.”
이번에도 역시 김필도는 술병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조금 전 뱅글러 자작이 그랬던 것처럼 드보르칸 백작도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김필도는 자연스럽게 왼손을 내렸다. 하지만 드보르칸 후작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안 마시는가?”
“먼저 벨라 점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하.”
“그것 때문에 온 거구려.”
“전 절박합니다.”
“나는 다만 이왕 죽음을 결심했다면 발악이라도 한 번 해 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네.”
“하지만 벨라에 가서 자살을 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 아닙니까?”
“욕심만 내지 않으면 살아날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네.”
“말씀해주십시오.”
드보르칸 후작은 대뜸 무릎을 꿇었다.
“이러면…….”
“말씀해주세요, 대공 전하.”
이번에는 올가 드보르칸과 뱅글러 자작이 무릎을 꿇었다.
“들으면 웃을 거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좋네. 그럼 내 의견을 말하겠네. 지금 이콰라 그자는 물론이고, 황제 그리고 다른 귀족들은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이 빠져나갈 곳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생각할 거네, 맞는가?”
“그렇습니다.”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지 절대 경계는 하지 않을 거네, 그것도 맞는가?”
“그렇습니다.”
“후작에게는 5백 명의 마법사가 있으니까 1천5백 명의 기사를 데리고 벨라로 침입해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네.”
“마법사 1명 당 3명씩만 맡아서 이동시키면 되니까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드보르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가진 기사와 내가 거느린 정령 전사 1백 명, 그리고 용병 2천 명이면 벨라를 점령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후작 생각은 어떤가?”
“용병들이 움직일 거라고 보십니까?”
“살고 싶으면 움직여야지 별수 있겠소.”
“헬싱턴에는 25명의 영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벨라에 신경 쓸 틈이 없을 거네.”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케이 하다르만은 천족과 손을 잡고, 파르탄 이코스트는 마족의 종이 됐다는 건 아는가?”
“올가에게 들었습니다.”
“이케이 하다르만과 손을 잡은 천족은 헬만이란 놈인데 문 대륙에서 내 검에 옆구리가 찢겨 나간 경험이 있고, 그놈의 상관은 내 몸에 검을 박아 넣은 다음 낭떠러지로 던져버렸다네. 그리고 파르탄 이코스트와 손을 잡은 마족의 수장은 칼베리언이란 최상급 마족인데, 내게 검과 오테르의 인장을 물려주신 분과 원수지간이었네. 결국 문 대륙에서 그분을 살해하긴 했지만 그걸로 만족할 놈이 아니네. 아마 나까지 죽여서 오테르 가문의 흔적을 지워야 만족할 놈이지. 헬만 그놈은 나 때문에 휴도니아 대륙으로 왔고, 칼베리언 그놈은 천족을 쫓아 이곳으로 왔을 거네.”
“그,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드보르칸 후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콰라 공작이 내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쳐들어올 거란 말이네. 그건 내가 장담하네.”
“대공께서 세력을 갖게 되는 걸 싫어할 거란 말입니까?”
“바로 그거네. 그렇게 되면 이곳 이콰라에 있는 25명의 영주는 벨라가 아니라 하다르만과 이코스트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후작은 성공을 확신하는가?”
“그건…….”
“그 후에 어떻게 할 건지는 성공한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네, 후작.”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우선 기사와 마법사들과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드보르칸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천막으로 향했다.
잠시 후 회의가 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프라넬 콜로세움에 울려 퍼졌다.
2시간 후.
드보르칸 후작은 수뇌들과 함께 김필도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무슨 뜻인가?”
김필도는 드보르칸 후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희들을 이끌어주십시오, 대공 전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후작. 세상이 인정하는 그림자 대공이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공 전하.”
“그런데도 날 따르겠단 말이오?”
“저 혼자만의 결정이 아닙니다.”
“하면?”
“저희 모두의 결정입니다.”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 대원들이 김필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다름 아닌 마족들을 유인해 갔던 기사들 때문이었다. 단신으로 마족 20명을 없앴다는 무용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김필도를 주공으로 모시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뱅글러 자작의 말에 반대할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잔뜩 상기된 자들이 더 많았다.
“후회할지도 모르오, 후작.”
“저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대공 전하의 말처럼 발악이라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정말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좋소, 수락하겠소. 똑바로 앉으시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드보르칸 백작 앞으로 가서 정좌를 하고 앉았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드보르칸 후작은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김필도처럼 정좌가 아닌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나처럼.”
김필도는 자기를 가리켰다.
그러자 드보르칸 후작 일행은 정좌를 했다.
“먼저 가장 필요한 게 뭔지 그것부터 말해 보시오.”
“남은 식량이 5일 치밖에 없습니다.”
“지금 대륙에서 가장 큰 상단은 어딘가?”
“플라잉 상단입니다.”
“할먼 상단은 어떻소?”
“다시 재기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플라잉 상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그건 아빠가 잘못 알고 있어요. 할먼 상단이 치고 올라오는 모습이 엄청나요.”
옆에 앉은 올먼 드보르칸이 말을 받았다.
“남작 의견은 다른가 보구먼.”
“제 의견이 아니라 상계의 대체적인 의견이 그래요. 앞으로 3년 안에 플라잉 상단과 할먼 상단의 순위가 바뀔 거라는 게 상계의 대체적인 의견이에요.”
“할먼 상단의 주력 상품은 카판?”
“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카판숍은 큰 타격을 받게 되겠지.”
“그럴 거예요.”
“디자이너.”
김필도는 알마니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대공 전하.”
“자넨 지금 당장 아비라로 가서 할만 상단의 상단주 샤일록과 연락을 취해. 그와 연락이 닿으면 이야크 창 라콰의 주인이 급히 보잔다고 해.”
“할만 상단 상단주를 아세요?”
“모르는 사람이면 부를 리가 없잖아.”
“그러네요. 그런데 아무 카판숍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전부가 직영점이니까 연락이 가능할 거야. 그리고 이거…….”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는 1백만 골드 한 묶음을 꺼내 알마니에게 던졌다.
“잔돈으로 교환해 오라고요?”
“아울러 벨라에 대한 정보를 모아 와. 그리고 여기 좌표도 알아가지고 가고.”
“알았어요.”
알마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드보르칸 기사단에서 말 두 필을 빌려 아비라로 떠났다.
“후작은 지금 바로 조를 짜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드보르칸 후작은 일행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뿌우! 뿌우! 뿌우!
이윽고 비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사와 마법사들이 드보르칸 후작의 천막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천 명의 부하를 만들었네요?”
리시아는 황당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강요한 적 없어요.”
“그러니까 더 황당하죠.”
“원래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잖아요.”
“루시안 공자가 지푸라기라는 거예요?”
“드보르칸 공작에게는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내가 보기엔 드보르칸 공작이 잡은 건 지푸라기가 아닌 저 녀석 같은데요?”
리시아는 삼각대에 걸려 있는 쇠사슬을 가리켰다.
“그렇게 생각해요?”
“네.”
“날 그렇게 대단하게 봐주니 고맙네요.”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은 습관 아니에요.”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잖아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이죠. 라쿤은 쿠다 덕분에 부하로 부리고는 있지만 저들이 싫다고 떠나면 잡을 명분도 없죠. 그리고 나머진 전부 리시아 양 부하고요.”
“그래도 다 붙어 있잖아요. 그건 그렇고, 할먼 상단의 단주와는 어떻게 된 거예요?”
“문 대륙에서 만났어요.”
“문 대륙에서 만나면 다들 친해지는가 봐요.”
“그러게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샤일록이 프라넬 콜로세움에 나타난 것은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워프 마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전하!”
샤일록은 김필도를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오랜만이야.”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샤일록을 맞았다.
“제가 마법 스크롤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시고 여기 좌표를 보낸 겁니까?”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그 정도도 없으면 말이 안 되잖아. 그런데 일찍 왔네?”
“대공 전하 소식을 듣고, 아비라에 들러 가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그렇게 하시죠.”
잠시 후 두 사람은 프라넬 콜로세움을 벗어났다.
“사업은 어때?”
“제가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거의 하루에 하나씩 숍을 오픈하고 있습니다.”
“매출은?”
“내년이면 플라잉 상단을 따라잡을 자신 있습니다. 더구나 저흰 신용이 아닌 1백 퍼센트 현금 매출입니다.”
“앞으론 힘들어질 거야.”
“전쟁 때문에요?”
“응!”
“전쟁은 없습니다.”
“왜?”
“제가 알아본 바로는 황제는 이케이 하다르만과 파르탄 이코스트의 승리를 인정하고 후작 작위를 내린다고 합니다.”
“그들이 문제가 아냐.”
“그럼 뭐가 문제죠?”
“내가 문제야.”
“네?”
샤일록은 깜짝 놀란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내가 문제야.’란 말은 그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하껜 아무도 없잖습니까?”
“며칠 전에 생겼어.”
“설마 드보르칸 후작이 보유한 2천 명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맞아.”
“대공 전하!”
김필도를 부르는 샤일록의 음성이 갈라져 나왔다.
발탄 제국의 각 영주가 보유한 기사와 병사를 전부 합치면 거의 3백만에 육박한다. 물론 전군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의 수치다. 하지만 드보르칸 후작이 지닌 병력은 2천 명. 발탄 제국이 보유한 병력이 무려 1천5백 배나 많다.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엄청난 수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세력을 향해 전쟁을 벌이겠다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황당하지?”
“제가 아는 대공 전하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분이셨습니다.”
“나도 내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생각해.”
“그걸 아시는 분이 전쟁을 하겠단 말입니까?”
“내가 싫다고 해서 그만둘 상황이 아니라서 그래.”
“그 상황이 어떤 건데요?”
“이케이 하다르만 뒤에 세이아칸이 있어.”
“네에?”
샤일록은 경악했다.
세이아칸. 그는 문 대륙의 이야크 평원에서 만났던 천족의 대천신군 수장이었다.
“정말입니까?”
샤일록은 확인하듯 물었다.
“펠콘에서는 헬만을 만났어.”
“제 여기에 구멍을 냈던 그 누렁이 헬만 말인가요?”
“맞아, 그놈!”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