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40화 (140/225)

# 140

“좋아요,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의식주?”

“이곳에 있는 105명 중 나를 빼곤 돈을 벌어 본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옷을 만들 줄 아는 사람도 없어요.”

“그동안에는 어떻게 했죠?”

“옷도 훔치고 음식도 훔쳤어요.”

“쯧! 정령왕을 모셨던 분들이…….”

김필도는 라헤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 정령왕을 모셨던 이들이라면, 족장을 바꿀 정도로 강한 권력을 지녔다는 제사장보다 더 높은 신분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자들이 옷을 훔치고, 음식을 도둑질했을 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신분이 배고픔을 해결해주지는 않잖아요.”

라헤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에게 빈대 붙으러 왔어요.”

“빈대라고요?”

“그리고 살렸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잖아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까 가방 내놓으라는 격이네요?”

“어쩔 수 없죠, 뭐.”

“아무튼. 오픈!”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1백만 골드 다발 하나를 꺼내 라헤나 앞에 놓았다.

“뭐죠?”

“7명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이 한 달을 사는 데 5골드 정도 들어요. 제가 라헤나께 드린 그 돈은 1백만 골드고요.”

“그럼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네요?”

“보통 사람에겐 그래요.”

“이거 한 장이 1만 골드인가 보죠?”

“도시에 나가면 환전해주는 환전소가 있어요. 소매치기 많으니까 조심하고요.”

“아직도 소매치기란 직업이 있어요?”

라헤나는 환하게 웃었다.

“소매치기가 직업이에요?”

“재화를 이동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직업이잖아요.”

“재화의 이동이라고요?”

“내가 그 직책에 종사할 땐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바르칸이 되기 전 직업이 소매치기였다는 거예요?”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소매치기는 첫 번째 직업이었고, 나중엔 좀 더 규모가 큰 일을 했어요.”

“어떤 일을 했는데요?”

“옷도 훔치고 음식도 훔쳐서 조달했다고 했잖아요.”

“밤손님이었단 말이네요?”

짝!

“호호호! 아주 고상한 언어를 구사하네요. 맞아요, 바르칸.”

라헤나는 기분이 좋은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걸로 옷도 사고, 식사도 하세요.”

“쫓아다닌 보람이 있네요. 고마워요, 바르칸.”

“천만에요. 식사는 어떻게 했어요?”

“소고기 말린 걸로 대충 해결했어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지나쳤던 도시 있죠?”

“내가 옷과 음식을 훔쳤던 곳?”

“거기 가면 밤에도 문을 여는 가게가 아주 많아요.”

“그곳에 가서 필요한 걸 사라는 거예요?”

“내가 사주면 좋은데 오늘 밤에 일이 있거든요.”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라헤나 일행은 가급적이면 숨겨두고 싶네요.”

“비밀 세력 같은 거란 말이죠?”

“아비라로 가서 필요한 걸 산 다음 천둥의 성에 가 계세요.”

김필도는 아공간에서 지도를 꺼내 라헤나에게 내밀었다.

“정말 우리 없어도 돼요?”

“네.”

“알았어요. 우린 바르칸의 성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20년 이상 방치된 곳이라 험할 거예요.”

“청소도 해 놓을게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고요. 그럼.”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바르칸.”

라헤나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김필도를 향해 방긋 웃었다.

김필도의 신형은 곧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다란이 보기엔 어때요?”

라헤나는 다란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사람 복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네.”

다란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도록 해요.”

“정말 가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잡은 물준데 목숨이라도 잃으면 우린 어쩌라고요.”

라헤나는 다란을 흘겨보았다.

“그럼?”

“다란과 나는 은밀하게 바르칸을 따르기로 해요.”

“저들은 누가 데리고 가고요?”

“그건 에르가 해야지요.”

라헤나는 다란 옆에 있는 은발 노인의 손에 지도와 1만 골드짜리 골드 페이퍼를 한 장 쥐어주었다.

“먼저 가 있으란 말입니까?”

“우린 물주를 모시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라헤나.”

고개를 숙인 에르는 일행을 데리고 숲을 빠져나갔다.

“이젠 어떡하죠?”

다란은 라헤나를 보며 물었다.

“조용히 따라가야지 다른 수가 없잖아요.”

“그러네요. 그런데 바르칸의 작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무모한 미친 짓이죠.”

“실패할 거라고 보십니까?”

“노리는 게 어떤 거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리겠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벨라를 혼란스럽게만 할 목적이라면 성공하겠지만 공작을 노리는 거라면 실패하겠지요.”

“만일 성공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거예요.”

“25명의 영주가 쳐들어온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바르칸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얼 노리고 작전을 펼치는 건지…….”

다란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오늘 밤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두고 보면 알겠죠.”

“잠이나 한숨 자둬야겠습니다.”

“나도요.”

라헤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호수 건너편으로부터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씨팔! 진짜 욕 나올 정도로 맛있네! 야, 디자이너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냐?”

“맛있기는 개뿔이 맛있어요? 매워 뒈지겠구먼.”

“그건 인마, 디자이너 자네가 맛을 몰라서 그래. 맛의 제왕은 뭐니 뭐니 해도 매운 맛이야. 입안으로 집어넣으면 마빡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야 하는 거야. 이 정도는 매운 것도 아냐.”

“난 고기만 먹을래요.”

“며칠만 있어 봐라. 김치만 생각하면 저절로 침이 고일 거다.”

“호호호! 절대 그럴 일 없네요.”

‘재미있는 녀석이네.’

라헤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깨어나길 백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드보르칸은 지금 어디 있다고 하더냐?”

이콰라 공작은 안으로 들어온 큰아들 힐을 보며 물었다.

“아비라를 지나 이곳을 향해 오는 중이랍니다.”

“기사들도 전부 그곳에 있다더냐?”

“식량을 구하러 내보낸 터라 대열 중에 있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식량은 좀 팔았다더냐?”

변장을 하고 식량을 사러 갈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콰라 공작은 막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처음 거래하는 사람이 식량을 사러 오면 무조건 다섯 배를 받으라는 명령을 하달해 놓은 상태였다. 드보르칸 후작이 비상금으로 챙겨 온 돈을 긁어내기 위해서였다.

“많이 팔지는 못했답니다.”

“내일이면 벨라에 도착하겠구나.”

“벨라에 들르지 않고, 우회해서 왈라크 산맥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가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집 안으로 들어온 들짐승은 길을 들이거나 잡아먹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살려서 놓아주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전부 죽여버리면 의미가 없잖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이 있는 이상 드보르칸 후작은 내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고 바이칼 이콰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명령은 하달했느냐?”

“내일 출병이 있으니까 푹 쉬어두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콰라 공작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세요, 아버지.”

“그래. 나 먼저 들어가마.”

이콰라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루시안 그놈에 대한 소식은 없었소?”

아버지 이콰라 공작이 침실로 올라가고 나자 바이칼 이콰라는 형인 힐에게 물었다.

“전혀 없다!”

아버지가 프라넬 콜로세움에서 김필도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행적을 탐문했다. 하지만 김필도의 행적은 파악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를 모욕하더니 겁나서 숨었나 보네요.”

“그런 모양이다. 그보다 내일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우린 5백 명의 마법사와 1천5백 명의 기사를 새롭게 영입하게 될 겁니다, 형님. 그럼 우린 헬모트 가문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될 테고 머잖아 넘어설 겁니다.”

“그렇겠지. 그만 쉬어라.”

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도 편히 쉬세요.”

바이칼 이콰라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멀리 성벽이 보이긴 했지만 경비 기사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들!”

바이칼 이콰라는 욕설을 내뱉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성벽 어딘가에 숨어 자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성벽으로 달려가 호되게 야단을 치고 경비 책임자에게 책임 추궁을 했겠지만 내일 출동이 있는 날이라 참았다.

그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성벽으로 갔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바이칼 이콰라가 있는 곳에서 성벽까지의 거리는 너무 멀었고, 설령 약간의 이상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이콰라 공작가의 경비는 허술하지 않았다.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해야 했다.

이콰라 성은 총 세 가지 경계를 갖추고 있다.

첫 번째는 외성 성벽에서 5백 미터 부근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진 알람 마법이다.

5백 미터 안으로 적이 침입하면 알람 마법은 곧바로 이콰라 영지 마법사 녹슨과 그의 세 제자에게 전해지고, 그들은 기갑 기사로 이루어진 경비 기사단에 연락을 하게 된다. 그럼 2백 명의 경비 기사단은 전투기갑을 착용하고 침입자를 격살한다.

이콰라 성의 두 번째 경계는 바로 성벽 위에 있다. 성벽 위에는 특별한 장치가 돼 있어, 그날 밟아야 할 돌이 아닌 다른 돌을 밟으면 곧바로 경계경보가 발령되고 역시 기갑기사들이 출병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치한 경계는 정원 곳곳에 있다.

성벽을 넘어 침입해 온 자가 정원에 들어서면 경보가 발동하여 경비 기사단이 출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경계는 무력화시켰다, 오버.”

나직한 목소리가 녹슨의 방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녹슨의 방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고 투명한 막에 막혀 반사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수고했소, 후작.”

“이제 통신실과 이동 마법진을 무력화시키러 가겠습니다.”

통신 마법구를 향해 보고를 하는 사람은 드보르칸 후작이었다.

드보르칸 후작 옆에는 딸인 올가 드보르칸 후작이 서 있고 두 사람 발치에는 시체 네 구가 나뒹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콰라 공작가의 가문 마법사인 녹슨과 그의 세 제자였다.

녹슨은 어디다 내놔도 꿇리지 않을 정도인 6클래스 마스터였지만 7클래스 유저인 드보르칸 후작과 6클래스 마스터인 올가 드보르칸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는 올가 드보르칸이 만든 침묵의 공간 안에서 드보르칸 후작과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비명을 내질렀지만 올가 드보르칸이 만든 침묵의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녹슨의 세 제자도 다르지 않았다.

드보르칸 후작과 올가 드보르칸이 만든 함정에 빠져 스승의 녹슨 옆에서 죽임을 당했다.

“두 번째 경계도 무력화시켰소, 후작.”

통신 마법구에서 김필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경계를 무력화시켰다는 건 성벽 위에 있던 경비 기사를 모두 처리했다는 말이었다.

“서치 액티브 마나(Search active mana)!”

드보르칸 후작은 마법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낮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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