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인사 올립니다, 마스터!”
라쿤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두 무릎을 땅에 대라!”
김필도는 라쿤들을 보며 말했다.
라쿤들은 어리둥절했다. 이제 첫 만남이다. 보통 처음 만나면 인사를 먼저 하고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인사가 아니라 두 무릎을 땅에 대라는 말을 먼저 들은 것이다.
“마스터의 첫 명령이다!”
쿠다는 짤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라쿤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김필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 팔로는 땅을 짚되, 손의 위치는 좌우측 어깨로부터 바깥쪽으로 한 뼘, 그리고 그곳에서 앞으로 한 뼘 위치에 놓는다. 실시.”
라쿤들은 김필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의 모습은 절을 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그 상태에서 얼굴이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인다!”
라쿤들은 머리가 나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금세 김필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인사 올립니다, 마스터!”
그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땅에 얼굴을 댔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두 손은 여전히 땅에 붙인 채였다.
“지금 너희들이 한 인사는 격식을 갖춘 인사법이다. 약식 인사는 쿠다가 알고 있으니까 따로 배우도록.”
“알겠습니다, 마스터!”
“반갑다, 제군들. 나에 대해서는 쿠다로부터 들었을 걸로 알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 너희들을 만나게 해준 하늘에 감사한다, 제군들.”
“영광입니다, 마스터!”
라쿤들은 다시 얼굴을 땅에 댔다가 땠다.
“좋다. 이제 발탄 제국의 대공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의 머리를 노린 간덩이가 부은 놈의 얼굴을 구경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스윽!
라쿤들은 앉은 자세 그대로 떠올라 뒤로 물러났다.
“배추 좀 줘!”
김필도는 알마니를 보며 말했다.
“빅 소드 용병단 단장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놈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김치 담그는 게 더 중요해.”
“알았어요.”
알마니는 배추 네 포기를 김필도 앞에 있는 통 안에 넣어주었다.
김필도는 이긴 양념을 듬뿍 떠 와 배추 사이사이에 비벼 넣었다.
한 포기를 끝내고 다른 포기를 비비고 있는데, 라쿤들이 건장한 체격의 사내 11명을 끌고 와 김필도 2미터 앞에 앉혔다. 사내들은 전부 복면을 하고 팔은 등 뒤로 돌려 묶인 채였다.
“복면 벗겨.”
“알겠습니다, 마스터.”
라쿤들은 사내들의 얼굴에서 복면을 벗겼다.
“이건?”
바알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간밤에 잠을 잤었다. 그런데 깨어 보니 마나는 속박돼 있고, 얼굴엔 복면이 씌워졌으며 손은 결박된 채였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는 빅 소드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빅 소드 용병단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용병단일 뿐 아니라 용병의 수도 3천 명이나 된다.
보통 그런 거대 세력의 수장이 되면 어지간해서는 공격을 받지 않는다. 아니 암살의 위험도 없다.
자칫 공격을 하거나 암살을 하다가 실패를 하게 되면 잔인하고 철저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고 해도 목숨이 걸린 그런 일이 아니면 척을 지는 것보다 화해를 하여 필요할 때 써먹으려고 한다. 그런데 빅 소드 용병단 단장을 납치한 간 큰 녀석을 보게 된 것이다.
좌우를 살피던 그의 시선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
간편하게 보이는 옷을 걸친 자가 세숫대야 안에 배추를 집어넣고 벌건 뭔가를 열심히 칠하고 있었다.
“디자이너.”
그때 김필도가 알마니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 셔츠가 너무 너풀거린다는 생각 안 들어?”
“고춧가루가 많이 묻네요.”
“몸에 딱 달라붙게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요?”
알마니는 기대 어린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디자이너의 본능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신축성 있는 소재 있지?”
“그걸로 몸에 꼭 맞는 드레스 셔츠를 만드는 거야. 겨울엔 내의로 입을 수도 있고, 봄, 가을엔 카디건 안에 입으면 좋을 것 같아.”
“카디건은 뭐죠?”
“니트 소재로 만든 허리가 짧은 점퍼 형태의 옷을 총칭하는 말이야.”
“그런 옷도 있어요?”
“그 두 가지를 만들어 봐.”
“지금 일어나도 돼요?”
알마니는 배추가 놓여 있는 바위를 보았다. 작업은 이제 절반 정도 끝나 있었다.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어요.”
알마니는 얼른 일어나 호수로 가서 손을 씻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디자이너가 있으니까 편하긴 하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김치를 비볐다.
“날 죽인다고 해도 빅 소드 용병단을 얻을 수 없소.”
그때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빅 소드 용병단을 얻기 위해 널 데려왔다고 생각해?”
김필도는 버무려진 포기를 맨 바깥쪽 배춧잎으로 감싸며 물었다.
“아니란 말이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김필도는 바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알마니보다 약간 더 들어 보였다. 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마나 또한 상당히 안정된 상태인 걸 보면 검술도 알마니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그건…….”
“루시안 공자.”
그때 리시아가 김필도를 불렀다.
“왜요?”
“김치 담그는 일 원래 누가 하는 거죠?”
“어떤 의미의 질문이죠?”
“보통 집안일은 분담해서 하잖아요. 밥은 부인이 하고 장작을 패거나, 고장 난 걸 고치는 건 남편이 하고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김치 담그기를 주로 누가 하느냐는 질문이에요?”
“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앞치마를 걸치면 훨씬 나은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맞아요.”
“여자 일이라고요?”
“여자 일이 아니고 여자가 많이 하는 일이에요.”
“어쩐지 그림이 어색하더라.”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래요?”
“그럴까요?”
“루,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바알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가 그 이름을 기억해낸 것은 조금 전 리시아가 김필도를 부른 ‘루시안 공자’라는 말 때문이었다.
“맞아.”
김필도는 바알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바알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베다!”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저 맨 끝에 있는 녀석 뒤로 가.”
김필도는 오른편 끝에 앉아 있는 용병을 가리켰다.
아베다는 용병 뒤로 뛰어갔다.
“그놈 목 칠 준비해.”
“알겠습니다.”
아베다는 검을 뽑아 들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네게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참, 이름이 뭐지?”
“바, 바알이오.”
“좋아, 바알. 첫 번째 질문이야. 얼마 받았어?”
“20만 골드 받았소.”
“동원한 전력은?”
“그리핀 3백 마리와 용병 1천 명이오.”
“좀 더 자세하게.”
“용병 1천 명의 구성은 1급 2백 명, 2급 3백 명, 3급 5백 명이었소. 그리고 할케인을 호위했던 자들 20명은 특급이었고.”
“그럼 1천 명이 우리 손에 죽었으니까 빅 소드에 남은 용병은 2천 명가량이겠네?”
“지금쯤 이곳 히부스 산으로 들어왔을 거요.”
“그래서 그렇게 목에 힘을 주고 있나 보지?”
“조금 전에 말한 2천 명의 용병이 전부 들어왔소.”
바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크로스 보우를 든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왔네?”
김필도는 다른 배추를 세숫대야 안으로 집어넣었다.
“날 풀어주는 게 신상에…….”
“죽여, 아베다.”
“차앗!”
김필도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베다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스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용병 사내의 목이 둥실 떠올랐다.
제6장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일순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2천 명의 용병이 호수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용병 수뇌 한 명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린 것이다.
“그놈 옆으로 가!”
김필도는 방금 죽은 자 옆에 있는 용병을 턱으로 가리켰다.
“으음!”
김필도를 바라보는 바알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여전히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는 김필도의 모습은 섬뜩함을 넘어 전율적인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용병 1천20 명을 죽일 때 몇 명이 있었는지 알아?”
김필도는 다 버무린 배추를 저장용 통에 옮겨 담으며 물었다.
바알은 대답이 없었다.
“우리 여섯 명 중에 다섯 명이 움직였어. 저기 칼질을 하고 있는 아베다는 이야크를 끌고 따라와야 했기 때문에 싸움에 참여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우리에게 이야크도 없고, 너를 잡아 왔던 라쿤이 98명이나 더 있어. 2천 명 중 몇 명이나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빅 소드는 물러나라!”
바알은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용병들은 천천히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놈 봐라?’
김필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조직의 이 인자 생활을 좀 하다 보니 그는 나이에 비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비친 바알은 단순한 용병단 단장이 아니었다.
전에 1천여 명의 용병을 상대할 때도 잠시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다.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으면 물러나야 하는데, 용병들은 한 명도 물러나지 않았다. 마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조직원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제대로 된 교육이란 고등교육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조폭 교육을 말한다.
그건 곧 용병단 단장인 바알이 조직원을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뜻이 된다.
한두 명도 아니고 3천 명을 완전하게 장악해낼 정도라면 그 능력은 인정해줘야 한다.
“세 번째 질문을 할게. 날 죽여달라고 청부한 놈은?”
“먼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시오, 그럼 대답하겠소.”
“너는 지금 조건을 내걸 형편이 아니잖아.”
“그들은 내 명령을 따랐을 뿐이오. 나 하나로 끝내주시오.”
“그거 재미있는 말이구나.”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아베다를 향해 바알 옆으로 서라고 고갯짓을 했다.
아베다는 걸음을 옮겨 바알 옆에 섰다.
“그분을 해치면 우리 전부를 죽여야 할 거요.”
숲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물러갔던 용병들이 다시 돌아와 무기를 뽑아 든 채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을 다 죽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냐.”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배추 두 포기를 가져와 손에 묻은 고춧가루 양념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대공 전하, 일단 초벌을 만들어 봤어요.”
외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알마니는 활달할 목소리로 소리치며 천막을 나왔다.
“일단 손 좀 씻고.”
김필도는 호숫가로 가서 손을 씻었다.
“어? 혹시 코라트 아냐?”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알마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알마니의 시선을 받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용병단 단장 바알이었다.
“알마니?”
바알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알마니를 보았다.
“정말 코라트였네?”
알마니는 바알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