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37화 (137/225)

# 137

헤이먼은 벽이 뜯겨 나간 방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론은 헤이먼 건너편에 앉았다.

“한잔하시겠습니까?”

헤이먼은 술병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걸 마시면 되는 거요?”

아론은 옆에 놓인 술잔을 가리켰다.

“그건 하다크 술잔입니다. 회주 술잔은 내가 가져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헤이먼은 오른편 벽장으로 가서 잔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아론 앞에 놓고는 술을 따랐다.

“귀한 술인 것 같구려.”

술병 한편에 물방울 문양이 돌출돼 있었다. 그건 최근 귀족들이 손에 넣으려고 몸살을 앓던 신의 눈물이었다.

“하다크 그 녀석에게 4대봉공 자리를 물려줄 때 축하주로 마시려고 구입한 겁니다.”

무려 7백만 골드를 주고 구입한 술이었다. 그런데 그 술을 따라줘야 할 아들은 이 자리에 없다.

“이거 내가 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 봉공.”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회주.”

“무슨 약속 말이오.”

“내 손녀딸 카샤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카샤는 내 자식을 잉태한 걸로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우리 드래고닉은 다른 건 다 버려도 자식은 절대 버리지 않소.”

“드래고닉이었습니까?”

헤이먼은 놀란 얼굴로 아론을 보았다. 헤이먼은 지금껏 아론을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 입으로 드래고닉이라고 한 것이다.

드래고닉은 드래곤과 타 종족의 혼혈을 말하는데, 타 종족이란 천족, 마족, 인간, 엘프, 드워프를 총망라한다.

수명은 드래곤의 절반 정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불사의 존재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었다.

“초대 회주 또한 드래고닉이었소.”

“어쩐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제 손녀딸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가야겠소?”

“……?”

“들어오다가 몰토에게 들었소.”

“놈의 머리를 가져오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합니다, 회주. 이 상태로 있으면 우리 어둠의 상단은 몰락밖에 없습니다.”

“그렇구먼. 내가 도와줄 건 없소?”

“내가 바라는 건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감사합니다, 회주.”

헤이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몰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르는?”

“열외 없이 전부 집합했습니다.”

“놈의 위치는?”

헤이먼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프라넬 대평원에서 발견됐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르가 집합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야크를 타고 있는 다르의 수는 총 1천여 명이었다.

다른 가문에 비해 어둠의 상단이 보유한 다르의 수는 3백가량 많았다.

그때 젊은 다르 한 명이 이야크를 몰고 왔다. 헤이먼은 이야크에 올랐다.

“1백 명씩 출발하고, 프라넬 대평원 동쪽 끝에 있는 프라넬 콜로세움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야크에 오른 몰토가 말했다.

“출발하라!”

“1조는 출발하라!”

“타앗!”

“차앗!”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2조는 출발하라!”

“두두두두! 두두두두!

각 조 조장의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이야크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질풍처럼 쏘아져 갔다.

“10조는 출발하라!”

헤이먼과 몰토는 마지막 조인 10조와 함께 출발했다.

“누가 놈을 찾고 있느냐?”

헤이먼은 옆에서 달리고 있는 몰토를 보며 물었다.

“정원사들의 이목을 전부 동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조만간 놈의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돌아오는 길엔 네놈의 머리를 가지고 오겠다.”

빠르게 달려가는 이야크 위에서 헤이먼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김필도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하는 자는 헤이먼뿐만이 아니었다. 볼삭 영지의 절반을 점령한 칼베리언 또한 김필도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그가 김필도에 대한 소식을, 아니 정확하게는 헬칸에 대한 소식을 들은 건 며칠 전이었다. 드보르칸 후작의 목을 가져오라고 내보냈던 케이안이 헬칸의 주인을 만났다는 보고를 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헬칸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헬칸의 주인에게 케이안과 그가 이끌던 조원 20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케이안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건 곧 정말로 케이안이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강해도 마족의 상대가 아니라는 통념이 산산이 부서졌을 뿐 아니라 다수의 마족이 한 명의 인간에게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계기가 됐다.

“마족이 그놈에게 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칼베리언은 켈러를 보며 물었다.

“놈은 히데우스의 정식 후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군단장님.”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만일 단장님께서 누군가에게 헬칸을 물려준다면 어떤 자를 택하겠습니까?”

“헬칸에 어울리는 전사를 찾겠지.”

“히데우스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인간이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옆에 인간밖에 없었고, 그 인간이 자격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헬칸은 곧 히데우스를 나타내고 오테르 가문의 가주를 나타냅니다. 만일 헬칸이 마계10군단으로 들어간다면 마계10군단은 히데우스가 지목한 이카렌이란 계집과 히데우스의 후계자 두 명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히데우스는 마계10군단의 분열을 피하려고 헬칸을 인간에게 주었다는 말이냐?”

“만일 루시안 그놈이 검을 소유할 자격이 없었다면 히데우스는 헬칸을 결코 내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은 곧…….”

“천족이 파악한 것처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그놈에게 헤를리온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행방이 묘연합니다.”

“모른단 말이냐?”

“프라넬 대평원의 끝자락에 나타난 것까진 알아냈습니다만…….”

“그 후로는 모른단 말이구나.”

“조만간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천족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다더냐?”

볼삭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헬싱턴으로 진격하려고 했던 계획을 무산시킨 것이 바로 서로군벌이었다.

원래는 서로군벌마저 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배후에 천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확하게 몇 명의 천족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작정 서로군벌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천족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다음에 조치를 취하려고 하다 보니 공격이 지체되고 만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움직이지 않고 있단 말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켈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조만간 마계10군단이 건너오기로 했습니다. 그때 쓸어버리면 될 겁니다.”

“그 계집이 군단장은 아닐 테고, 누구지?”

“전에 만났던 데메우스 그 애송이가 군단장이 된 모양입니다.”

“큭! 그런 덜떨어진 놈을 마계10군단 군단장에 앉힌 걸 보면 마계도 끝이군.”

칼베리언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데메우스 놈은 오면 부려 먹으면 될 테고, 지금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천족의 동태와 루시안 그놈의 행방으로, 하루빨리 파악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켈러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과 칼베리언이 애타게 찾고 있는 김필도는 길드의 도시 아비라와 벨라 사이에 있는 히부스 산에서 야영 중이었다.

히부스 산은 해발 5백 미터로 낮은 산이지만 동서 길이는 10킬로미터 달한다.

호수가 많고 산세가 완만하여 사냥터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이콰라 가문의 사냥터로 이용되곤 했다.

하지만 벨라 안쪽에 제2사냥터를 개발하면서 이곳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김필도 일행의 천막이 세워진 곳은 호수 옆이었다.

김필도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중요한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추김치 담그기.

청국장을 맛보고 나자 김치가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공간을 열고 전에 펠콘에서 콩 페이스트와 함께 샀던 배추 열 포기를 꺼냈다.

누렇게 시든 입을 따내고 단도로 뒤편에 칼집을 내서 네 등분했다. 그런 다음 물에 씻고, 배추 이파리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려 가면서 간을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배추에 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알마니가 물었다.

“반찬 만드는 거야.”

“한 번에 다 먹는 건 아닌 것 같고…….”

“저장해서 먹는 반찬이야.”

“채소를 저장해서 먹어요?”

알마니는 깜짝 놀랐다. 그의 상식으로는 채소를 저장해 먹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상들 대단하네.’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매 끼마다 먹다 보니 김치가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채소를 몇 년씩 저장해서 먹는 민족이 얼마나 있을는지.

“아무튼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맞네.”

김필도는 부지런히 간을 했다.

“제가 해줄 일 없어요?”

알마니는 김필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요리에 관심 많아?”

“관심 많으니까 대공 전하로부터 배우는 거잖아요.”

“내가 할 요리는 김치라고 해.”

“김치요?”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갖은 양념이 들어간 고춧가루에 버무려 만드는데 보관만 잘하면 이삼 년도 먹을 수 있어.”

“썩지 않아요?”

“안 썩으니까 먹지.”

“그거 대단한 음식이네요. 그런데 주 요리는 아니겠죠?”

“주 요리는 늘 밥이야. 얘는 밥을 먹는 데 곁들이는 반찬이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나처럼 소금을 적당히 뿌리면 돼.”

“적당히 어느 정도요?”

“간이 잘 배게 적당히.”

“그러니까 적당히 어느 정도 뿌리냐고요?”

“간이 잘 배게…… 풋!”

김필도는 픽 웃었다.

가만 생각하니 한국 음식엔 정량이라는 게 없다. 소금도 적당히, 고춧가루도 적당히, 참기름도 적당히, 깨도 적당히, 식초도 적당히. 모든 것이 ‘적당히’ 한마디면 끝이다. 그러다 안 되면 대충으로 바뀐다.

그러면서도 음식 맛은 끝내준다.

“대충 뿌려.”

김필도는 싱겁게 웃으며 배추에 소금을 쳤다.

소금을 친 배추를 커다란 통에 담아 놓은 다음 고추와 무, 당근, 파, 마늘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마른 통나무를 주워 왔다.

“도와줘요?”

그제야 김필도의 일에 관심을 가진 듯 리시아가 다가왔다.

“이거 둥글게 파야 해요.”

김필도는 통나무를 내밀었다.

“어느 정도 깊이면 되죠?”

“저 고추를 갈아야 하니까 30센티미터면 될 것 같아요.”

“폭은 20센티미터면 되겠죠?”

“네.”

김필도가 리시아에게 시킨 건 절구통을 만드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리시아는 자리를 잡고 앉아 통나무에 구멍을 팠다.

그녀가 작업을 하는 사이에 김필도는 다른 나무를 주워와 절구 형태로 깎았다.

절구통 만드는 작업이 끝나자 고추를 빻고, 마늘을 다지고, 무와 당근은 채를 썰고, 파는 숭숭 썰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합쳐 물과 이기며 새우젓으로 간을 맞췄다. 그 사이에 간이 된 배추는 물에 씻어 바위 위에 올려놓고 물기를 뺐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손님이 찾아온 건 한창 김치를 버무리고 있을 때였다. 김치를 담그는 사람은 김필도와 알마니였다. 알마니는 이제 김치 담그는 것에 제법 익숙해져 능숙하게 양념을 버무렸다.

“놈들을 잡아 왔습니다, 마스터.”

쿠다가 김필도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떤 놈들?”

김필도는 쿠다를 보았다.

“빅 소드 용병단 단장과 수뇌들 말입니다.”

“그럼 저 숲 속에 있는 녀석들이 라쿤인가 보지?”

“그렇습니다, 마스터.”

“전부 나오라고 해.”

“전부 나와라!”

쿠다는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사방 숲에서 바람이 불어 나오더니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폭풍의 전사라고 불리는 라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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