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늙었다는 거냐?”
“응!”
“우린 20년 만에 만난 거다, 알마니.”
“그게 어쨌다고?”
“내 나이가 61살이 됐다는 뜻이다.”
“그렇게 많이 먹었어?”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둘이 알아?”
손을 씻고 온 김필도가 알마니를 보며 물었다.
“크로에 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이 친구도 크로 출신?”
“네.”
“어쩐지 용병 놈들이 싹수머리가 있다 했네. 그건 그렇고 다 만든 거야?”
“초벌이라서 일단 입어 보고 필요한 부분은 고치게요.”
“줘 봐.”
“여기요.”
“자넨 김치 버무려.”
“일단 옷부터 보고요.”
“저걸 다 해야 밥을 먹을 수 있어, 디자이너.”
“알았다고요. 그리고 코라트 저 친구 죽이지 마세요.”
알마니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친구라서?”
“칼리노아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예요.”
“칼리노아?”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았다.
“한때 엘라하 서열 3위에 올랐던 가문이에요.”
“엘라하 서열 3위 가문이라면서 서열 1위 가문의 유일한 후예를 죽이려고 해?”
“칼리노아 가문을 몰락시킨 사람이 대공 전하의 외조부였거든요.”
김치를 버무리던 알마니가 말했다.
“그랬어?”
김필도는 코라트를 보았다.
“그렇소.”
코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아주 비겁한 놈이구나.”
“복수를 위해 청부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니라고?”
“원래 후작 이상의 귀족을 없애달라는 청부는 받지 않소.”
“그런데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거네?”
“그렇소.”
“좋아. 그럼 비긴 걸로 하자고.”
“뭘 비긴 걸로 하잔 말이오?”
“혼자야?”
“……?”
“칼리노아 성을 쓰는 사람이 혼자밖에 없냐고.”
“그렇소.”
“나도 혼자야. 이 세상에 아이작이란 성과 프리우스란 성을 쓰는 사람은 내가 유일해. 그리고 둘 다 개털이고.”
“난 대공께 1천21 명의 부하를 잃었소.”
“나머지 2천 명도 오늘 잃을 수도 있어. 그리고 내가 그만하자는 건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도, 외조부가 자네 가문에 행한 것 때문도 아냐. 내가 자네를 살려주는 건 알마니의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야. 알마니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자네들 목숨을 가지고 용병들을 협박하고 있을 거야.”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안에서 20만 골드를 꺼내 코라트 앞으로 던졌다.
“뭡니까?”
코라트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청부하는 거야.”
“청부요?”
“새벽 2시에 벨라 전역에 불을 질러.”
“베, 벨라라고요?”
코라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벨라는 다름 아닌 이콰라 공작령의 영도가 아닌가.
“그리고 동서남북 네 개의 대문을 지키고 있다가 그곳으로 도망치는 귀족의 목을 잘라서 몸통은 버리고 머리만 내게 가져오면 돼. 단, 양민은 빼고 귀족들만.”
“가, 가능할 거라고 보시오?”
코라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직은 정확하게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노리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 3공작의 한 명인 이콰라 공작이다.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두가 자네처럼 생각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밖에 없어.”
“대공께서 노리는 자가 누구요?”
“청부업자는 시키는 일만 해주면 되는 거 아냐?”
“20만 골드 때문에 난 부하를 전부 잃을 수도 있소.”
“이콰라 공작은 무섭고 난 무섭지 않은가 보지?”
“그건…….”
코라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넌 가부만 결정해라, 코라트.”
김필도는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알마니가 만들어 왔던 옷을 걸쳤다.
옷은 기능성 옷처럼 몸에 딱 달라붙었다. 김필도는 팔을 움직여 보았다. 신축성이 있는 소재라 그런지 활동하기에도 아주 편했다.
“어때요?”
알마니는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아주 좋아.”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아공간을 열어 하프 코트를 꺼내 걸쳤다. 그런 다음 왼편에 설풍을 차고 오른편에는 단도를 걸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헬칸을 꺼내 발치에 꽂았다.
“하겠소.”
김필도를 지켜보던 코라트는 고개를 숙였다. 개죽음이라는 걸 알면서 대항할 수는 없었다.
“우린 불길이 오르는 걸 보고 작전을 시작할 거야. 아베다, 물러나.”
“네.”
아베다는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가 봐.”
“알겠소이다.”
코라트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자리를 떴다.
“베른, 불 피워.”
“알겠습니다.”
코라트 일행이 자리를 뜨자 김필도는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돌을 쌓아둔 곳으로 갔다.
“저녁 요리는 뭡니까?”
베른은 불을 피우며 물었다.
“수육!”
“전에 머나먼 숲 앞에서 먹었던 그겁니까?”
“그땐 래딕커 고기였고, 김치도 없었잖아.”
“그럼 지금은?”
“돼지고기 삼겹살에 막 담은 김치가 있다는 거지.”
김필도는 헤벌쭉 웃으며 고기 삶을 준비를 했다.
먼저 큰 솥 하나를 꺼내 물을 채우고, 조금 전 김치 양념을 만들 때 썼던 파의 뿌리를 씻어서 집어넣었다. 파 뿌리는 냄새 제거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
그런 다음 통마늘, 정향, 월계수 잎, 클로버 등 향신료와 함께 약 4킬로그램의 돼지고기를 넣고 삼발이에 걸었다.
김필도는 손을 탈탈 털며 한창 김치를 버무리고 있는 알마니 곁으로 갔다.
“다 했어요.”
“여섯 명이 먹을 만큼만 썰어 놓고 나머지는 아공간에 넣어 놔.”
“알았어요.”
“그리고 밥도 해야 해.”
“그럴게요.”
“수고해.”
김필도는 자리를 떴다.
일행이 있던 곳에서 20여 미터를 걸어가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라쿤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김필도가 다가가자 일제히 일어났다.
“편히들 앉아. 그리고 앞으로는 식사 중에는 황제가 나타나도 일어나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마스터!”
“원래 직업이 뭐였지?”
김필도는 바로 옆에 있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사내는 40대 후반가량 돼 보였다.
“광부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그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직업 말이야.”
“그렇습니다. 저처럼 광부도 있고, 농사를 지었던 친구도 있고, 어부도, 목수도 있습니다.”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낸 셈이네. 라쿤의 운명을 원망한 적 없었어?”
“그건…….”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라쿤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의무만 강요하는 아주 더러운 거잖아.”
“어렸을 땐 정령왕이 나타나길 바랐고,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한 후에는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자식은 있어?”
“셋 있습니다.”
“자네가 이곳에 있으면 그들은 뭘 먹고 살지?”
“돈을 조금 마련해주고 왔습니다.”
“끄응! 쿠다!”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쿠다를 불렀다.
“네!”
쿠다는 얼른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알고 있었어?”
“지금껏 라쿤의 운명을 타고 났던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땐 정령왕이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경우는 없었을 거 아냐.”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 일이 끝나면 전부 이주시켜.”
“어디로 이주시킵니까?”
“우선은 루나에 살 곳을 마련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부하의 충성심을 얻어내는 기본은 엄격한 규율이 아니라, 신뢰야. 설사 작전 중에 죽어도 가족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그런 믿음을 심어줘야 하는 사람이 바로 지휘관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이번 작전이 끝나는 대로 라쿤의 전 가족을 루나로 이주시키겠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내가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잖아.”
“알겠습니다.”
“수고들 해.”
김필도는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떴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호수 건너편이었다. 그곳에 서자 모닥불가에 있는 알마니 일행이 그대로 보였다.
“살기가 없는 걸 보면 적은 아니고, 알은체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친구도 아닌데…… 계속해서 쫓아다닌다는 건 안면이 있다는 말이 되는 거지.”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면서 안면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댁들은 도대체 누구요?”
김필도는 호수 수면을 쏘듯 보며 물었다.
김필도가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 알아차린 건 프라넬 콜로세움을 떠난 후였다. 아무런 감정이 어려 있지 않은 시선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처음엔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자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시선은 이곳까지 따라붙었다.
“언제부터 알았죠?”
뒤편 어둠 속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라넬 대평원을 나설 때부터요.”
“감각이 예민하군요.”
“여섯 번째 감각을 깨웠거든요.”
“그건 천족의 기술인데.”
“천족에 친구가 있어서 배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인간 맞나요?”
“아닌 것 같나요?”
“헬칸의 갑옷을 입고, 헬칸의 검을 들고, 헬칸의 마법을 펼치는 이가 인간이라고 하면 헬칸도 놀랄 거예요.”
휙!
김필도는 몸을 돌렸다.
헬칸에 대해 그렇듯 세세하게 아는 자들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으음!”
김필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은발에 은빛 눈동자의 여인은 놀랍게도 행칼의 석상 중 하나였던 라헤나였다.
“알아보시겠어요?”
라헤나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헤나 드반드쉬 아닌가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라헤나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은색 꽃봉오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처럼 라헤나 주위가 환해졌다.
“살인적이네요.”
“뭐가 살인적이라는 거죠?”
“미모 말입니다.”
“호호호! 고마워요, 바르칸.”
라헤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바르칸?”
“내가 남긴 글 보지 못했어요?”
“봤습니다.”
“유서에도 썼지만 난 바르칸 지위를 넘겼어요.”
“그건 라헤나가 죽었을 때 효력을 발휘하는 유서였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까 무효란 말인가요?”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바르칸이 되면 우리를 종처럼 부려 먹을 수 있어요. 현재의 라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호법들은 최소한 라쿤 5명은 감당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바르칸은 라헤나가 하는 게 맞아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어요. 나는, 아니 우린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머리가 좋으신 분들이니까 금세 배울 겁니다.”
“나는 이미 수신호위는 물론이고 1백 호위들에게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 차기 바르칸이라고 선언을 했어요.”
“원래 그렇게 고집이 세세요?”
“바르칸은 여자 의견을 무시하는 성격인가요?”
“여기서 여자 남자가 왜 나옵니까?”
“바르칸은 남자고 난 여자잖아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김필도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라헤나 역시 김필도 건너편에 앉았다.
“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