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제8장 신선한 느낌
“지금 바로 들어오시오, 당장!”
통신 마법구에서 흘러나온 서슬 퍼런 황제의 한마디에, 그의 영지에 있던 헬모트 공작은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이동 마법진에 올랐다.
이동 마법진은 황실과 직접 이어진 것과 테라의 저택으로 통하는 두 가지가 있지만 그는 테라의 집에 먼저 들렀다. 그곳에 들러 예복으로 갈아입고 차를 한잔한 후에 황실로 들어왔다.
다른 자들에게도 명령이 떨어진 듯 이미 노르탄 공작과 후작 네 명이 도착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그는 노르탄 공작을 보며 물었다.
“저걸 보시오.”
노르탄 공작은 흰 천으로 덮여 있는 물체를 가리켰다. 천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시체요?”
“시체이긴 한데 둘 다 머리가 없소.”
“머리가 없다고요?”
헬모트 공작은 시체 앞으로 걸어가 천을 걷었다.
“으음!”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약간 뚱뚱한 사내와 마른 사내가 나란히 누워 있는데, 노르탄 공작의 말처럼 머리가 없었다.
“누구요?”
그는 고개를 돌려 노르탄 공작을 보았다. 체구뿐 아니라 입고 있는 옷도 눈에 익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짐작은 가는데…….”
노르탄 공작 역시 말끝을 흐렸다.
벌컥!
문이 열리고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체가 누군지 알아냈소.”
일행은 말없이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콰라 공작과 그의 아들 바이칼 이콰라요.”
예상하는 것과 사실로 확인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두 구의 시체가 이콰라 공작과 바이칼 이콰라란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깊은 바닷속 같은 침묵이 실내를 감싸고 돌았다.
발탄 제국 3공작 중 한 명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누가 그를 죽인 겁니까?”
헬모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게 없네.”
“다른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들 시체만 배달돼 온 겁니까?”
“벨라가 불탔다고 하네.”
“벨라까지?”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벨라가 불탔다는 말은 곧 이콰라 공작가가 멸문했다는 뜻이었다.
공작의 죽음과 가문의 멸문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공작이 죽었다는 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가문의 멸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곳에 있는 여섯 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 상황이다.
“이삼 일 있어야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네.”
황제는 시종을 불러 시체를 치우게 했다.
“하다르만이나 이코스트 백작일까요?”
시체를 치우고 찻잔이 앞에 놓이자 헬모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콰라 공작이 보유한 전력은 병사를 제외하고도 기사가 2천5백 명이고, 기갑 기사가 7백 명이었네. 그들을 하룻밤 만에 없애기 위해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천 명 이상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 정도 병력이 움직이면 우리 이목에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네. 그리고 두 백작의 동향을 철저하게 살피고 있네.”
“움직이지 않았단 말이군요.”
“그러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한 명밖에 없는데…….”
헬모트 공작은 중얼거렸다.
“설마 드보르칸 후작을 말하는 건가?”
“그에겐 5백 명의 마법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속이고 많은 수의 기사를 이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지금도 남쪽으로 이동 중이네.”
“아무튼 며칠 후면 누가 이콰라 공작을 없앴는지 알겠지요.”
헬모트 공작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일행은 초초한 얼굴로 벨라의 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이 벨라의 소식을 접하게 된 건 사흘 후였다.
소식을 처음 전한 자는 이콰라 공작가가 다스리던 헬싱턴 지역의 이 인자인 몬슨 후작이었다.
황제를 비롯한 귀족 여섯 명은 통신 마법구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벨라를 초토화시키고, 이콰라 공작 일가를 없앤 자는 드보르칸 후작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었습니다.”
“……!”
일행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삼 일 전 헬모트 공작이 드보르칸 후작이 가장 유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보기엔 드보르칸 후작은 물에 빠졌고, 잡을 지푸라기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지푸라기를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벨라를 공격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약 3주 전에 이콰라 공작이 프라넬 콜로세움에 머물고 있던 드보르칸 후작을 찾아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드보르칸 후작에게 이콰라 공작가의 가신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답니다.”
“영주 자리가 아니라 가신을 제안했단 말인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말해 보게.”
“드보르칸 후작이 가신 자리를 거부하자, 두 번째 제안을 할 때는 드보르칸이란 성을 쓰는 자들은 제외하고 마법사와 기사들만 받아줄 거라고 협박을 했답니다. 그리고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에 식량 판매를 금지시키고, 15일 안에 헬싱턴을 떠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했답니다.”
“도망칠 구멍도 만들어주지 않고 몰아세웠군.”
황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면 밑으로 들어올 거라고 믿었겠지요.”
헬모트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이콰라 공작의 죽음이 이해가 갔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으니 당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헬모트 공작은 통신 마법구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몬슨 후작이 물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아시오?”
“그날 같은 자리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날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거요?”
“이콰라 공작이 드보르칸 후작을 만나러 프라넬 콜로세움으로 들어간 그날 말입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만났단 말이오?”
“작은 충돌이 있었는데,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께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답니다.”
“그럼 그 일 때문에 드보르칸 후작과 프리우스 대공은 손을 잡은 거로구먼.”
“그런 것 같습니다.”
몬슨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후작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황제였다.
“벨라가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우리들에게 전력을 나눠주었기 때문입니다, 폐하.”
“그랬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슨 후작의 말대로였다. 원래 이콰라 공작가는 기갑 기사의 수가 2천여 명이었고, 기사의 수는 5천에 달했다. 그랬던 이콰라 공작가는 각 영지와의 결속력을 강화한다는 미명 하에 전력의 절반을 각 영지에 할애했던 것이다.
물론 돈을 받고 파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가진 전력을 나눠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몬슨 후작을 비롯한 영주들 입장에서는 전력을 나눠준 그 일 때문에 이콰라 공작가가 멸문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벨라로 진격할 생각입니다.”
“무슨 회의를 하고 있단 말이오?”
“의견이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조정 중입니다.”
“아무튼 의견이 조율되면 다시 연락해주게.”
“알겠습니다, 폐하.”
몬슨 후작의 얼굴이 통신 마법구에서 사라졌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았다.
똑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서 상당히 다급한 느낌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들어오너라!”
황제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걸친 중년인이 들어왔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황제는 깜짝 놀랐다.
검은 옷을 걸친 사내는 다름 아닌 크로의 단장 벡타 베칼리오 후작이었다. 여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나타났다는 건 심각한 일이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헬싱턴 서쪽과 북쪽 접경 지역에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하다르만 백작과 이코스트 백작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있는가?”
“마족과 천족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베칼리오 후작이 직접 황제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마족과 천족의 등장 때문이었다.
“지금 마족과 천족이라고 했는가?”
황제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차원의 벽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마족과 천족의 침입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온 모양이었다.
얼굴이 굳어진 사람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헬모트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도 경직된 얼굴로 베칼리오 후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폐하.”
베칼리오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족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넘어온 자들의 규모는 어느 정돈가?”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오늘 들어온 보고를 종합하면 2천3백 명가량입니다.”
“2천3백 명이나 된단 말인가?”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겁니다.”
“행적은 파악했는가?”
“파악된 자들은 1천5백여 명입니다.”
“어디에 있는가?”
“마족은 주로 이코스트 백작 편에 있고, 천족은 하다르만 백작 주위에 있습니다.”
“그자들이 공연히 간덩이가 부은 게 아니었구먼.”
황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케이 하다르만과 파르탄 이코스트가 느닷없이 전쟁을 일으키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면엔 천족과 마족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이케이 하다르만과 파르탄 이코스트는 천족과 마족의 하수인이 됐습니다.”
“알았네. 지금부터 크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천족과 마족의 근황을 조사하도록 하게. 어떤 자들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왔는지, 규모는 어느 정돈지, 목적은 뭔지 완벽하게 파악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베칼리오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베칼리오가 나가자 황제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귀족들을 바라보자 얼마 전 아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천족이나 마족과 절대 손을 잡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이 없었지만 아론은 천족과 마족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아론이 했던 말을 이젠 귀족들에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황제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천족이나 마족과의 대화 창구는 황실로 일원화할 거요. 그들에 대해 조사를 하는 건 좋은데 개별적인 접촉은 절대 하지 마시오. 그렇게 해줄 수 있겠소?”
“알겠습니다, 폐하.”
“만일 개별적으로 접촉하다 문제가 생기면 그 영지의 영주는 반역자로 간주해 엄하게 다스릴 거니까 각 영주들에게도 그렇게 전하시오.”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시오.”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해줄 참이오.”
“원하는 대로라면?”
“전쟁을 하자면 전쟁을 할 테고, 화친을 하자면 화친을 할 참이오.”
“그렇게 하려면 그들에 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하겠군요.”
“뭐라도 좋네. 천족과 마족에 관련된 거라면 전부 보고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영지로 돌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헬모트 공작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오후 6시에 통신 마법구 회의를 할 테니까 그렇게 알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귀족들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귀족들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어두웠다.
“비가 올 모양이오.”
밖으로 나온 헬모트 공작은 노르탄 공작을 보며 말했다.
“그럴 모양이외다.”
노르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봅시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각자의 마차에 올랐다.
귀족들을 태운 마차는 쫓기듯 황실에서 멀어졌다.