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이콰라 공작과 바이칼 이콰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그것은 힐의 비명이었던 것이다.
“이콰라 공작 놈을 찾아라! 그 돼지 새끼를 찾아 목을 쳐라!”
“아버지!”
바이칼 이콰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 설치된 마법진은 아버지 이콰라 공작의 목소리가 아니면 발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이동!”
고개를 끄덕인 이콰라 공작은 낮게 외쳤다.
곧 마법진에서 푸른 광채가 솟아 나오고 두 사람의 신형을 감쌌다.
두 사람의 신형이 다시 나타난 곳은 본 이동 마법진이 있는 지하였다.
마법진을 나선 이콰라 공작은 왼편으로 가더니 양손을 벽면에 대고 오픈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벽면에 2미터 높이의 문이 나타났다.
“뭡니까?”
바이칼 이콰라는 물었다.
“아무래도 돈을 좀 챙겨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이콰라 공작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강렬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안쪽에는 금은보석이 잔뜩 쌓여 있었다.
“보물 창고군요.”
바이칼 이콰라는 깜짝 놀랐다. 이 창고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급할 때 쓰려고 모아뒀던 것들이다.”
“이번에 써야 할 것 같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공짜로 일을 해줄 사람은 없지 않느냐. 부탁을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겠지요. 그런데 누구에게 가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몬슨 후작에게 가야지.”
몬슨 후작은 헬싱턴 영지 중 이콰라 공작령 다음으로 강한 영지였다.
“그가 받아줄 거라고 보세요?”
“힐이 이콰라 기사단과 함께 지키고 있다고 해야지.”
“병사들은 어쩌고 그곳으로 왔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참입니까?”
“그건…….”
“이콰라 성이 포위된 상태라 허겁지겁 도망쳤다고 하면 되잖아.”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가 계단이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이콰라 공작과 바이칼 이콰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상당히 귀에 익었던 것이다.
“사실 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하고.”
“으음!”
“넌?”
드디어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나자 두 사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김필도였다.
“나도 있소, 공작.”
그리고 김필도 뒤편으로 드보르칸 후작과 리시아가 나타났다.
“어떻게?”
이콰라 공작은 멍한 얼굴로 김필도와 드보르칸 후작을 보았다. 그가 말한 ‘어떻게’는 드보르칸 후작이 어떻게 이곳을 알았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2천 명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어떻게 공격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이었다.
“내 아이디어였어.”
김필도는 이콰라 공작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보물 창고를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대공이 벨라를 공격하자고 했단 말이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성공한 것 같아.”
김필도는 이콰라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헬칸을 내렸다. 의도는 명백했다. 바이칼 이콰라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김필도를 살폈다.
“혀, 협상합시다. 대공.”
이콰라 공작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무슨 협상?”
“저 안에 있는 보물을 전부 드리겠소.”
이콰라 공작은 뒤편의 보물 창고를 가리켰다.
“널 죽이면 어차피 저건 내 거잖아.”
“내 아공간에는 보물이 또 있소.”
“일단 보고 이야기할까?”
“아, 알았소. 오픈!”
이콰라 공작은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안쪽에 있는 물건을 꺼내 놓았다. 수백만 골드에 달하는 골드 페이퍼와 금, 은 등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많이도 넣고 다니네.”
“이걸 전부 드리겠소, 대공. 살려주시오.”
“내기에서 네가 이기면 살려줄게.”
“어떤 내기 말이오?”
“귀를 이리…….”
김필도는 손으로 이콰라 공작을 불렀다. 그러자 이콰라 공작은 김필도 얼굴 옆에 귀를 가져다댔다.
“눈치 채지 않도록 바이칼 저놈을 봐. 들키면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김필도는 뒤편에 있는 바이칼 이콰라가 듣지 못하도록 속삭였다.
“봤소.”
“네 아들과 나와의 거리는 4미터고, 드보르칸 후작과 네 아들과 거리는 10미터야. 지금 나는 너와 붙어 있는 상태고. 즉 네 아들놈이 날 죽이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회란 말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요?”
“날 찌르고 널 구하면 넌 사는 거고,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는 거야. 어때?”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스릉!
김필도의 왼손이 오른편 허리춤으로 향한다 싶더니 단도가 이콰라 공작의 배를 뚫고 들어갔다.
“커억!”
이콰라 공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김필도의 어깨를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아들 바이칼 이콰라를 보았다. 바이칼 이콰라는 좌우를 살피며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듯 홱 몸을 돌려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갔다.
“팔푼이 취급했던 큰아들은 아비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고, 가문의 미래라며 상속자로 삼은 둘째 놈은 지 살려고 아비를 버리고 가네.”
김필도는 이콰라 공작을 빤히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죽여라!”
“맞아, 나도 죽고 싶을 거야. 믿었던 자식에게 배신을 당했는데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말이냐?”
“아, 아버지.”
안으로 들어갔던 바이칼 이콰라가 검게 죽은 얼굴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이동 마법진으로 들어가는 문을 숨겨 놨거든.”
“그럼?”
휘리릭!
바로 그때 리시아의 허리춤에 감겨 있던 데스 와이어가 허공을 날아 바이칼 이콰라의 목을 감아 돌았다.
“널 배신한 배신자도 널 뒤따라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야.”
김필도는 손목을 돌리면서 단도를 뽑아냈다.
“컥!”
이콰라 공작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아직도 독기를 품은 개처럼 보여?”
김필도는 단도에 묻은 피를 이콰라 공작 어깨에 닦으며 물었다.
독기를 품은 개란 말은 전에 프라넬 콜로세움에서 이콰라 공작이 김필도를 빗대어 했던 말 중의 하나였다.
“무사할 거라고 보느냐?”
체념한 듯 이콰라 공작은 말을 내렸다.
“우리?”
“헬싱턴에는 25개의 영지가 있고, 수십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며칠 후면 그들은 벨라를 향해 진격해 올 거다.”
“그들은 여기로 올 수 없어, 이콰라.”
“자신만만하구나.”
“왜냐면 마족과 싸워야 하거든. 2미터에서 3미터에 달하고, 이런 검을 든 괴물들과 말이야.”
김필도는 단도를 허리춤 도집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려주시오, 대공!”
바이칼 이콰라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널 살려줄 것 같았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어, 새꺄.”
바이칼 이콰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김필도는 헬칸을 번쩍 쳐들었다.
“내가 누구냐?”
김필도는 바이칼 이콰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 전하이십니다.”
“개새끼!”
김필도는 헬칸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그런데 그가 내리찍는 헬칸은 검날이 아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바이칼의 머리를 찍어 가는 부분은 헬칸의 면이었다.
검면으로 후려쳐 부숴버릴 작정이었다.
퍼억!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바이칼 이콰라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후작!”
김필도는 드보르칸 후작을 보았다.
“택배를 보내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택배요?”
“이동 마법진을 통해서 선물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하냐는 말이오.”
“이들을 보낼 생각입니까?”
드보르칸 후작은 이콰라 공작과 바이칼 이콰라의 시체를 보며 물었다.
“그렇소.”
“가능합니다.”
“머리를 잘라내고 몸통만 보내도록 하시오. 택배 도착지는…… 황실이오.”
“화, 황실이란 말입니까?”
드보르칸 후작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이콰라 공작의 시체를 황실로 보낸다는 건 바로 반역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겁나오?”
김필도는 드보르칸 후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곳을 점령한 것만 해도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도와준 건 아무것도 없소, 후작. 벨라를 점령한 건 오직 우리 힘이었소.”
“하지만 저자 말처럼 내일이면 헬싱턴에 예속돼 있던 25개 영지의 병력이 벨라를 향해 진격해 올 겁니다. 북쪽의 볼삭과 접경 지역에 출병해 있는 20만 병력도 회군해 올 테고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오, 후작.”
“왜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곳 벨라는 헬싱턴의 영도이긴 하지만 남쪽의 왈라크 산맥 북쪽에 면해 있소. 벨라의 아비라 사이를 막아버리면 이곳은 고립되오.”
“고립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치는 것보다 고립시키는 걸 택할 거란 말이요.”
“영주들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드보르칸 후작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떤 지역을 고립시킨다는 건, 그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 없는 다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나 취할 수 있는 조치다. 즉 싸움을 하자니 너무 많은 희생이 따를 것 같고, 그렇다고 가만두면 주변의 신뢰를 잃을 것 같은, 그런 애매한 상황에 처했을 때 쓸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다.
“우린 약하지 않소, 후작. 지금 전력이면 한두 개 영지 정도는 충분히 박살 낼 수 있고, 이미 벨라를 점령하면서 우리 실력은 증명해 보였소.”
“영주들은 누가 벨라를 탈환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미룰 거란 말입니까?”
“서로 미루진 않을 거요.”
“그럼?”
“회의가 좀 길어질 거요.”
“회의라고요?”
“그렇소, 공작. 그리고 이곳 헬싱턴 지역은, 볼삭 지역과는 달리 하이에나들의 전쟁터가 될 거요.”
“하이에나들의 전쟁터가 될 거라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볼삭 영지는 이케이 하다르만과 파르탄 이코스트라는 확실한 승자가 있었지만, 벨라를 점령한 우리는 확실한 승자는 아니잖소.”
“우린 발탄 제국의 공작을 살해한 폭도들이 될 수도 있겠군요.”
“걱정 마시오, 후작. 그 폭도의 수장은 내가 될 테니까. 아무튼 저 두 놈은 황실로 부치도록 하시오.”
김필도는 이콰라 공작과 그의 아들 바이칼 이콰라를 가리켰다.
그때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올가 드보르칸과 알마니가 내려왔다.
“싸움은?”
김필도는 올가 드보르칸을 보며 물었다.
“경비 기사들은 진작 처리했고, 지금은 이콰라 기사단 기사들을 없애는 중이에요. 1시간 정도면 정리될 것 같아요.”
“정리가 끝나면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오도록 해. 그리고 알마니 자넨 여기에 있는 것들 담고.”
“이거 완전 드래곤 레어네요.”
보물 창고를 바라본 알마니는 혀를 내둘렀다.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보석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권력을 얻으려고 발악하는 이유를 이제 알았어?”
“그러게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많은 금은보화 중 이콰라 공작이 자기 힘으로 번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전부가 공작이란 직책과 권력이 벌어준 돈일 테다. 사람들이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서두르시오, 후작.”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드보르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쏘아진 화살에 몸을 실었고, 이제 와서 내릴 수도 없다.
가는 데까지 가는 수밖에.
그는 바이칼 이콰라의 검을 집어 들었다. 이콰라 공작과 바이칼 이콰라의 목을 자르려는 심산이었다.
이콰라 공작 앞으로 간 그는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